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옹’  스틸컷. /사진= 제인앤씨미디어그룹
‘레옹’ 스틸컷. /사진= 제인앤씨미디어그룹

‘암울해 보이지만 아무것도 잘못되는 건 없을 것 같아.’ 일이 없는 날이면 레옹은 극장에 간다. 천진한 눈빛으로 홀린 듯 바라보는 화면 속에서 배우는 즐겁게 노래한다. ‘오늘은 정말 색다른 날. 사랑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해.’ 그러나 레옹의 일상은 매일 똑같다. 사랑은 잊은 지 오래, 현실은 암울하고 모든 게 잘못되었다. 그는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킬러, 살인 청부업자다. 

레옹의 가족은 화분 하나. 그는 잠이 덜 깬 아이를 어르듯 아침이면 햇볕과 바람이 부드러운 창가에 화분을 내놓는다. 자신처럼 땅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사는 것이 안쓰러워 매일 물을 주고 정성껏 잎을 닦아준다. 덩치는 산만 한 남자가 엄마 젖을 떼지 못한 아기처럼 술 대신 우유를 마신다. 영화는 그가 비록 잔혹한 킬러지만 영혼만은 아이처럼 순수하다고 역설한다. 

‘레옹’ 스틸컷. /사진= 제인앤씨미디어그룹
‘레옹’ 스틸컷. /사진= 제인앤씨미디어그룹

레옹은 종종 아파트 복도에서 마틸다와 마주친다.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열두 살, 폭력적인 마약 하청업자 아버지와 무심한 새엄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마틸다는 미지의 세계를 동경한다. 검은 안경을 쓰고 커다란 가방을 들고 다니며 우수에 젖은 듯, 한여름에도 긴 코트를 입고 다니는 옆집 아저씨가 자신을 매력적인 아가씨로 봐주길 꿈꾼다. 

숨겨둔 마약을 찾으러 온 악당의 총구에 마틸다의 가족이 몰살당한다. 마침 밖에 나갔다 돌아오던 마틸다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악당과 피비린내 나는 집을 지나쳐 레옹의 현관 벨을 간절히 누른다. 아이를 들이면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것을 알고 레옹은 갈등한다. 

‘레옹’ 스틸컷. /사진= 제인앤씨미디어그룹
‘레옹’ 스틸컷. /사진= 제인앤씨미디어그룹

그는 생명의 무게를 안다. 누군가를 문턱 안으로 들인다는 것은 그의 인생을 떠안는다는 뜻이다. 의무가 생긴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해진다는 의미다. 무엇보다 자신은 한 생명을 책임지고 보호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자와 아이는 죽이지 않는다는 철칙을 가진 킬러는 운명의 문을 연다. 

소년같이 외로운 킬러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소녀가 만났다. 레옹이 살인 전문가라는 걸 알고도 마틸다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심부름도 하고 청소도 할 테니 가족을 해친 자들, 특히 네 살배기 동생의 생명까지 빼앗은 악당을 죽여달라 부탁한다. 아이의 청부는 받을 수 없다며 레옹이 거절하자 마틸다는 스스로 복수하겠다며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조른다. 

“날 구했으니 날 책임져요.” 마틸다가 당돌하게 요구한다. 레옹은 소녀를 거부할 논리를 찾지 못한다. 비록 남을 해치며 살아왔지만, 아름다운 것을 아끼는 마음, 약한 것을 보호할 줄 아는 선한 마음은 레옹의 가슴에서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그렇게 레옹은 또 하나의 화분처럼 돌봐주어야 할 소녀, 마틸다의 보호자가 된다. 레옹은 마틸다에게 총 쏘는 법을 가르친다. 킬러가 되는 법이지만, 거친 세상으로부터 마틸다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기도 했다. 아이는 이제 담배 피우는 시늉도 하지 않고 거친 욕설도 뱉지 않는다. 레옹은 그것이 프로 킬러가 되는 법이라고 가르쳤지만, 사실은 마틸다가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가정교육, 레옹이 생각하는 좋은 어른이 되는 길이기도 했다.

진정한 관계는 한쪽이 다른 쪽에게 의지하는 일방통행이 아니고, 건강한 사랑은 수평적인 관계에서 출발한다. 마틸다는 글을 모르는 레옹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준다. 영화 ‘보니와 클라이드’처럼 함께 일한다. “아저씨는 내 첫사랑이에요. 배로 느낄 수 있어요. 따뜻해요.” 마틸다가 고백한다. 당황한 레옹은 마시던 우유를 뿜는다. 

레옹과 마틸다의 관계를 ‘롤리타’의 험버트와 돌로레스로 해석하는 것은 때 묻은 어른의 음습한 욕망이다. 마틸다는 한 번도 소중하게 사랑받지 못한 아이였다. 마틸다가 레옹을 도발할 때도 있지만, 그것은 사춘기 소녀가 부모에게서 마땅히 받아야 했던 사랑에 대한 결핍의 반영이다. 

오래전 잃어버린 연인과의 관계 이후, 레옹도 마틸다를 통해 누군가를 책임지고 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에 안도한다. 마틸다를 바라보는 레옹의 시선이 아빠 본능이라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설사 마틸다가 오랜만에 찾아온 가슴 설레는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 해도, 레옹은 지켜야 할 것을 지킬 줄 아는 어른, 진짜 좋은 ‘아저씨’다. 

일만 할 줄 알았지, 목숨 내놓고 번 돈을 쓸 줄도 모르고 그 권리를 주장할 줄도 모르는 레옹이었다. 살아도 그만, 죽어도 그만인 삶은 얼마나 쓸쓸했을까. 그런데 마틸다를 만나고 나서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처음으로 레옹의 마음엔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하는 두려움이 자란다. 

레옹은 마틸다가 부평초 같은 인생, 하룻밤도 맘 편히 잠들 수 없는 킬러의 삶을 살아가길 바라지 않는다. 그는 복수란 허망한 거라고, 가장 멋진 복수는 잊어버리고 사는 거라고 말한다. 남의 목숨을 한 번 빼앗으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도 가르쳐준다. 하지만 마틸다는 듣지 않는다. 마틸다는 혼자 악당을 쫓는다. 아이답게 앞뒤 가리지 않고 본거지로 뛰어든다. 마틸다가 위험에 빠진 것을 안 레옹은 앞뒤 돌아보지 않고 달려간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구하고 싶은 아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위해. 

“네 덕에 삶이 뭔지 알게 됐어. 나도 행복해지고 싶어. 앞으론 뿌리를 내릴 거야.” 레옹은 말한다. 하지만 그는 너무 멀리 왔다. 너무 오랫동안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걸었다. 저 멀리 눈부시게 빛이 반짝인다는 건 지금, 깊은 어둠 속에 있다는 뜻이다.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마틸다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러나 레옹이 남겨준 선물이 있다. 그건 돈이나 복수의 완수가 아니다. 마틸다는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리라, 다짐한다. 땅에 뿌리 내린다는 건 어디로도 달아날 수 없다는 뜻이다. 꿋꿋이 비바람을 견뎌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으리라,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리라, 춥고 어두운 밤을 견디고 꽃 피우고 열매도 맺으리라, 마틸다는 작은 가슴에 뿌리내린 레옹과 약속한다. 사방이 어두워 보일지라도 아무것도 잘못되는 건 없다. 뿌리내린 삶은 흔들릴지언정 무너지지 않는다. 사랑이 있다면, 절대 도망치지 않을 용기만 있다면. 
김규나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