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중(對中) 투자를 확대해 중국의 고품질 발전을 지원하겠다.”
중국발전고위급포럼(이하 중국발전포럼) 참석차 중국 베이징을 찾은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가 3월 24일 왕원타오(王文濤) 중국 상무부 부장(장관)을 만나 이렇게 밝혔다. 전날 중국 경제 실세로 통하는 허리펑(何立峰) 국무원 부총리를 만난 지 하루 만에 중국과 협력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이날 쿡 CEO는 소셜미디어 웨이보(微博·중국판 엑스)에 7억2000만위안(약 1453억원) 규모의 청정에너지 펀드를 중국에 설립하겠다고도 밝혔다.
애플뿐만이 아니다. 영국 제약 업체 아스트라제네카는 3월 21일 중국 베이징에 25억달러(약 3조6578억원)를 투자해 글로벌 전략 연구개발(R&D)센터를 설립하겠다고 발표했다. 계획대로 문을 열 경우 상하이에 이어 중국 내 두 번째 R&D센터가 된다. 세계적으로는 여섯 번째다. 아스트라제네카는 중국 바이오 기업 세 곳과 협력해 중국 내 첫 백신 제조 시설을 건설하겠다는 구상도 밝혔다.
미·중 통상 전쟁이 격화하고 있지만, 중국을 향한 글로벌 기업의 투자와 러브콜은 되살아나는 모양새다. 이를 방증하듯 3월 23~24일 양일간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발전포럼엔 쿡 CEO를 비롯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 21개국에서 80여 명의 글로벌 기업 CEO가 대거 집결했다. 중국 관영 매체는 흥행에 성공했다며 자축하는 분위기다.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개막 연설에 나선 리창(李强) 중국 총리는 글로벌 기업 총수들을 향해 “외국 기업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겠다”며 중국에 대한 투자를 촉구했다.
중국, 외국인 투자 유치 총력
중국발전포럼은 중국의 중앙행정기관인 국무원이 투자 유치 목적으로 매년 개최하는 경제 행사다. 2000년부터 중국 최대 정치 행사인 양회(兩會·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끝난 뒤 진행해 왔다. 올해는 쿡 애플 CEO, 파스칼 소리오 아스트라제네카 CEO, 크리스티아누 아몬 퀄컴 CEO, 올리버 칩세 BMW 회장, 알베르트 부를라 화이자 CEO, 아민 나세르 아람코 CEO, 혹 탄 브로드컴 CEO 등이 참석했다. 한국에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 등이 함께했다.
이번 포럼 주제는 ‘전방위적 발전 모멘텀 촉발과 안정적인 세계경제성장 공동 촉진’이었다. 리 총리는 개막 연설에서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있다”며 “기업의 우려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 외국 자본 기업이 중국 시장에 깊이 융합할 수 있도록 도울 것” 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중국은 예상하지 못했던 외부 충격에도 대비돼 있고, 필요할 경우 새로운 경제 부양책을 시행할 것”이라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의 통상 압박에 만반의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가시적인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중국 관영 중국중앙TV(CCTV)가 인공지능(AI)을 통해 글로벌 기업 CEO들의 연설과 발언을 분석한 결과,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투자’였다. CCTV는 “(투자 발언과 관련해) 아직 계획 단계인 것도 있지만, 실질적인 행동으로 이어진 것도 있었다”며 아스트라제네카의 베이징 R&D센터 설립 계획 발표를 사례로 소개했다. 독일 자동차 부품 기업 ZF의 홀거 클라인 CEO는 이번 중국발전포럼에서 “중국에 지속적으로 투자를 확대하고 있으며 최근 우한에 공장 두 곳을 새로 설립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이 해외 기업 투자 유치에 열을 올리는 것은 대내외적 경제 여건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외국인직접투자(FDI) 감소가 두드러진다. 2024년 대(對)중국 FDI는 총 8262억5000만위안(약 167조원)으로 2023년 대비 27.1% 줄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트럼프 정부는 중국의 모든 수입품에 두 차례에 걸쳐 20% 추가 관세를 시행하고 있다. 2024년 중국 경제성장에서 수출이 차지한 비중이 약 3분의 1에 달했던 만큼, 성장 동력이 매우 약해진 것이다. 내수 부진과 소비 침체도 문제다. 중국은 올해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 목표치를 기존 ‘3% 안팎’ 에서 ‘2% 안팎’으로 낮췄다. 이는 2003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글로벌 기업, 中 내수 진작·기술 굴기 기대
글로벌 기업 CEO 입장에서는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을 쉽게 포기하기 어렵다. 2024년 기준 애플은 매출의 약 20%를 중국에서 올렸으며, 아이폰과 아이패드 등 대부분 기기를 중국에서 생산하고 있다. 같은 기간 아스트라제네카는 매출의 12% 이상이 중국에서 발생했으며, BMW가 판매한 자동차 3대 중 1대는 중국으로 갔다.
여기에 중국 정부가 경제성장률 목표를 지난해와 동일한 ‘5% 안팎’으로 내건 만큼, 적극적인 재정 정책과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실시할 것이란 기대도 크다. 더구나 중국은 올해 재정 적자율을 국내총생산(GDP)의 4% 수준으로 늘리기로 했다. 이는 역대 최고 수준이다. 중국 정부가 지난 수십 년간 공식 재정 적자율을 3% 이하로 유지하려고 노력해 온 점을 미뤄볼 때 이례적 결정이란 평가다.
올해 초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중국 스타트업 딥시크 사례에서 보듯 중국이 첨단산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도 글로벌 기업 CEO가 대거 중국을 찾은 중요한 배경이다. 딥시크가 내놓은 AI 모델은 미국 챗GPT의 AI 모델과 성능에서 큰 차이가 없었지만, 개발 비용은 획기적으로 낮춘 것으로 나타났다. 쿡 CEO는 이번 방중 일정 중 ‘딥시크를 사용해 봤냐’는 기자의 질문에 “물론이다. 훌륭했다(excellent)”고 답했다.
쿡 CEO는 3월 26일 중국 저장성 항저우에 있는 저장대를 깜짝 방문하기도 했다. 저장대는 량원펑(梁文锋) 딥시크 창업자의 모교로, 중국 첨단 기술 굴기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는 곳이다. 애플은 저장대에 ‘애플 모바일 앱 육성 펀드’를 공동 설립하고, 학교에3000만위안(약 61억원)을 기부하겠다는 사실도 발표했다. 팀 쿡은 “차세대 개발자들이 혁신적인 앱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도와 영광” 이라고 말했다.
중국 정부도 첨단 기술 기업에 대한 강력한 육성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2월 17일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주재한 민영기업 좌담회에 량원펑 딥시크 창업자가 참석했다. 그가 시 주석과 악수를 나누는 장면이 CCTV 메인 뉴스를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시 주석은 민간기업의 자금·비용 문제와 부당한 벌금·검사 등을 집중 정비해 합법적 권익을 보호하겠다고 밝혔다.
2년 만에 중국 찾은 이재용
샤오미 이어 BYD 회동

중국발전포럼 참석을 위해 중국을 방문 중인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중국 핵심 기업 경영진과 연쇄 회동을 하면서 사업 협력 기회를 모색했다. 국내 재계 관계자에 따르면, 이 회장은 중국 방문 첫날인 3월 22일 베이징 샤오미 자동차 공장에서 레이쥔(雷軍) 회장과 회동했다. 원래 가전과 스마트폰이 주력 사업인 샤오미는 지난해 전기차 사업에 처음으로 진출했지만, 13만 대가 넘는 차를 인도하면서 중국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 회장은 샤오미의 전기차 생산과정을 살펴본 뒤, 레이쥔 회장으로부터 직접 전기차 전략 등에 대해 설명을 듣고 협력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3월 24일 광둥성 선전에 있는 비야디(BYD) 본사도 방문했다. BYD는 세계 최대 전기차 기업으로, 지난해 매출과 판매량 모두 테슬라를 뛰어넘었다. 올해 1월부터는 한국 시장에도 진출했다. 이 회장이 선전을 찾은 것은 2018년 5월 이후 약 7년 만이다. 이 회장은 7년 전에도 BYD를 방문했다. 당시에는 왕촨푸(王傳福) BYD 회장이 직접 이 회장을 맞이했다.
이 회장이 샤오미와 BYD를 연달아 방문한 것을 두고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전장(車載·전자 장비) 사업에 힘을 실으려는 포석으로 풀이했다. 삼성전자는 2017년 ‘디지털 콕핏(디지털 계기판)’과 자동차 오디오 분야 세계 1위 기업 하만을 인수하면서 전장 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바 있다. 지난해 하만은 매출 14조3000억원, 영업이익 1조3000억원을 달성했다. 하만 외에도 반도체(삼성전자), 디스플레이(삼성디스플레이), 배터리(삼성SDI) 등 다른 분야에서도 중국 기업과 협력할 여지가 많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