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코 루비오(오른쪽) 미국 국무 장관이 3월 13일 주요 7개국(G7)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캐나다 퀘벡주의 국제공항에 도착하고 있다. / 로이터연합
마코 루비오(오른쪽) 미국 국무 장관이 3월 13일 주요 7개국(G7)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캐나다 퀘벡주의 국제공항에 도착하고 있다. / 로이터연합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캐나다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세 압박을 가하던 중, 급기야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하라’는 말까지 했다. 국제적으로도 크게 체면을 구긴 캐나다인이 느낀 굴욕감이 어느 정도일지는 짐작이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 마코 루비오 미국국무 장관이 주요 7개국(G7)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캐나다 국제공항에 내릴 때, 캐나다 측이 ‘초미니 레드카펫’을 깔아 화제가 됐다.

사진으로 얼핏 봐도 사람 키 정도밖에 안 되는 길이의 카펫은 바닥에 고인 물로 인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누가 봐도 캐나다가 미국에 대한 외교적인 불만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레드카펫 길이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법이라도 있는 것일까? 강제적인 법 규정은 없지만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관례는 있다. 통상 국가 행사나 정상급 의전인 경우 20~50m, 일반 시상식 등 공식 행사는 10~ 30m, 기업 행사나 결혼식에서는 5~15m가 기준이다. 

김진국 - 문화평론가, 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김진국 - 문화평론가, 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존중감에 비례하는 레드카펫 길이

레드카펫 길이는 카펫을 밟는 이에 대한 존중감에 비례한다. 200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레드카펫이 152m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고작 2m 정도의 짧은 레드카펫을 준비한 캐나다 당국의 의도는 명백하다. 레드카펫 길이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레드카펫 자체를 깔지 않아 문제가 된 경우도 있다. 2016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오바마 대통령 일행이 항저우 공항에 도착했을 때 이동식 계단과 레드카펫이 제공되지 않았다. 미국과 중국 양국 간 갈등과 긴장을 반영하는 민감한 사건이었다.

루비오 미 국무 장관에 대한 초미니 레드카펫 사건을 보면서 나는 우리나라 여배우 고(故) 강수연이 한 말이 문득 생각났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평소 강수연이 사석에서 자주 했던 말이다. 공식적으로대중에게까지 알려진 것은 그녀가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 공동 집행위원장을 맡았을 때의 일이다. 당시 집행위원장 자격으로 영화제를 준비하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에 봉착했던 그녀는 영화제가 비록 경제적인 어려움은 있지만, 영화인으로서 자존심은 지켜내겠다는 다짐으로 이 말을 한 것이다. 

‘가오(颜·かお)’는 원래 일본어로, 한국어로는 ‘얼굴’이란 뜻이다. 이것이 확대되면서 ‘체면’ ‘자존심’ 등 사회적 지위나 평판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한다. 한국에서도 이런 뜻으로 자주 쓰이는 외래어가 됐다. 어쨌든 강수연은 당시 부산국제영화제를 어려움 속에서도 나름대로 잘 치러내 기본적인 ‘가오’는 잡았다고 한다. 강수연은 평소 왜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말을 자주 했을까. 배우는 직업 특성상 이미지, 체면, 자존심에 훨씬 더 민감하다. 배우의 얼굴은 그 자체로 브랜드이자 상품 가치를 나타내는 핵심 요소다. 그들은 항상 대중의 주목을 받기 때문에 얼굴, 외모 등에 대한 압박감이 크다. 특히 강수연처럼 국제적인 영화제에서 여러 차례 상을 받으며 유명세를 얻게 되면, 그런 압박감은 더욱 커진다.

루비오 국무 장관의 레드카펫 이야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강수연 이야기를 하는 걸까. 강수연처럼 레드카펫을 많이 밟아본 스타 배우의 입장에서는 레드카펫 위를 걷는 것이 단순한 행사 참여가 아니라, 일종의 자존심과 품격을 드러내는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배우가 영화제나 시상식에서 레드카펫을 밟는 것은 대중과 미디어 앞에서 자기 이미지를 최대한 멋지게 보이고, 영화계에서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들에게 레드카펫을 걷는 행위는 ‘가오’를 잡을 수 있는 대표적인 의례(ritual)의 하나인 것이다.

심리학적으로도 사람은 많은 이 앞에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본능적인 성향이 있다. 레드카펫을 걷는 모습은 배우에게 자신감을 높여주고, 대중과 업계에 자기 위치와 존재감을 확고히 하려는 상징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레드카펫 위에서 배우가 고급스러운 의상과 당당한 태도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도 ‘가오’, 즉 자존심과 연관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여배우가 행사장에서 레드카펫을 통해 입장할 때 경쟁이 치열해진 나머지, 갈수록 과도하게 노출된 의상을 입는 마음도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들에게 레드카펫은 세상의 주목을 끌 수 있는 최상의 공간이다. 어떤 차별화된 전략을 구사해서라도 자기 개성을 표현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미디어와 대중이 원하는 성적인 매력과 이미지에 맞추기 위해서 받는 심리적인 압박도 큰 것이다. 

레드카펫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대 그리스 연극에 등장한다.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아가멤논’에는 클리템네스트라 여왕이 귀환하는 아가멤논에게 붉은 카펫을 깔아주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레드카펫은 신이나 왕 같은 특별한 인물에게만 사용됐다. 붉은색은 권력과 고귀함, 신성함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현대에 들어서 레드카펫이 깔린 것은 19세기 초의 일이다. 1821년 미국 제임스 먼로 대통령이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방문할 때 레드카펫이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이후 20세기 초에는 뉴욕 중앙역에서 유명인을 환영하기 위한 특별한 용도로 붉은 카펫이 깔리기 시작했다. 레드카펫이 영화계에서 스타를 위한 상징적인 관습이 된 것은 1922년 할리우드에 있는 그레먼스 차이니즈 극장 영화 상영회에 사용된 이후라고 한다. 

외교 의전상 '상호주의' 깬 행동 비판 받아 마땅

외교 의전에서 사용되는 레드카펫은 지위와 권위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강력한 도구다. 심리학적으로 사람은 ‘지위 상징물(sta-tus symbols)’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권위를 확립하려고 한다. 이런 지위 상징물은 상류층, 지도층에게만 허용되는 특권적인 요소다. 이들에게 특별히 존경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고급 자동차와 의상, 명품 시계, 호화 주택 등이 개인적인 지위 상징물이라면, 레드카펫은 공적인 지위 상징물이다. 개인적인 지위 상징물은 높은 가격과 희소성을 통해 소유자의 지속적인 지위를 표현한다. 반면 레드카펫 같은 공적인 지위 상징물은 특정한 행사나 의례적인 순간에 일시적으로 사용된다.

외교 의전에서 레드카펫은 상대국 인사에 대한 최고의 존중과 예우를 상징한다. 따라서 미디어와 다중, 특히 두 국가의 국민을 비롯한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길게 깔린 레드카펫을 걸어가는 행위는 양국의 사회적인 위계와 국제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중요한 의례적 행동(ritualistic behaviour)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레드카펫의 붉은색은 강렬함, 힘, 위험, 권력을 상징하는 색이다. 사람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고 주목을 끄는 역할을 한다. 뇌과학적으로도 주의를 집중시키는 색이다. 문제는 외교적으로 레드카펫을 까는 행위가 상호주의(reciprocity)의 심리적 기제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상호주의는 외교에서 중요한 원칙 중 하나다. 한쪽이 먼저 존중을 표현하면, 상대측도 동등한 수준의 존경을 표해야 한다. 이러한 상호주의는 국가 간 관계를 강화하거나 의전적인 예의에 민감한 상황에서 갈등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시 캐나다를 방문한 루비오 미 국무 장관에게 초미니 레드카펫을 깔아준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캐나다의 자존심을 뭉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이 아무리 굴욕적이었다고 해도, 외교 의전상 상호주의를 깬 캐나다 당국의 행동은 ‘소심한 복수’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자국 이익을 위해 불물 가리지 않는 엄혹한 국제 관계에서 눈에 드러나는 그런 표피적·감정적 대응보다는 실리를 챙기기 위한 전략을 짜는 것이 더 우선 아니었을까. 내 나라 ‘가오’ 좀 잡겠다고, 남의 나라에서 온 손님 체면 구기며 복수한 일은 캐나다 국민 정서를 위무하기 위한 대내용이었는지는 몰라도, 외교적으로는 하지하(下之下)의 책략이 아니었나 싶어서 하는 말이다. 

김진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