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 9일 일요일 오후 3시, ‘2025 대한민국주류대상 박람회’ 행사장 한쪽 경매장. 100여 명의 애주가가 무대 앞을 빼곡히 메운 가운데, 빠르고 다급한 진행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2025 대한민국주류대상 경매쇼 시작합니다. 품목은 공부가주 65주년 봉인 원장 기념주입니다. 시작가 40만원입니다.”
사회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갔다. 순식간에 가격이 치솟았다. 경매사가 40만원을 부른 지 불과 10초 만에 경매가는 50만원을 돌파했다. 참가자 눈빛은 점점 더 진지해졌다. 60만원대를 넘어서니 일순 경매장에 긴장감 넘치는 침묵이 감돌았다. 정적 가운데 한 명이 손을 들고 “62만원”을 외쳤다.
“더 높은 금액 없으십니까?”
그때 검은 옷을 입은 한 남성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64만원입니다.”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전 세계에 딱 2365병뿐인 공부가주 65주년 봉인 원장 기념주는 이렇게 새 주인을 찾았다. 국내 최고 술을 가리는 이번 2025 대한민국주류대상 박람회가 3월 7일부터 9일까지 3일간 서울 강남구 세텍 전관에서 열렸다. 대한민국주류대상은 올해 12회를 맞은 대한민국 대표 주류 품평회다. ‘국내의 좋은 술을 발굴해 널리 알리고, 건전한 주류 문화 형성을 지원한다’는 목표로 조선비즈가 2014년부터 매년 개최하고 있다. 올해부터 박람회로 확대됐다. 마지막 날에는 경매쇼를 포함해 입문자를 위한 술 관련 강연과 대상 시상식이 열렸다.
"색으로 마실 줄 알게 됐어요"… 지식·경험이 어우러진 주류 교육의 장
박람회 마지막 날 강연장은 100여 명 청중으로 빼곡했다. 오후 1시, 김상미 WSA와인아카데미 원장이 ‘재미난 와인 이야기’라는 주제로 강연을 시작했다.
“와인은 8000년 역사의 ‘신의 물방울’입니다. 맥주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만들지만, 와인은 포도를 짜서 놔두면 저절로 발효되는 신비로운 술이라 오래전부터 신이 만들어 인간에게 준 음료로 여겼습니다.”
김 원장 목소리에 청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와인은 따르는 소리부터 귀를 자극하고, 눈으로 색을 보고, 코로 향을 느끼고, 입으로 맛과 질감을 즐기는 오감의 술”이라고 강조했다. 강연장 맨 앞줄에 앉은 대학생 최지원(24)씨는 “진한 색은 소고기, 연한 색은 닭고기, 중간색은 돼지고기와 잘 어울린다는 팁을 당장 오늘 저녁에 써볼 것”이라고 말했다. 오후 2시부터는 앤디 윤 케네디하우스스피리츠(KHS) 브랜드 앰배서더가 ‘뉴 홈메이드 하이볼 레시피’를 주제로 강연을 이어 갔다. 그는 시연을 곁들이며 하이볼 제조법을 알려줬다.

“도수 높은 주류를 그대로 마시긴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하이볼로 만들면 맛있고 깔끔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그는 “중국 바이주에 탄산수나 진저에일을 섞으면, 훨씬 편안할 뿐 아니라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맛까지 즐길 수 있다”며 위스키뿐 아니라 소주, 진, 보드카, 전통주 등 다양한 주종으로 하이볼 만드는 방법을 소개했다.
"술맛 기준이 달라졌다"… 다양성으로 진화하는 한국 주류 시장
이날 오전 9시 30분부터는 대상 수상작을 발표했다. 올해 대상을 받은 술은 한국 주류 시장의 새로운 흐름을 여실히 보여줬다.
우리 술 탁주 부문에서는 전체 탁주 중 가장 좋은 술로 꼽힌 농업회사법인범표주조 ‘범표 생막걸리(7도)’가 베스트 오브 2025를 수상했다. 이천쌀을 사용해 세 번 걸러 만든 이 고급 막걸리는 3일 내내 준비한 술을 전부 팔았다. 농업회사법인한강주조 ‘나루 생막걸리 11.5(11.5도)’, 다랭이팜 ‘유자가득 드림09(9도)’, 제이1농업회사법인 ‘경탁주12도(12도)’, 팔팔양조장 ‘하드포션(14.3도)’ 등 기존 5~6도 막걸리 경계를 넘어선 고도수 막걸리 제품도 올해 대거 수상했다. 소주 부문에서는 17도 미만 희석식 소주부터 30도 이상 증류식 소주까지 다양한 제품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롯데칠성음료 ‘새로’와 하이트진로 ‘진로’ ‘참이슬 후레쉬’, 대선주조 ‘대선 159’ 등은 희석식 소주 부문에서, 스마트브루어리 ‘마한48’ 등은 증류식 소주 부문에서 수상했다. 농업회사법인 밀과노닐다가 선보인 ‘진맥 시인의 바위’ 같은 안동소주 생산자도 여전히 강세를 보였다. 맥주 부문에서는 불과 5년 전만 해도 고전하던 국산 크래프트 맥주가 약진했다. 서울브루어리 ‘모듈러 러스틱 팜하우스에일’은 고대 곡물 엠머밀로 만든 독특한 맥주다. 블루웨일브루하우스 ‘퀸비임페리얼스타우트’는 꿀을 넣은 14도 고도수 맥주로 주목받았다.

와인 부문에서는 레뱅 ‘로쉐마제 메를로’ 가 5회 연속 대상을 받아 기록을 세우며 중저가 와인 시장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화강주류 ‘아카데미아 푸카리 페타스카 나그라’라는 몰도바 원산지 와인은 5회 수상 기록을 세웠다. 국내 와인 소비자 안목이 높아지면서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유명 산지가 아니더라도 품질 좋은 와인이라면 인정받는 추세를 반영했다.
"술은 이제 경험"… 한국 주류 문화 고도화
이번 박람회는 단순한 시음과 판매를 넘어 국내 주류 산업 현재와 미래를 보여주는 종합 축제로 평가받았다. 세 개 전시관 200여 개 부스에서 펼쳐진 이번 행사는 한국 주류 문화가 마시는 대상에서 경험하는 문화로 진화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행사장에서 만난 60대 부부 김수영·박슬아씨는 “우리 젊을 때는 그저 취하려고 마셨지만, 요즘은 술 자체를 음미하면서 적당히 마시는 문화가 생겼다”며 “늘그막에야 막걸리, 와인, 위스키가 무엇이 다른지 알고 마시게 됐다”고 말했다. 사흘 행사 내내 박람회장은 나만의 인생 술을 찾는 쇼핑 열기로 뜨거웠다. 쇼핑카트와 여행용 캐리어를 들고 온 관람객이 흔히 등장했다. 일부는 박람회장 구석에서 대형 등산 배낭을 방금 산 술로 가득 채웠다. 희귀 주류를 앞세운 일부 브랜드 부스는 정오를 전후해 ‘매진’ 팻말을 내걸었다. 우리 술 탁주 부문에서 최고상을 받은 범표 생막걸리 진열장은 하루 100병 이상을 준비해 왔음에도 3일 연속 텅 비었다. 충청남도 예산 사과로 만든 국산 사과 증류주 ‘추사 50’ 역시 사흘 내내 박람회장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가는 오픈런(open run)을 해야만 구할 수 있었다.
특히 이번 박람회에서는 국내 전통주 시장 성장이 두드러졌다. 유자스파클링 막걸리 ‘유톡자톡’으로 잘 알려진 양주도가 앞에는 시음하려는 관람객으로 장사진을 이뤘다. 농업회사법인송도향 유한회사 ‘오마이갓 스파클링 봄꽃’처럼 전통 막걸리에 톡톡 튀는 탄산을 가미해 젊은 소비자층을 공략한 사례도 있었다.
‘싱글몰트 위스키 바이블’ 저자 유성운 한국증류주협회 사무차장은 “이번 박람회로 잘 알려지지 않은 국산 주류가 수백 종 이상 빛을 발했다”며 “소비자 접점을 늘리고, 노출도를 높여 세계시장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