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배우 진 해크먼이 지난 2월,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외부 침입이나 범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부검 결과 주방에서 발견된 아내가 먼저 병으로 숨진 다음, 알츠하이머로 사태를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주일을 홀로 지낸 그가 심장마비로 숨졌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다시 열흘 정도 지나서야 그들의 시신이 발견됐다. 쓸쓸한 작별이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포세이돈 어드벤처’ ‘크림슨 타이드’ 등 수십 편의 영화에서 개성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던 배우. 1992년 그에게 남우조연상을 안겨준 ‘용서받지 못한 자’에 앞서 1972년 제42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선물한 ‘프렌치 커넥션’은 악의 유혹으로 휘청거리는 거칠고 삭막한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뉴욕 경찰 도일이 거리를 질주한다. 바람은 차갑고 도시는 무심하다. 범인은 살기 위해 도망치고, 형사는 체포하기 위해 쫓아간다. 도일의 목표는 미국에 잠입한 프랑스 마약 밀매 조직의 일망타진이다. 부족한 수면과 매 순간 쌓여가는 피로감을 이기는 건 쉽지 않다. 그를 사로잡고 있는 건 형사의 정의감이 아니라 범죄 사냥꾼의 사나운 본능일지도 모른다. 형사와 범죄자의 운명은 종이 한 장 차이라지만 그게 무엇이든, 도일은 집착과도 같은 신념으로 범죄자의 멱살을 틀어쥐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린다.
감정적이고 과격한 성격의 도일 옆에는 침착하게 보조를 맞추는 동료, 루소가 있다. 그들은 한겨울 추위에 몸을 떨며 발품을 팔고 거리에서 숱한 밤을 잠복한 결과, 곧 엄청난 규모의 마약 밀매가 있을 거란 정보를 입수한다. 크게 한 건 할 기회가 왔다는 보고를 듣고도 반장은 실적 없이 수사가 끝날 것을 우려하며 도일을 믿느냐고 루소에게 묻는다. 루소는 즉시 대답한다. “제 파트너니까요.”

악은 뻔뻔하고 교활하며 화려하고 정교하다. 프랑스 마드리드에 근거지를 둔 마약상 알랭은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마침내 미국에 도착한다. 도일은 그를 추격하고 영악한 알랭은 미행을 눈치챈다. 알랭은 도일을 따돌리려고 지하철을 이용한다. 탈 듯 말 듯, 내릴 듯 말 듯 알랭은 능란하게 도일을 도발하고 희롱한다. 도일은 놓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하지만 아차 하는 순간, 지하철 문이 닫히고 약 올리듯 미소 짓는 알랭과의 거리는 절망적으로 멀어진다.
알랭이 보낸 킬러의 공격을 받아 도일의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그는 차를 몰아 킬러가 타고 달아난 전철을 추격한다. 뉴욕 시내를 질주하며 인도를 넘고 차를 부수고 보행자를 위협하면서도 그는 머뭇거리지 않는다. 왜 온갖 위험을 감수하고 미친 듯 달려야만 하는가, 질문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는다. 진실은 무적이라고, 선은 악을 쉽게 이긴다고 사람들은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진실은 게으르고 선은 가벼이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반면 원초적 욕망을 등에 업은 악은 언제나 훨씬 앞에 서서 선의를 비웃는다. 알랭도 섣불리 꼬리를 내주지 않는다. 도일은 화가 난다. 대체 프랑스에서 들여온 마약을 어디에 숨겨둔 거지?
삶은 때로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모래 위에 성을 쌓는 듯 허탈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그래도 도일은 멈추지 않는다.

길이 없어도 스스로 길을 만든다. 그가 말하는 것 같다. ‘완벽한 인간은 없어. 내가 정의의 사도는 아니지만, 나쁜 놈은 반드시 붙잡아 벌 받게 할 거야. 그놈도 세상 무서운 줄은 알아야지, 안 그래?’ 비로소 예기치 못했던 한 줄기 빛이 어둠을 비춘다.
‘프렌치 커넥션’은 해피엔드를 실현하는 꿈의 동화는 아니다. 도일은 악의 실체에 다가서지만, 냉혹한 조소가 횡횡하는 현실은 혼돈과 질서, 정의와 불의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그를 배신한다. 법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되는 악에 대한 배려와 포용, 혹은 법의 정의를 능가하는 악의 카르텔이 더 큰 힘을 발휘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의 진실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었을 뿐, 보상도 없고 승리의 환호도 없다. 그렇다 해도 도일은 패배하지 않았다. 그는 뜨겁고 절실하게 쫓고 쫓기며 삶의 중심으로 뛰어들었다.
한평생을 살며 평범한 사람도 연기자처럼 다양한 역할을 맡는다. 아들이 되었다가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었다가 할아버지가 된다. 직장 후배에서 상사로 변모하고, 눈부신 전성기를 맞이하다가 추락의 골짜기를 헤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대부분은 연약한 생명으로 태어나 혼란스러운 청소년기를 보내고 달곰쌉쌀한 사랑을 나눈 다음, 무거운 책임을 감내하는 사회인으로 살다 끝내 나약한 모습으로 인생의 막을 내린다.
거친 야성의 형사, 고집스러운 함장,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변호사 등을 연기했던 진 해크먼은 일반인보다 훨씬 극적이고 다양한 생을 살았다. 그가 연기한 마지막 배역은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노인이었다. 대본을 미리 봤다면 맡고 싶지 않았겠지만, 백전노장의 배우답게 주어진 역할을 마치고 조용히 무대를 내려갔을 것이다. 조명도 박수도 없이. 보통 사람과 조금도 다름없이.
우리 모두, 저마다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누군가는 돈을, 누군가는 성공을, 누군가는 사랑을. 그러나 살다 보면 어느새 목표는 희미해진다. 언제부턴가 달리는 것, 그 자체가 운명이 되고 의무가 된다. 그 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설사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고 해도, 슬픔과 외로움, 이승과 허망한 이별이 기다리고 있다 한들,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해도 포기할 수는 없다. 목적과 의미를 알든 모르든, 인생이란 끝없는 추격전이다. 그래도 가끔, 우리는 멈춰서서 문득 자문할 때가 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쫓아 숨 가쁘게 뛰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