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가 최근 김상현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를 경제분석과장에 임용했다. 현직 대학교수가 과장급 직위에 직접 합류한 것은 공정위 역사상 처음이다.
경제분석과는 기업결합 심사, 담합, 시장 지배력 남용 등 공정위 사건에서 경제학적 판단을 담당하는 핵심 부서다.
과거에는 법률 해석과 문서 증거 중심으로 사건을 처리했지만, 최근에는 정량적 분석과 실증경제학이 주요 판단 기준으로 부상했다. 기업 측도 자체 경제모형을 앞세워 논리를 제시하고 있어, 공정위 역시 이에 대응할 분석 역량 확보가 필수적이다.

학계에서 실무로… ‘플랫폼 분석’ 특화 인재
김 과장은 테뉴어(tenure)를 획득한 직후 공정위에 들어왔다. 테뉴어는 대학에서 종신 재직권을 보장하는 제도로, 교수의 연구 독립성과 직업적 안정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제도다.
안정된 대학 연구 환경을 내려놓고 실무 공직에 뛰어든 김 과장 결정은 공정위의 경제 분석 기능 강화 흐름과 맞물린다.
김 과장은 2013년 미국 미시간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영국 이스트앵글리아대와 연세대에서 산업조직론과 행동경제학을 연구해 왔다.
산업조직론은 시장구조, 기업 간 경쟁 전략, 정책 효과 등을 실증적으로 분석하는 분야로, 공정위의 조사 영역과 가장 밀접하다.
김 과장은 공정거래 분야에서 꾸준한 연구와 자문을 수행해 왔다. ‘양면 시장(플랫폼)에서 광고 수익과 가격 책정 전략’ ‘기업 간 끼워 팔기 경쟁 효과 분석’ ‘중개 플랫폼의 광고 결합 판매가 시장 경쟁에 미치는 영향’ 등이 주요 연구 주제로 꼽힌다.
특히, 플랫폼 시장에서 기업의 가격 전략과 경쟁 구조를 분석한 연구는 최근 공정위가 다루는 사건과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이 같은 연구 성과는 공정위 실무에도 반영된 바 있다.
김 과장은 과거 공정위의 ‘클라우드 산업 시장조사’ ‘온라인 플랫폼의 광고 결합 판매 경제 효과 분석’ 등의 프로젝트에서 경제 분석 자문을 맡으며 실질적인 정책 수립 과정에도 참여했다.
김 과장은 “학교에만 있으면 현실 감각이 떨어질 수 있다고 느꼈다”며 “강의하고 연구하던 분야가 실제 정책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직접 경험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세종 근무라는 물리적 제약, 직급과 경력 간 괴리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선택한 이유다.
담합·M&A뿐만 아니라 시장 지배력 남용 사건에도 ‘경제 분석’ 필수
기업결합 사건에서는 두 기업이 합쳐질 경우 시장 내 경쟁이 얼마나 제한될지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경제모형과 계량 분석이 필수적이다.
시장 지배적 지위 남용 사건에서도 사업자가 경쟁을 제한하는 방식이 소비자 후생에미치는 영향을 입증하는 데 경제학적 접근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사건 당사자인 기업도 자체적으로 경제모형을 활용해 반박하는 사례가 늘면서, 공정위 역시 이에 대응할 분석 역량을 확보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최근 공정위가 다룬 사건 중에서도 경제 분석은 성패를 가르는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퀄컴의 특허권 남용에 1조원이 넘는 과징금을 부과한 사건은 7년간의 행정소송 끝에 공정위가 승소하며 의미 있는 전례를 남겼다. 검색 알고리즘을 조작해 자사 브랜드(PB) 상품에 유리한 노출을 한 쿠팡에 대해서도 국내 유통 업계 사상 최대 규모인 1600억원대 과징금이 부과됐다.
반면, 이동통신 3사의 판매 장려금 담합 사건은 초기 5조원대 추정 과징금에서 1100억원 수준으로 대폭 축소되며 기대에 못 미쳤다. 올리브영에 대해서도 시장 지배력 남용 판단이 유보되고, 과징금도 애초 검토됐던 5800억원에서 18억9600만원으로 대폭 낮아졌다.
공정위 내부에서는 정량적 분석의 설득력 차이가 제재 수위에 영향을 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공정위는 경쟁 제한성 평가와 경제적 입증 능력을 강화해 법원에서 패소를 줄이는 데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공정위 관계자는 “김 과장의 합류로 공정위의 경제 분석 기능이 한층 강화될 것”이라면서 “학계에서 쌓아온 연구 경험을 실무에서 어떻게 녹여낼지 그리고 공정위 경제 분석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을지 기대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계량 경제 분석력 강화하는 공정위, 박사급 전문 인력 채용 확대

공정위가 외부 전문가를 경제분석과장으로 임명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외부 전문가 출신 경제분석과장은 한국개발연구원(KDI) 출신 조성익, 이화령 박사다.
공정위는 2020년부터 경제분석과장을 개방형 직위로 전환해 외부 전문가 영입을 본격화하고 있다. 민간 출신 과장급 공무원을 공개적으로 채용한 것은 경쟁 제한성 판단의 정밀도를 높이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도입된 ‘정부 민간 인재 영입 제도(정부 헤드헌팅)’는 정책 전문가를 행정 실무에 배치하는 것이 목적이다.
과장 외에도 공정위는 경제학 박사급 사무관을 경력 채용으로 선발해 왔다. 현재까지 민간 경력 채용 방식으로 임용된 박사급 인력은 총 7명이며, 이 중 5명이 경제분석과에서 근무하고 있다.
경제학 박사 사무관 채용의 효시는 20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대 경제학 박사 출신인 최미강 사무관이 첫 채용자다. 그는 퀄컴을 상대로 한 1조원 규모의 과징금 소송에서 공정위 측 경제모형을 설계해 승소 판결을 이끌어냈다. 이 공로로 2019년 ‘올해의 공정인’에 선정됐으며, 이후 서기관으로 승진했다.
이후 공정위는 미국과 영국 등 주요국 박사 학위를 보유한 인재를 중심으로 경제 분석 라인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왔다. 정량 분석을 통한 경쟁 제한성 입증이 법적 분쟁에서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박사급 분석 인력의 수요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공정위 내부에서도 경제분석과에 대한 기대감은 크다. 단순한 자료 분석을 넘어, 계량 모형과 시뮬레이션을 통한 정책 기획, 사건 대응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정책+조사+분석’이 결합된 전략 부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정부에서 박사급 분석 인력을 사무관급에서부터 채용하고 과장급까지 외부에 개방한 사례는 흔치 않다. 이는 공정위가 구조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고도화된 사건이 늘어나는 가운데, 분석 중심의 실무 체계를 정립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