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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엘피스(Elpis)는 ‘희망의 여신’으로, 판도라의 설화에도 나온다. 판도라는 제우스가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에게 명해 창조된 ‘완벽한 여인’인데, 미모에다 모든 신이 전한 재능과 지식을 갖췄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이 여인을 배필로 보냈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한 상자를 선물하고는 절대 열지 말라는 당부를 덧붙였다. 호기심 강한 판도라는 참지 못하고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 있던 온갖 욕심과 질투, 시기, 각종 질병, 죽음 등이 튀어나와 세상으로 퍼졌다. 놀란 판도라가 뚜껑을 닫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엘피스, 즉 희망만은 빠져나가지 않았다. 이후 인간은 모든 악(惡)이 자신을 괴롭혀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판도라의 남편인 에피메테우스 이름의 뜻은 ‘나중에 아는 자’로, 이는 가장 마지막까지 상자에 남은 희망의 속성을 말한다. 인간이 모든 어려움을 견뎌야 희망이 찾아오고, 그 희망은 어려움을 이겨내는 가장 큰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 춘추시대 강국 제(齊)나라가 옆 나라 연(燕)나라를 침공해 차지하자, 다른 나라 왕들이 제 나라를 견제하려고 쳐들어오려 했다.이에 제나라 선왕(宣王)은 맹자에게 어찌해야 좋을지 물었다. 맹자는 어진 정치를 펼쳤던 상(商)나라 탕왕(湯王)의 고사를 들었다. 맹자는 “학정(虐政)에 시달리는 옆 나라 백성은 탕왕이 자기네 나라를 쳐들어와 선정을 베풀어주길 ‘큰 가뭄에 구름과 무지개를 희망하는 것처럼(若大旱之望雲霓也)’ 원했다” 며 “제나라 왕도 연나라에서 선정을 베풀어야지, 학정을 하면 치세는 오래가지 못할 것” 이라고 경고한다. 이 고사에서 ‘운예지망(雲霓之望)’이라는 사자성어가 나왔다고 한다. 큰 가뭄 속에서 비를 기원하는 것처럼 간절한 희망이라는 뜻이다. 

# 필자가 미국 유학 시절 이수했던 학위 과정은 중도 탈락 비율이 높았다. 얼마나 힘든지 학위 과정에 있던 학생의 연구 공간에는 좋은 경구나 한 장짜리 만화가 항상 붙어 있었다. ‘노력의 씨앗은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라는 문구로 힘든 상황을 이겨내겠다는 의지를 담거나, 자기 신세를 풍자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필자의뇌리에 깊게 남아 웃음 짓게 하는 만화 한 장면은 백로 같은 큰 새가 개구리의 머리까지 먹어 삼켰지만, 아직 삼키지 못한 개구리의 발이 새의 목을 꽉 잡고 죄는 모습이었다. 새가 개구리를 잡아먹지 못하고, 목 졸려 죽을지경을 묘사한 만화다. 이 만화는 1970년대부터 유행했다고 한다. 이런 만화의 어느 구석에는 항상 ‘Never Give Up(포기하지 마)’ 이라는 말이 쓰여 있다. 어떤 심리학자는 ‘희망’이 ‘희망 고문’으로 끝나지 않고 실현되려면 이런 자세가 꼭 필요하다고 했다. 

김경원 세종대 석좌교수- 전 삼성증권 리서치센터장,전 삼성경제연구소 전무, 전 CJ그룹 전략총괄기획 부사장, 전 대성합동지주 사장, 전 세종대 부총장 및 경영경제대 학장
김경원 세종대 석좌교수- 전 삼성증권 리서치센터장,전 삼성경제연구소 전무, 전 CJ그룹 전략총괄기획 부사장, 전 대성합동지주 사장, 전 세종대 부총장 및 경영경제대 학장

우리 사회를 짓눌렀던 탄핵 정국의 막이 내렸다. 대통령 탄핵에 대한 찬반 여론이 극심하게 갈리는 등 수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 때 양상과는 꽤 달랐다. 찬반양론은 갈렸지만, 일단 탄핵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해소됐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미 깊은 불황에 허덕이는 한국 경제를 둘러싼 먹구름은 오히려 짙어지고 있다. 

이제 막을 연 대선 정국은 또 다른 혼란과 불확실성을 낳을 개연성이 크다. 극심하게 대립하던 탄핵 찬반 여론이 선거전에서 다시 달아오르고, 새 대통령이 선출된 뒤에도 대립 양상이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 이 과정에서 주요 노조가 이전보다 더 정치화하고, 과격화해 기업을 옥죄면 소비 심리 회복은 계속해서 늦어질 것이다. 

우리 밖의 문제는 더 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직후 캐나다와 멕시코를 상대로 관세전쟁을 선포해 큰 반발을 초래하더니, 전 세계를 상대로 10%의 보편 관세와 나라마다 다른 추가 관세 부과를 발표했다. 한국은 일본보다 높은 25%의 관세를 얻어맞았다. 중국과 유럽연합(EU)이 즉각 맞불  관세를 예고하는 등, 관세 세계대전으로 번지는 조짐마저 든다. 

주요국은 미국 국채에 투자한 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독일은 뉴욕에 보관하고 있던 금 1200t의 인출을 검토한다고 밝혔다. 이는 마치 개구리가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큰 새의 목을 죄고 있는 형국이다. 

선제공격을 펼친 미국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주가는 대폭락하고, 소비 심리가 위축되고 있다. 도처에서 시위가 일어나는 등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는 크게 하락했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 조사에 따르면, 트럼프 관세정책을 미국 국민 54%가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 나아가 현재 상황이 관세 인상으로 촉발된 1930년대 대공황 전 상황과 비슷하다며 100년 만의 세계 대공황 재현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이런 미국 내 상황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행한 ‘관세 도박’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세계 각국과 양자 간 무역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에 오르려 관세를 선제공격 카드로 활용하는 그의 의도가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국가수반이 직접 전화를 걸어 백기 투항하는 모습을 그린 베트남이 대표적이다.

한국은 높은 달러 환율이 관세 인상분을 상당 부분 상쇄할 것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환율 역시 미국이 관세 카드를 통해 협상하려는 대상이며, 미국과 생산 비용의 차이가 불과 30%라는 분석도 있기에 결코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더구나 하필 한국은 탄핵과 대선 정국이 벌어지고 있으니,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고 있는 총리가 국가의 최고 리더십을 온전히 발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첩첩산중의 상황에서 지금 한국이 해야 할 일은 먼저 대선 전후로 국민 화합을 이루는 것이다.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든, 지금으로서는 불신과 불복이 이어져 경제를 압박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이번 계엄부터 탄핵에 이르는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여러 의혹은 완전히 없애야 한다. 그래야 불복과 국론 분열 가능성을 해소할 수 있다. 미국과 협상에 나설 통상, 경제팀에 힘을 실어주는 정치권의 결단도 요구된다. 예를 들어 미국에 양보할 리스트와 그 대가로 얻어낼 목표를 정하는 것에 대해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주요 대선 후보가 모두 동의해 힘을 실어줘야 한다. 이를 위해 현재 대행 체제인 행정부에서 민관 합동 긴급 태스크포스팀(TFT)을 만들고 이 안을 주요 대선 후보가 추인하는 형태가 바람직할 수 있다.

주요 노조도 자중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관세로 압박해 미국으로 공장 이전을 압박하는 지금의 상황을 노조가 자중하지 않는다면 기업 밀어내기는 가속 페달을 밟는 것과 같고, 결국 자신의 일자리를 자신이 차버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 모든 일에 선행돼야 할 것은 희망을 잃지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희망의 결과는 나중에야 알게 되겠지만, 난국을 헤쳐나가는 원동력이 될 것임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조선, 반도체, 중국 견제 등 미국이라는 큰 새의 목을 쥘 힘이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지혜로우며 능력 있는’ 국가 지도자를 염원하는 운예지망도 잊지 말아야 한다. 어쨌거나 Never Give Up이다. 

김경원 세종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