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저자(魏哲家·오른쪽) TSMC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가 3월 3일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미국 내 신규 제조 시설에 1000억달러를 투자할 계획을 발표했다. / 사진 AFP연합
이저자(魏哲家·오른쪽) TSMC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가 3월 3일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미국 내 신규 제조 시설에 1000억달러를 투자할 계획을 발표했다. / 사진 AFP연합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3월 3일(이하 현지시각) 큰 선물을 받았다. 세계 최대반도체 파운드리(반도체 수탁 생산) 업체인 대만의 TSMC가 1000억달러(약 144조8400억원)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650억달러(약 95조1500억원)를 투자해 2030년까지 미국 애리조나주에 파운드리 공장 세 개를 짓는 기존 투자와 별개로 1000억달러를 추가로 투자하면서 TSMC는 미국 역사상 단일 해외 기업으로는 최대 투자를 단행하는 기업이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TSMC의 투자를 통해 애리조나주에만 2만5000여 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전망하면서 인공지능(AI) 분야에서 미국의 지배력이 계속 강하게 유지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1000억달러에 이르는 TSMC의 투자는 세 개의 반도체 팹을 건설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기존 650억달러 투자를 통해 현재 완성돼 가동 중인 한 개, 건설 계획 중인 두 개를 포함하면 총 여섯 개의 반도체 제조 라인이 애리조나주에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번 발표에서 눈여겨 볼 부분은 첨단 패키징을 위한 두 개 공장을 별도로 건설하는 것과 함께 그동안 대만에만 있었던 반도체 연구개발(R&D) 센터를 미국에 건설하기로 한 점이다. 트럼프가 희망했던, 미국에서 본격적인 반도체 제조를 TSMC가 책임지는 형국이다.

안보·정치 우선한 TSMC 대규모 투자

TSMC가 이와 같은 대규모 투자를 결정한 데는 경제적 측면보다는 안보 및 정치적 측면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취임 직후인 1월 27일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이외 지역에서 생산돼 미국으로 수입되는 반도체에 대해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관세장벽을 회피하려면 이제 미국 내에서 반도체가 생산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에 대해 25%를 넘어 필요할 경우 50%, 심지어 100% 관세도 부과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해외 반도체 기업의 미국 투자를 독려했다. 특히 TSMC와 대만을 겨냥해 트럼프 대통령은 이들이 미국으로부터 반도체 산업을 훔쳤다고 발언하면서 누구를 타깃으로 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였다. 아울러 대만은 적절한 비용 지불 없이 미국으로부터 안보를 의지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대만은 미국의 관세 부과 위협을 예상하고 다양한 대응 논리를 구축해 왔다. 대만에서 생산하는 반도체 대부분은 바로 미국으로 향하지 않는다. 중국이나 베트남 등으로 수출돼 각종 전자 기기 부품으로 활용되고, 이후 완제품이 미국으로 수출되는 형태다. 이에 따라 미국이 대만산 반도체에 대해 별도의 관세를 부과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반도체에 관세를 직접 부과할 수 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대만 정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다급해진 대만 정부와 TSMC는 미국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결정하는 방법으로 트럼프 대통령 달래기에 나선 것이다.

TSMC는 세계 파운드리 시장 90% 이상을 장악한 압도적인 강자다. 삼성전자가 몇 년 동안 수조원의 투자를 통해 추격에 나섰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파운드리 분야에서 TSMC의 경쟁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TSMC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일찌감치 미국에 투자할 것을 요구해 왔다. 2019년 트럼프 대통령 시절 TSMC는 5㎚(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기술을 이용한 반도체 생산 라인을 미국에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조 바이든 정부 시절에는 미국 정부가 제공하는 66억달러(약 9조5600억원) 규모의 보조금 수령을 조건으로 2028년까지 2㎚급의 첨단 생산 라인을 건설하기로 합의했다. 대만의 저렴한 인건비와 성실한 근로자 그리고 잘 갖춰진 반도체 생태계에 의존해 오던 TSMC가 거의 모든 것을 백지상태에서 시작해야 하는 미국 생산 라인 건설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대만 정부와 TSMC는 수요처에 반도체 생산 거점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했지만, 최첨단 공정과 R&D는 대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래야만 대만이 미국으로부터 지속적인 안전보장을 제공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술적인 관점에서도 생산 거점과 R&D 거점이 붙어있는 것이 유리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은 이와 같은 TSMC와 대만의 구상을 무력화시켰다.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 서울대 환경대학원 공학박사, 전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연구관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 서울대 환경대학원 공학박사, 전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연구관
대규모 반도체 라인의 건설은 상당 기간이 소요된다. 월간 기준으로 12인치 웨이퍼 5만~10만 장 규모의 생산 설비를 갖추려면 관련 노하우가 잘 축적되어 있는 대만에서도 2년 이상이 소요된다. 미국의 경우라면 최소 4년 이상 소요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 임기 이후에야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실제 생산을 위한 장비 반입 및 설치, 각종 테스트 등을 거치는 데도 2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이번에 TSMC가 발표한 1000억달러 투자는 2030년 이후에야 마무리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자신의 임기 때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지만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TSMC를 압박하고 나섰던 것은 단순히 반도체 라인을 추가로 건설해 미국 내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구상보다 더 높은 차원의 구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발표에서 특징적인 점은 첨단 패키징과 R&D 센터까지 미국에 건설한다는 점이다. 이는 미국이 특별히 요구했기 때문에 포함됐을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단순히 제조 거점의 확보를 넘어서 TSMC의 핵심 역량을 미국으로 이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TSMC의 발표대로 계획이 진행될 경우 대만 내 여러 장비 회사 및 반로 집결할 수밖에 없다. 결국 미국 내에 완결된 형태의 반도체 관련 생태계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흔들리는 반도체 국제 분업 체계

TSMC의 결정 이후 관심은 한국 반도체 업체에 쏠리고 있다. 과거와 같은 수십억달러 규모로는 트럼프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지고 있다. 특히 TSMC의 패키징 라인에 HBM 메모리 후공정을 위탁하고 있는 하이닉스의 경우 애리조나주에 HBM 라인을 건설하라는 압력이 커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렇게 되면 미국으로서는 애리조나주에 AI와 관련한 모든 역량이 결집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대만과 우리나라로서는 미래를 위한 투자가 미국에 집중되면서 국내 첨단 제조업 공동화가 가속화 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만 안보에 대한 노골적 위협을 통해 원하는 것을 획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전부터 대만에 대한 첨단 무기 공급 제한, 태평양 함대의 대만 인근 활동 제한 등을 언급해 왔으며 대만 유사 사발생 시 미국 개입이 의무는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대만의 불안감을 자극해 왔다. TSMC의 대규모 미국 투자에 대해 대만 내부적으로는 대만의 미래와 현재를 맞바꾼 것이라는 비판적 평가가 많다. 2030년 중반이 되어 TSMC의 기술과 설비가 모두 미국에 자리를 잡게 되면 미국이 더 이상 대만을 지켜줄 필요가 없어지는 것 아니냐는 극단적 분석도 나오고 있다. 대만이 중국의 공격으로 점령되면 미국이 세계에서 유일한 최첨단 반도체 공정 기술과 생산 라인을 보유한 국가가 되는데 미국이 굳이 나서서 대만을 방어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우려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만 반도체 인력의 해외 유출이 더욱 가속화할 것이라는 전망도 대두되고 있다. 반도체와 관련한, 지난 30년 동안 형성되어 온 국제 분업 체계가 근본적으로 해체되고 있는 것이다.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