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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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분기 삼성전자는 SK하이닉스에 D램(DRAM) 왕좌 자리를 빼앗겼다. 33년간 한 번도 전 세계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던 삼성전자는 인공지능(AI)과 고성능 컴퓨팅(HPC) 시장에서 밀리며 SK하이닉스에 역전당하고 말았다.

시장조사 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분기 D램 매출 기준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1위 SK하이닉스(36%), 2위 삼성전자(34%), 3위 미국 마이크론(25%)순이었다.

데이터를 저장하고 기억하는 역할의 반도체인 ‘메모리 반도체’ 중 D램은 반도체 기업의 캐시카우(현금 창출원) 역할을 해 중요한 품목 중 하나다. 주기억장치인 D램의 경우 컴퓨터, 스마트폰, 태블릿 PC 등 안 들어가는 곳이 없는 데다 최근에는 그래픽 카드, 게임 콘솔 등 고성능 메모리로도 활용된다. 

그간 삼성전자는 D램 생산에 있어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지만, 최근 고대역폭 메모리(HBM) 시장을 SK하이닉스가 선점하며 정세는 급격하게 변화했다.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쌓아 올려 데이터가 이동하는 통로를 넓히고 이동 속도를 극적으로 향상한 고성능 특수 D램이다. 일반적인 D램이 평면구조로 이뤄진 것과 달리 HBM은 3D(3차원) 적층 구조로 이뤄져 대역폭과 전력 효율이 높은 편이다. 따라서 HBM 생산량이 늘어날수록 더 많은 D램 칩이 필요하게 돼, HBM 수요 증가는 곧 D램 매출 증가로 이어진다.

HBM은 일반적인 범용 D램보다 가격이 비싸 고성능 컴퓨팅, AI, 최첨단 그래픽 카드에 주로 쓰이고 있다. 2022년 11월 오픈AI가 공개한 챗GPT로 생성 AI가 급속도로 인기를 얻은 뒤, AI 데이터센터 설립이 급증하면서 HBM 수요가 폭발했다. 

현재 AI 열풍을 주도한 엔비디아는 AI 연산에 최적화된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지속적으로 출시하고 있는데, 특히 여기에 HBM을 탑재한 H100 GPU 등이 AI 데이터센터 핵심 부품으로 작용해 SK하이닉스의 매출을 끌어올린 것이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 등에 HBM3E(5세대) 12단 제품을 대량 공급하고 있다. HBM3E 12단 제품은 말 그대로 12개의 D램 칩을 적층한 것이다.

SK하이닉스는 AI 가속기 시장을 선도하는 엔비디아에 HBM 제품을 사실상 독점적으로 공급하면서 HBM 시장점유율을 크게 확대했다. 반면,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선점했음에도 불구하고 HBM 양산 시점이나 수율(양품 비율) 확보 등에서 SK하이닉스에 비해 어려움을 겪으면서 시장 선점 효과를 누리지 못했다. 이와 관련, 과거 삼성전자가 주력했던 메모리 반도체에서 압도적인 성공 경험과 사법 리스크에 따른 ‘현상 유지’ 경영 탓에 HBM이라는 시장 변화에 대한 대응이 늦춰진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1990년대 반도체 시장에는 한국 기업으로 삼성전자, LG반도체, 현대전자(LG반도체와 현대전자가 합병한 현대반도체가 SK하이닉스의 전신) 등이 있었고, 해외기업으로는 미국 마이크론·모토롤라·IBM·TI가, 일본 도시바· 미쓰비시·후지쓰·히타치·NEC 등이 있었다. 

가장 먼저 승기를 잡은 것은 삼성전자였다. 삼성전자는 1992년 세계 최초 64㎆(메가바이트) D램을 개발했고, 그해 D램 세계 1위 업체가 됐다. 1993년에는 D램을 포함, 메모리 반도체 전체 시장에서 1위에 올랐다. 이후 세계 최초로 256㎆ D램 양산, 1㎇(기가바이트) D램 개발을 성공하는 기술 초격차로 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서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 또한, 스마트폰 시장의 성장과 함께 수요가 급증한 고용량 낸드 플래시 시장에서도글로벌 1위에 올랐다. 2002년 1㎇ 낸드 플래시를 세계 최초로 양산, 낸드 플래시 메모리 시장에서도 1위에 등극한 것이다. 

하지만 HBM 영역에서는 기술 초격차를 유지하지 못했다. SK하이닉스는 미래 성장 동력으로 HBM의 잠재력을 빠르게 포착하고 연구개발(R&D)에 매진했다. AMD에 HBM을 공급한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력을 축적했고, 세계 최대 AI 반도체 업체 엔비디아라는 핵심 고객을 확보하며 HBM 시장의 선두 주자로 빠르게 올라섰다.

사진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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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서는 삼성전자의 파운드리(반도체 수탁 생산) 사업 확장에 대한 집중이 HBM 투자를 우선순위에서 밀어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삼성전자는 TSMC를 추격하며 파운드리 시장점유율 확대를 위해 대규모 투자를 진행해 왔다. 이재용 회장은 2019년 시스템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하면서 파운드리를 포함한 시스템 반도체에서도 2030년까지 세계 1위를 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었다. 이 회장에 대한 사법 리스크는 현상 유지 경영으로 이어져 미래 반도체 시장을 겨냥한 선제 투자가 단행되지 못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결국, 과거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의 성공 경험과 범용 D램 확장에 대한 전략적 집중, 파운드리 확대 및 사법 리스크 등이 AI 시대 핵심 메모리인 HBM 시장에 대한 선제적인 대응을 놓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HBM 시장이 열리지 않은 상황에서 관련 R&D 투자 확대가 재무적으로 도움이 안 된다는 경영진의 판단에 HBM 개발이 사실상 물 건너가면서 관련 핵심 연구 인력이 SK하이닉스로 넘어간 것으로 알려진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부터 HBM 경쟁력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 반도체(DS) 부문 내 HBM 개발팀을 구축하는 등 6세대 HBM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파운드리 사업부 인력 일부를 메모리 사업부로 전환 배치하기도 했다. 하지만 발열 문제 등으로 아직 HBM을 엔비디아에 납품하지 못하고 있다. D램 시장 역전 주인공인 SK하이닉스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에 120조원을 투자하고, 이곳을 HBM 등 AI 산업에 필요한 차세대 D램 생산 거점으로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경희권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반도체 시장의 중심이 트래픽이 많은 데이터센터로 옮겨졌다.”라며 “SK하이닉스가 HBM 시장을 선점하고, 엔비디아가 AI 가속기 시장에서 독주한다는 가정하에 이러한 흐름이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삼성과 SK하이닉스가 모두 올 하반기 양산을 목표로 내건 HBM4에서 어떤 승부가 펼쳐질지 주목된다. 

이신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