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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짐바브웨에서 수영을 시작한 어린 소녀는 이 자리에 서는 순간을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최초의 여성이자 아프리카 출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라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다. 이 투표 결과가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기를 바란다. 유리 천장은 산산조각이 났고, 나는 ‘롤 모델’ 로서 충분히 책임감을 갖겠다.” 

‘짐바브웨 수영 영웅’ 커스티 코번트리(Kirsty Coventry)가 IOC 제10대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IOC 역사상 첫 여성이자 아프리카 출신이며, 올해 41세로 최연소인 위원장이 됐다. 임기는 6월 24일부터 8년간이다. 이후 한 차례 4년 더 연장할 수 있다.

3월 20일(이하 현지시각) 그리스 코스타 나바리노에서 열린 제144차 IOC 총회 투표에서 코번트리는 97표 중 49표를 얻어 과반수를 확보했다. 

사전 투표 때 가장 유력한 후보로 알려졌던 라이벌, 스페인 출신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주니어는 28표에 그쳤다. 사마란치는 IOC 부위원장이자, 전직 IOC 위원장의 아들이다. 이번 선거에서 코번트리와 접전을 벌일 것으로 예상됐었다. 또 다른 강력한 후보였던 영국 출신 서배스천 코 세계육상연맹 회장 역시 8표를 얻는 데 머물렀다.

이는 유럽 남성 중심인 IOC의 벽을 넘기 어려울 것이란 예상을 깬 결과다. IOC에는 1981년까지 여성 위원이 없었다. 게다가 IOC 위원장 선거에 출마한 여성은 코번트리가 두 번째다. 이날 BBC는 “지난해 프랑스 파리 올림픽이 ‘성평등을 달성한 최초의 올림픽’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지 1년 만에 코번트리가 IOC 위원장 투표에서 승리하며 강력한 메시지를 전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그의 배경과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는 올림픽에 대한 관심을 미래 세대에게도 지속하게 하려는 노력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짐바브웨의 올림픽 메달 8개 중 7개 따내

코번트리는 짐바브웨를 대표하는 수영 선수였다. 2000년 호주 시드니 올림픽에 처음 출전했다. 2004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에서 세 개의 메달을, 2008년 중국 베이징 올림픽에서 네 개의 메달을 따냈다. 이 중 2004년과 2008년 200m 배영에서 금메달을 땄다. 지금까지 짐바브웨가 올림픽에서 따낸 메달 여덟 개 중 일곱 개가 코번트리가 획득한 것이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은 올림픽 메달을 따낸 선수이기도 하다.

코번트리는 2012년부터 IOC 선수위원으로, 2023년부터는 IOC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여러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2018년 9월 에머슨 음낭가과 짐바브웨 대통령은 그를 체육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코번트리의 경력은 정치와 얽혔다. 그와 동맹 관계였던 음낭가과 대통령이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 전 대통령의 후임자로 자유를 무자비하게 탄압한다는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다. 2020년 아프리카축구연맹(CAF)은 짐바브웨의 경기장이 무척 열악하다는 이유로 모든 국제경기를금지했다. 2022년 국제축구연맹(FIFA)은 경기 운영에 대한 정부 간섭으로 짐바브웨의 국제경기 개최를 금지하기도 했다. 당시 임기 중이었던 코번트리 역시 장관으로서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이유로 코번트리가 IOC를 이끄는 데 적합한지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코번트리는 지난 2월 BBC와 인터뷰에서 “매우 민감한 문제를 헤쳐나와야 했기 때문에 IOC가 미래에 직면할 일에 대비해 확실한 갑옷(armour)을 얻었다”며 “의견이 다른, 어려운 지도자를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IOC 위원들 역시 그가 짐바브웨 정부와 긴밀한 관계인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우선 과제는 '여성 스포츠 강화'  '성별 적격성 문제 해결'

코번트리 차기 IOC 위원장이 임기 8년 동안 해결해야 할 과제는 여러 가지다. 

최우선 과제는 여성 스포츠 보호 문제다. 지난해 파리 올림픽 복싱 여자 경기에서 ‘성별 논란’을 일으킨 알제리의 이마네 칼리프와 대만의 린위팅이 금메달을 따면서 논란이 일었다. IOC는 이와 관련한 정책을 세워야 한다는 과제가 있다. 

코번트리는 선거 전 “트랜스젠더 여성이 올림픽 여성 경기에 참가하는 것을 전면 금지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여성 선수를 보호하고 공정성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겠다”고 주장했다. 이에 비판론자는 그가 IOC 집행위원회 위원이기도 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성별 적격성 검사에서 탈락한 복싱 선수를 파리 올림픽 여성 경기에 참가토록 허용한 것이 IOC이기 때문이다. 당시 IOC는 이들 선수가 여성이라고 주장하며 오히려 성별 적격성 검사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 논란으로 인해 조직의 규칙에 대한 엄격한 조사가 이뤄졌고, 올림픽이 큰 위기에 처할 뻔했다. 

코번트리는 IOC 위원장 선언문을 통해 “(스포츠를) 국가와 문화 간 다리, 희망의 원천, 선의의 힘으로 만들겠다”며 “(스포츠의 불평등 해소와 관련해) 여성 운동선수를 보호하고 여성에게 동등한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여성 스포츠를 강화하겠다”고 강조했다.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후 금지된 러시아 선수의 올림픽 출전 여부 가능성과 2028년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 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관계 구축 등도 큰 과제다. 이에 코번트리는 “20대부터 ‘까다로운 남성 권력자’와 일해왔다”며 “IOC의 핵심 가치인 연대와 보편성을 지켜내겠다”고 강조했다. 

이외에도 도핑 문제 해결, 급변하는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환경에서도 올림픽이 지속적으로 의미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아프리카인은 코번트리가 IOC 위원장으로 선출되며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올림픽을 개최할 가능성이 커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앞서 올림픽 개최 의지를 밝혔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2036년 대회를 위해 인도, 중동과 경쟁할 것으로 예상된다. 마이클 페인 IOC 마케팅 전임 이사 역시 3월 21일 BBC와 인터뷰를 통해 “코번트리가 차기 IOC 위원장이 됨으로써 세계 스포츠에서 아프리카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라고 밝혔다. 

코번트리는 “IOC와 올림픽 스포츠는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져 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을 하나로 모으고 다양성은 우리가 서로를 연결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라며 “오늘날 세계에서 이것은 인류의 선을 보여주고 우리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가장 큰 플랫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Plus Point

유리 천장 깬 국제기구 여성 수장들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WTO 사무총장(왼쪽)과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 / 연합뉴스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WTO 사무총장(왼쪽)과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 / 연합뉴스

남성 중심의 국제단체에서도 ‘유리 천장’을 깬 여성 리더가 줄을 잇고 있다. 

코번트리는 한 사례일 뿐이다. 나이지리아 출신인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Ngozi Okonjo-Iweala)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은 2021년 3월 여성이자 아프리카 출신 최초로 WTO 수장 자리에 올랐다. 그는 세계은행에서 25년 동안 일하면서 부총재까지 오른 경제학자다. 나이지리아 재무 장관을 두 차례나 역임했고 나이지리아 최초로 여성 외무 장관을 지냈다. 2014년에는 ‘타임’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오콘조이웨알라 사무총장은 보호무역을 주창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워 연임이 어려울 것이라 예상됐지만, 지난해 11월 WTO 사무총장으로 연임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도 불가리아 출신의 여성인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Kristalina Georgieva)다. 그는 EU 집행위원회 부위원장과 세계은행 최고경영자(CEO)를 거쳤다. 

2017년 11월부터 유네스코(UNESCO)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오드레 아줄레(Audrey Azoulay)는 프랑스 문화 장관을 거친 인물로 취임 당시 “아프리카와 여성 문제를 우선시하겠으며 정치적, 재정적 난관 속에 회원국 간 협력이 중요하므로 원활한 소통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잉거 안데르센(Inger Andersen) 유엔환경계획(UNEP) 사무총장, 캐서린 러셀(Catherine Rus-sell) 유엔아동기금(UNICEF‧유니세프) 총재, 신디 맥케인(Cindy McCain) 유엔 세계식량계획(WFP) 사무총장 등이 여성 리더로서 국제기구를 이끌고 있다.

이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