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위기에 처한 유럽 국가들은 국방비 지출을 늘리는 방법으로 재무장하고 있다. /사진 셔터스톡
안보 위기에 처한 유럽 국가들은 국방비 지출을 늘리는 방법으로 재무장하고 있다. /사진 셔터스톡

“유럽은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미국의 방패는 무너지고 있으며, 우크라이나는 버려지고 러시아는 강해지고 있습니다. 워싱턴은 네로의 궁전이 되었습니다. 불같은 황제, 굴종하는 신하들 그리고 케타민에 취해 공공 부문을 유린하는 광대가 있을 뿐입니다.” 

2025년 3월 4일 프랑스 상원, 75세의 클로드 말뤼레(Claude Malhuret) 의원은 8분간 연설을 통해 자유세계를 파국으로 몰아가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정부를 비판하고 유럽이 운명적으로 맞이하고 또 극복해야 할 현실을 증언했다. “이것은 자유세계의 비극이지만, 무엇보다도 미국의 비극입니다. 트럼프의 메시지는 동맹이 되어봤자 지켜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적보다 당신에게 더 관세를 매기고, 당신을 침략한 독재자를 지원하고 당신의 영토를 강탈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입니다.”

장엄하고 격조 있게 그러나 신랄한 그의 발언은 유럽이 보는 오늘의 미국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역사상 어떤 미국 대통령도 적에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동맹에 반하여 침략자를 지원하지 않았으며, 미국의 헌법을 유린하고 수많은 불법적인 명령을 쏟아내며, 반대하는 판사를 쫓아내고 군 장성을 한꺼번에 해임하고, 모든 견제와 균형을 약화시키지 않았습니다. 트럼프가 지금까지 한 행위는 그의 과거 4년보다 미국에 더 많은 해를 끼쳤습니다. 트럼프는 민주주의를 강탈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럽이 이제는 배신자(트럼프)의 지원을 받는 독재자(푸틴)와 싸우고 있습니다” 고 말했다. 배신에 맞서기 위해서는 맞서 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트럼프 2기 정부가 시작되면서 전후 80년간 굳게 유지된 대서양 관계가 끝으로 치닫고 있다. 유럽은 현실을 직시하고 추락하는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안보 위기에 처한 유럽, 자강을 향한 각성

유럽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안보 위기다. 전후 80년 동안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를 통해 미국에 자신의 안보를 맡겨 놓은 상황이었지만, 공산권 몰락 후 그나마 냉전기에 갖고 있던 방위 능력도 해체해 버렸다. 눈앞에서 대치하던 적이 사라진 상황에서 국방에 돈 쓰는 것은 불필요해 보였기 때문이다. 독일의 경우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동·서독을 합해 80만 명의 군인이 있었지만 2024년 기준 18만 명을 약간 상회하는 수준이다. 7000대 이상 보유하던 전차도 지금은 200대 정도 남았다. 그나마 절반 정도만 기동이 가능한 상태다. 심지어 네덜란드는 2011년에 전차 부대를 아예 없애 독일로 통합시켰다. 국방을 중시한다던 스위스도 군인 수가 같은 기간 40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줄었다. 이런 변화는 국방비 감축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2015년 유럽 나토 회원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방비 평균은 1.43%에 불과했다. 회원국별 지출 비율을 보면 그리스(2.24%)와 영국(2.13%) 등 5개국만이 겨우 2%를 넘고 있다. 미국이 3.42%인 것과 비교해 턱 없이 부족하다. 프랑스(1.82%), 독일(1.36%), 이탈리아(1.0%) 등 유럽 주요국의 수준은 더 낮다.

김흥종 고려대 특임교수 - 서울대 경제학 학·석·박사, 옥스퍼드대 명예 펠로, 현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민간자문위원회 위원, 전 대외경제 정책연구원(KIEP) 원장
김흥종 고려대 특임교수 - 서울대 경제학 학·석·박사, 옥스퍼드대 명예 펠로, 현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민간자문위원회 위원, 전 대외경제 정책연구원(KIEP) 원장

물론 트럼프 1기(2017~2020년)를 겪으면서 유럽 나토 회원국은 국방비 지출을 늘리기 시작했다. 2024년만 한정할 경우 폴란드(4.12%)와 에스토니아(3.43%)의 GDP 대비 국방비 당시 비중은 미국(3.37%)보다 높다. 그리스(3.08%), 핀란드(2.41%), 영국(2.33%)이 뒤를 잇고 있으며, 독일(2.12%)과 프랑스(2.06%)도 2%를 넘어섰다. 나토 32개 회원국 중 23개국이 2%를 넘어선 것이다. 하지만 미국과 비교하면 여전히 국방비 지출은 부족한 수준이다. 2024년 미국이 7550억달러(약 1096조2600억원)를 국방비로 지출하는 데 반해 캐나다와 나토 30개국의 국방비 지출은 다 합쳐도 4300억달러(약 624조3600억원)에 불과하다.

“유럽 안보는 유럽이 책임져라”는 트럼프의 입장을 확인한 유럽은 자체 방위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내놓았다. 독일은 방위력 강화를 위해 헌법을 개정, ‘부채 브레이크(Schuldenbremse·나랏빚을 질 수 있는 한도 규정)’를 해제하고 국방 분야에 대규모 재정 투입을 결정했다. 국방비 지출은 부채 산정 시 예외로 인정한다. 독일 국방 장관을 역임했던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도 EU 차원의 국방비 늘리기에 적극적이다. 

과거 나토를 탈퇴한 경험이 있고, 나토에 회의적이었던 프랑스의 경우 ‘내가 맞지 않았느냐’면서 유럽의 자체 방위 능력을 강화하고 유럽군을 창설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프랑스가 주장해 왔던 유럽군 전략은 이제 EU와 독일 등에서 호응을 받고 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유럽은 이제 확실하게 재무장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어려운 시기에 안보 강화가 요구되는 유럽, 재무장 시간 걸려

유럽이 방위력 강화에 힘을 쏟고 있지만, 얼마나 빨리 자체 방위 완성의 과업을 완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먼저 나토와 관계 설정이 관건이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기민당 대표와 폰데어라이엔 위원장도 유럽군 창설 필요성은 인정한다. 하지만 나토와 관계를 고려하면서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독립된 유럽군 창설을 주장해 온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는 차이가 있다. 결국 유럽의 방위력 증강 속도는 미국이 얼마나 오랫동안 유럽 안보에 관여할 것인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만약 미국이 나토에 대해 계속 의문을 제기한다면 유럽군 창설은 좀 더 앞당겨질 것이다.

자체 방위력 증강에는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 과연 유럽 국가들이 얼마나 많은 자금을 국방비에 쏟아부을 수 있을까. 지난 30년 동안 유럽 경제의 상대적 위상은 크게 쪼그라들었다. 1995년 미국을 100으로 볼 때 108.5에 달했던 EU 27개국의 경제 규모는 2013년 67.1로 줄었다. 소득 수준도 같은 기간 68.2에서 51.1로 낮아졌다. 유럽 국가들이 국방 분야 지출을 단기간에 크게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유럽 재무장이 가져올 영향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체 방위력을 강화하는 유럽의 움직임은 그 과정 자체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근대 유럽 국가가 탄생한 이래 영국은 유럽에서 균형추 역할을 해 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 안보를 위탁한 유럽에서 과거의 작동 원리는 힘을 잃었다. 

만약 유럽에서 미국이 스스로 발을 뺀다면 영국은 적어도 이 지역에서 다시 역동적인 외교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로 힘들어진 영국에는 기회가 된다. 한편, 러시아는 현재 맹위를 떨치고 있는 유럽 극우 정당에 선택의 딜레마를 안겨줄 것이다. 종래의 친러 또는 무관심 정책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유럽과 중국의 관계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다시 재편될 것이다. 유럽의 재무장이 가져올 나비효과는 한반도에 어떤 변수가 될까. 

김흥종 고려대 특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