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설명│ 2025년 1월 10일(현지시각) 당시 미국의 조 바이든 정부는 인공지능(AI) 반도체 개발과 수출 등을 통제하는 ‘AI 확산 규범(Framework for AI Diffusion)’을 발표했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 출범 열흘 전에 나온 이 규제는 전 세계 국가를 우방국, 적대국, 기타 국가 등 3단계로 나눠 한국·일본·대만과 주요 서방국을 포함한 소수 우방국만 미국산 AI 반도체를 제한 없이 수입할 수 있게 하는 게 골자였다. 중국과 러시아 등 적대국 약 20개국은 미국산 AI 반도체 수입이 사실상 금지되고, 나머지 약 100개 국가는 국가별로 반도체 구매량 상한이 설정됐다. 이런 수출규제는 적대국 견제를 통해 미국 안보를 지키는 정책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기타 국가에 들어가는 오스트리아·체코·헝가리·그리스·폴란드 등 주요 유럽연합(EU) 회원국은 이 규제가 경제·기술적 경쟁력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고 있다. 필자 역시 미국의 첨단 AI 수출규제가 결과적으로 미국의 경쟁력을 잃게 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수출규제가 단기적으로 미국 안보에 부합할 순 있어도 장기적 관점에서는 동맹 협력 약화, 글로벌 기술 리더십 상실이라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미국이 AI 기술의 발전 방향을 제대로 설정하려면, 동맹국과 협력을 더 강화하고 더욱 균형 잡힌 접근 방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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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대 후반 들어 한 국가의 경제·군사적 지배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AI가 떠오르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중국에 대해 수년 동안 첨단 반도체 수출을 단계적으로 제한해 왔으며, 바이든 정부는 임기 말인 지난 1월 또 다른 주요 조치로  ① ‘AI 확산 규범’을 발표했다. 해당 규정이 도널드 트럼프 정부에서도 유지된다면, 선도적인 AI 모델 개발을 위한 미국의 핵심 기술과 부품은 극소수 동맹국에만 접근이 허용될 것이다. 

이 조치로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유럽연합(EU) 회원국 상당수는 미국 주도의 AI 개발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궁극적으로 미국의 전략적 목표를 훼손할 여지도 상당하다. 예컨대 유럽 산업의 중심지인 중부·동부 유럽은 향후 10년간 경제적 우위와 안보 유지를 위해 최첨단 AI 반도체에 대한 접근이 필요한데, 미국을 더 이상 신뢰할 파트너가 아니라고 여기게 되면, 이들의 경제는 중국으로 향할 수 있다. 

AI 확산 규범은 접근 권한에 따라 3단계로 이뤄진다. 가장 낮은 단계(3단계)에는 중국과 러시아, 일부 중동 국가 등 미국에 껄끄러운 기타 국가 등이 포함되며, 이들의 시장 접근은 사실상 차단된다. 

가장 높은 단계(1단계)에는 호주·캐나다· 뉴질랜드·영국 등 이른바 ‘파이브 아이즈(Five Eyes)’로 불리는 미국의 정보 공유 동맹과 함께 한국과 일본·대만 등 아시아 기술 강국 등 18개의 신뢰할 만한 동맹국과 무역 파트너가 포함된다. 

가운데 단계(2단계)에는 NATO와 EU 회원국이 들어간다. 이들 역시 미국의 중요 동맹국이지만, 고급 AI 반도체에 대한 수입 상한제(2027년까지 국가당 5만 개로 제한)를 적용받는다. 이 규제는 반도체 등 하드웨어를 넘어 AI 딥러닝(심층학습) 데이터와 같은 무형자산에도 적용된다. 이런 자산에 접근하려는 국가는 복잡하고 부담스러운 보안 심사 절차를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소냐 무지카로바 아틀랜틱카운슬 비상임 선임 연구원 - 현 하버드대 케네디 메이슨  펠로, 전 유럽중앙은행  이코노미스트,  전 슬로바키아 외무부 차관
소냐 무지카로바 아틀랜틱카운슬 비상임 선임 연구원 - 현 하버드대 케네디 메이슨 펠로, 전 유럽중앙은행 이코노미스트, 전 슬로바키아 외무부 차관

미국의 수출 장벽에 방해받지 않는다면, 중부 유럽은 강력한 산업 기반을 바탕으로 유럽 전체의 기술 발전을 이끄는 지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일례로 폴란드의 경우 자국산 첫 거대 언어 모델(LLM) 개발을 위한 2억4000만달러(약 3572억원) 규모의 프로젝트를 최근 시작했다. 미국이 AI 확산 규범을 발표하기 며칠 전 AI 기반 기술에 약 12억달러(약 1조7633억원)를 투자할 계획도 발표했다. 

또 지난 2월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와 순다르 피차이 알파벳(구글 모회사) 최고경영자(CEO)는 사이버 보안·건강·에너지 등 분야에 AI 도입을 가속화하기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하지만 미국이 중부·동부 유럽을 2단계 국가에 넣으면서, 이 지역의 경제적 미래는 세 가지 방향에서 위협받고 있다. 

첫째, 이번 제한 조치는 자율주행차, AI 기반 제조, 예측 가능한 유지·보수 기술 등이 필요한 자동차 제조 같은 전통 산업의 고도화를 힘들게 한다. 

둘째, 이 지역 AI 발전이 워싱턴(미국 정부) 정책 결정자의 변덕에 의존하게 되면서 장기 계획과 신규 투자가 지연되고 있다. 

셋째, 고성능 칩을 확보할 수 없다면 중부· 동부 유럽의 AI 생태계는 1단계 국가로 옮겨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중요한 전략적 산업이 성장할 기회를 얻기도 전에 쇠퇴하고, 지역 AI 생태계는 10년 정도 후퇴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한 불만이 브뤼셀(벨기에)·프라하(체코)·리가(라트비아)·바르샤바(폴란드) 등 유럽 중부 주요 도시에 퍼지고 있다. 

물론 미국의 정책 입안자는 이 상황이 국가 안보 이익을 위해 계산된 거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AI 칩 규제는 NATO의 결속을 약화하고, 군사 현대화를 지연할 위험이 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 알 수 있듯, 현대전은 사이버 방어에서 드론까지 AI 능력에 의존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가 NATO에 더 많은 역할을 요구하고 있는 국면에서 중부·동부 유럽이 첨단 AI 기술을 개발할 수 없도록 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이 지역 대부분 국가는 컴퓨팅 파워와 기타 요구 사항이 부족해 AI 확산 규범이 정한할당량을 지금 당장 달성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들 지역의 역량이 성장할수록 이들은 미국의 대안을 찾기 시작할 것이다. 

2023년 헝가리는 유럽에 투자한 중국 기업 직접투자의 44%를 흡수했다. 이는 프랑스·독일·영국에 대한 중국의 투자액을 합친 것보다 크다. 폴란드 역시 서방 지향 정치색을 띠지만, 중국은 이미 이 나라의 최대 교역국 중 하나다. 또 ② 중부·동부 유럽 자동차 클러스터는 중국과 간접적으로 강력한 공급망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관계가 더욱 광범위한 지정학적 재배치를 촉진할 수 있어 미국은 더 목표 지향적인 접근 방식을 채택할 필요가 있다. 

결국 AI 리더십은 단순히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통제뿐 아니라, 기술이 어떻게 개발되고 배포되며 관리되는지에 대한 글로벌 표준을 설정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동맹을 AI 최전선에서 배제하는 미국은 기술 발전 방향성에 대한 영향력을 잃을 위험이 있다. 이는 미국 또한 원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Tip|

AI 확산 규범은 미국 정부가 제시한 규제 체계로, 첨단 AI 모델과 이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핵심 기술·부품의 수출을 통제하는 규범이다. I가 경제·군사적 우위를 결정하는 중요 자원으로 떠오르면서 국가 간 기술 경쟁을 관리하고자 하는 의도로 도입됐다.

중부와 동부 유럽은 뛰어난 제조 기반과 경쟁력 높은 노동력을 바탕으로 유럽은 물론, 글로벌 자동차 산업의 핵심 생산 거점으로 여겨진다. 특히 폴란드·체코·헝가리·슬로바키아에는 여러 글로벌 자동차 브랜드의 생산 공장이 있다.

소냐 무지카로바 아틀랜틱카운슬 비상임 선임 연구원

정리=박진우 기자

정리=박서우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