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박 작가는 선수 이름에 프로를 꼭 붙여서 이야기했다. 여기서는 이름만 사용한다).

한국 여자 골프의 영광을 함께했던 순간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고 했다.
“2019년 미 LPGA 투어 메이저 대회 에비앙챔피언십에서 우승한 고진영은 긴장을 풀기 위해 껌까지 씹으며 경기했다. 하지만 우승을 확정 짓고 태극기를 들어 올릴 때 눈에 눈물이 맺히는 모습이 보였다. 해외에서 태극기를 보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을 실감했다. 가장 짜릿했던 순간은 2015년 미 LPGA 롯데챔피언십이었다. 당시엔 한국 선수끼리 연장전도 자주 볼 수 있었다. 박인비와 김세영의 연장 승부에서 ‘역전의 여왕’ 김세영이 1차 연장에서 150야드를 남겨 놓고 8번 아이언으로 친 두 번째 샷이 그대로 홀로 들어가면서 샷 이글이 됐다. 정말 마법을 걸었을까 할 정도로 소름 돋던 장면이다. 김세영은 정규 라운드 마지막 18번 홀에서도 티샷이 물에 빠졌고 1벌타를 받고 친 세 번째 샷도 그린 주변에 떨어졌다. 다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김세영이 칩샷을 집어넣으면서 파를 기록해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갔다. 김세영은 워낙 믿기 힘든 우승이 많아 국내외에서 ‘마법사(magician)’란 별명을 얻었다. 사진을 찍으면서 내 가슴도 같이 뛰는 느낌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는.
“장하나는 사진작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선수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퍼포먼스가 최고다. 필드에서 본인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기 때문에 가장 사진 찍기 좋았던 선수다. 골프 선수 사진이란 것이 스윙 모습 이상을 건져 내기 힘들다. 그런데 장하나는 퍼트가 들어갔을 때 퍼터를 던진다든가 퍼트가 마음에 안 들었을 때 아쉬워하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진솔한 장하나의 모습 덕분에 원하는 장면을 많이 잡아낼 수 있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진심을 다해 공을 치던 신지애 모습도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줬다. 신지애는 티샷할 때 엄지손가락으로 그립을 세 번 톡톡 치는 버릇이 있는데, 그 엄지손가락의 굳은살이 많은 걸 이야기해 준다. 신지애가 2015년 일본 JLPGA 투어 개막전인 다이킨 오키드 레이디스 토너먼트를 앞두고 시계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한국, 미국을 거쳐 일본에 간 신지애에게는 베테랑의 여유가 느껴졌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2025년 같은 대회에서 신지애가 JLPGA투어 통산 상금왕에 올랐다. 신지애의 시간은 거꾸로 가는 듯하다. 여전히 잘 친다.”
가슴 뭉클한 순간이 많았을 것 같다.
“김소희가 프로 데뷔 첫해인 2004년 레이크사이드 여자오픈에서 첫 승을 올렸다. 아버지는 당시 폐암 말기였다. 가누기도 힘든 몸을 이끌고 응원 나온 아버지와 포옹하며 눈물을 쏟는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2009년 두산매치플레이챔피언십에서 유소연이 동기이자 라이벌인 최혜용과 아홉 번의 연장전 끝에 승리했던 순간도 잊을 수 없다. 아침부터 시작한 경기가 일몰 시점까지 이어졌다. 선수도 대회 스태프도 모두 힘들었던 대회였다. 우승이 확정되자 유소연은 무릎을 꿇고 서럽게 울었다. 역사적인 명승부의 한 장면이었다. 찍으면서도 혼신을 다한 사진이다.”
선수들 매력을 포착한 사진도 보인다.
“박성현은 많은 팬이 열광하는 선수다. 2018년 에비앙챔피언십에서 티샷 순서를 기다리던 그의 우수에 찬 눈빛이 보였다. 무표정하지만 고심하는 모습이 읽혔다. 딱 어울리는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연속으로 셔터를 눌렀다. 박성현이 멀리 레만 호수를 향해 티샷하는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실루엣을 찍기 위해 세 개조 앞에서부터 자리 잡고 기다렸다. 박민지는 2018년 루키 시절 돌부처인 줄 알았다. 돌부처가 갑자기 카메라 앞에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삼복더위를 식혀 줄 환한 미소였다. 아끼는 사진이다. 2022년 루키인 윤이나는 맥콜모나파크오픈에서 시원한 장타로 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가 홀 아웃하며 새침한 표정을 짓는 모습은 지금도 미디어에서 많이 사용한다.”
잔잔한 감동을 주는 사진도 보인다.
“2014 에비앙챔피언십을 앞두고 연습 라운드하던 박인비가 언덕배기에 올라 5번 홀로 이동할 때 뒤에서 밀어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정말 든든해 보였다. 경기 중엔 돌부처처럼 표정이 없던 박인비도 아버지와 함께 미소 짓던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
골프 사진작가란 직업은 어떤가.
“골프의 골 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골프 전문지에 입사하며 시작됐다. KLPGA 투어가 열리는 4월부터 11월까지 거의 매주 4~5일간 전국을 출장 다닌다. 선수만큼 체력도 중요하다. 가정과 사회생활도 현명하게 해야 한다. 주말 경조사나 친구 모임 등은 포기한 지 오래다. 체력 관리를 잘하면 60세까지는 가능할 것 같다. KLPGA와 23년째 신뢰와 믿음을 쌓아온 덕분에 가능했다. KLPGA 역사를 힘닿을 때까지 기록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