
“중국 위안화든 엔화든 이들이 자국 통화를 평가절하하면 미국에 매우 불공정하고 불리한 상황이 초래될 것이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얘기했던 것처럼 일본 총리에게도 전화를 걸어 ‘통화를 계속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동맹국인 유럽연합(EU), 캐나다, 멕시코에 대한 ‘25% 관세 폭탄’으로 전 세계 증시를 뒤흔들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월 3일(이하 현지시각) “미국을 상대로 환율 정책을 펴는 국가에는 관세를 더 매길 것”이라면서 환율 전쟁을 예고했다. 교역국에 대한 ‘상호 관세’ 부과 여부를 결정할 때 대미(對美) 환율과 이에 영향을 미치는 통화정책 기조 등을 반영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다. 인위적 통화 약세 정책으로 미국의 수출 경쟁력 약화를 초래하는 국가에는 보복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의중을 나타냈다.
트럼프 발언 이후 일본의 엔화는 즉각 반응했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3월 4일 중의원 재무금융위원회 회의에서 “이른바 저환율 정책을 취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 게 계기가 됐다. 트럼프 발언이 일본을 겨냥한 게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 이 발언은 외환시장에서는 내각이 일본은행의 추가 금리 인상을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지난 2월 말 달러당 149엔에서 거래됐던 엔화 환율은 3월 11일 146엔까지 급락(엔화 급등)했다. 유로화, 엔화, 파운드화 등 세계 6대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 인덱스는 같은 기간 107.22에서 103.38까지 하락했다. 트럼프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2024년 11월 5일(103.45) 수준으로 돌아온 것이다.
美 경기 침체 가능성 급부상
1월 13일 109.86까지 치솟았던 달러 인덱스는 트럼프 취임 이후 우하향 흐름을 보였다. 취임 첫날인 1월 20일 108.07을 기록했던 달러 인덱스는 2월 3일 108.88까지 올랐지만, 2월 말부터는 급락세가 완연하다. 트럼프의 환율 발언이 나온 3월 3일 106.6이었던 달러 인덱스는 일주일 만에 103대까지 급락했다.
달러 강세 기조가 약세로 돌아선 것은 기본적으로 트럼프의 관세정책으로 인한 불확실성이 미국 경제의 침체 가능성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 등 주요 투자은행(IB)은 최근 2025년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각각 종전 2.4%와 1.9%에서 1.7%, 1.5%로 하향 조정했다. JP모건은 2025년 미국 경제의 침체 가능성을 종전 30%에서 40%로 올렸다. 이 같은 우려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정책으로 인한 경기 침체를 감수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3월 9일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경기 침체를 예상하느냐”라는 질문을 받고 “우리는 과도기에 있다. 우리가 하는 것은 부(富)를 미국으로 다시 가져오는 큰일이며 이것은 시간이 조금 걸린다”고 답한 것.
스콧 베센트 재무 장관도 이와 관련, “미국은 지금 과도한 재정지출에서 디톡스(detox)하고 있는 중”이라며 거들었다. 이 충격으로 3월 10일 뉴욕 증시에서 나스닥 지수는 전 거래일 대비 4% 하락, 2022년 9월 13일(-5.16%) 이후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다우평균(-2.08%)과 S&P500(-2.70%)도 큰 폭으로 떨어지는 등 3대 지수가 트럼프 당선 이후 상승분을 모두 반납했다. 미 증시 급락의 영향으로 3월 11일 아시아 증시에서 한국 코스피(-1.28%)와 일본 닛케이평균(-0.64%), 대만 자취안 지수(-1.73%)가 하락했다.

트럼프 정부, 국채 금리 하락 '베팅'
최근의 달러 약세는 경기 침체를 감수하고 국채 금리 하락을 유도하는 트럼프 정부의 정책에서 비롯됐다는 시각도 있다. 트럼프는 GDP 6%를 초과한 재정 적자 부담을 줄이는 것을 경제정책 1순위로 삼는다. 특히 미 의회예산처(CBO) 추산 8700억달러(2024년)에 이르러 국방 예산(8500억달러)을 초과한 미 국채 이자 지출을 줄이는 것이 당면 과제다. 이를 위해 베센트 장관은 연준의 금리 인하와 상관없이 지표물인 10년 만기 국채 금리를 낮추는 정책을 추진 중이다. 단기 국채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을 늘려 장기 국채 가격 하락(금리 상승)을 방지하는 국채 발행 계획이 대표적이다. 이에 따라 트럼프 취임 당시 4.63%에서 거래됐던 미 국채 10년물 금리는 3월 3일 4.16%까지 떨어졌다. 이에 대해 트럼프는 3월 4일 의회 연설에서 “오늘 금리가 아주 큰 폭으로 하락했다. 크고 아름다운 하락(big beautiful drop)”이라고 말했다.
10년 만기 미 국채 금리 하락은 글로벌 외환시장에서 ‘달러 약세→엔화 강세’ 구도를 만들고 있다. 기준금리 인상으로 일본의 10년 만기 국채 금리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최고치인 1.577%(3월 10일)까지 올라오고, 미·일 금리 차가 2.78%포인트로 좁아지면서 엔화 수요가 강해질 조짐이다. 조은 국제금융센터 책임 연구원은 “미·일 금리 차가 좁아지면서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움직임이 나타나면, 글로벌 자금의 일본 유입으로 엔화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수 있다”면서 “일본이 유일하게 긴축 행보를 예고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분석했다.
韓 원화, 평가 절하… 상호 관세 타깃 될 수도
한국의 원화는 달러 약세에도 불구하고 통화가치 절하가 증폭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시작 이후 일본 엔화는 5.53% 절상된 반면, 한국 원화는 1.2% 절하됐다. 이에 따라 트럼프 취임 당일 100엔당 920원대였던 엔화 대비 원화 환율은 3월 11일 989원까지 상승했다. 달러 약세에 따라강세 전환한 엔화 등 글로벌 통화와 정반대 길을 갔다는 의미다. 2024년 대미 무역 흑자(557억달러) 규모가 세계 8위인 한국이 원화 약세를 통해 불공정 무역을 하고 있다고 공격받을 빌미가 될 수 있는 요인이다. 가뜩이나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관세가 미국의 네배 수준”이라면서 상호 관세 부과 위협을 하고 있다. 벌써 트럼프 정부는 30개월령 이상 소고기 수입을 금지한 한국의 월령 검역 규제를 해제하라는 미국 축산 업계의 요구를 공개하는 등 한국에 대한 비관세장벽 관련 압박을 가하고 있다. 한 국책 연구원 관계자는 “한국 원화의 약세는 12·3 비상계엄 사태로 인한 정치적 불확실성 때문에 증폭된 측면이 많지만, 상대방 약점을 활용하는 트럼프 측이 이를 한국에 대한 협상용 카드로 활용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면서 “최악의 시나리오를 전제로 대응 카드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티븐 미란, ‘마러라고 협정’… 100년 만기 무이자 국채 매입 제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브릭스 5개국(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이 브릭스 통화를 발행하며 달러 패권에 도전할 경우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경고한 바 있다. 베센트 재무 장관은 ‘강달러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의 제조업 부흥과 무역 적자 축소를 위해서는 달러 약세가 필요하다는 인식도 나타낸다. 강달러 지지를 외치면서도 교역 상대국의 인위적 통화 절하를 관세로 보복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이유다.
이같이 이중적인 트럼프의 환율관(觀)은 스티븐 미란(Spetephen Miran)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이 2024년 11월 발표한 ‘글로벌 무역 시스템 재구조화를 위한 사용자 가이드’에 잘 나타났다. 그는 “국제 통화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달러의 과대평가는 미국 제조업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제조업 기반 지역 경제를 붕괴시킨 반면, 소수 부유층의 금융자산 증식에 기여했다”고 진단했다.
이 같은 왜곡된 경제구조를 교정하기 위해서 미란 위원장은 WTO(세계무역기구) 중심 다자 무역을 미국 중심 양자 무역 체제로 전환하고, 관세를 통해 교역 상대국이 달러의 과대평가를 시정하는 ‘마러라고 협정’을 수용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미국·영국·독일· 프랑스·일본이 달러 약세를 합의한 1985년 플라자 협정을 본뜬 통화 협정을 체결하자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EU, 사우디아라비아 등 안보 동맹국이 미국의 100년 만기 무이자 국채를 매입하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트럼프 정부가 달러 패권을 지키기 위해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려는 것도 주목할 지점이다. 달러에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이 활성화하면 미 국채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는 게 트럼프 측 구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