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의 관세 위협에 맞서 단결해야 한다. 모든 캐나다인이 같은 정신으로 뭉쳐야만 한다.”
피에르 폴리에브 캐나다 보수당 대표가 4월 3일(이하 현지시각) 기자회견에서 전 국민 차원의 미국산 제품 불매운동을 독려하며 한 말이다.
중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뽑아 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하 트럼프)의 상호 관세 카드가 되레 미국을 국제사회의 ‘왕따’로 만들고 있다. 전 세계적인 미국산 불매운동 확산으로 미국 경제에 최대 900억달러(약 128조4030억원)의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145% 관세 폭탄을 맞은 중국에서 ‘반미(反美) 애국 소비’가 기업 차원으로 확산한 건 예상했던 수순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미국의 핵심 동맹이었던 서·북유럽과 캐나다가 등을 돌린 건 트럼프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 전개다. 오죽하면 “트럼프는 동맹을 중국 편으로 내몬 역사상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라는 비아냥마저 나오고 있다.
실제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최근 트럼프의 관세 폭탄 쇼크 속에서 리창 중국 총리와 통화하고 세계경제 문제를 논의한 바 있다.
유럽에선 ‘파시즘’을 연상케 하는 트럼프의 독주에 반대하며 미국 제품·여행 거부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 취임 전부터 ‘안티 트럼프’ 분위기가 확산해 있던 캐나다에선 ‘아무리 싸도 미국산은 안 산다’는 불매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졌다.
트럼프는 유럽에 관세를 부과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통한 군사 지원을 철회하겠다고 위협해 왔다. 여기에 유럽인이 민감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대한 일방적이고 오만한 트럼프의 접근 방식도 유럽인을 분노하게 했다.
영국 시장조사 기업 유고브가 3월 초에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 유럽 내에서 미국에 대한 긍정 여론이 50%를 넘는 곳이 단 한 국가도 없었다. 같은 달 독일 소비자 조사에선 53%가 ‘미국산 제품을 더 이상 사지 않겠다’ 고 답하기도 했다. 프랑스에선 맥도널드 대신 프랑스 브랜드인 퀵 버거를, 코카콜라 대신 브르타뉴산 브레즈(Breizh) 콜라를 마시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미국에 대한 감정이 가장 악화한 곳은 덴마크다. 자국령인 그린란드를 장악하려는 트럼프 계획에 지도자와 국민이 반발하면서 미국 상품 불매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덴마크는 물론 이웃 스웨덴과 노르웨이에서도 페이스북 기반으로 미국 상품·서비스 보이콧을 촉구하는 페이스북 그룹이 여럿 생겨났다(미국 상품·서비스 불매운동 그룹이 미국 소셜미디어를 기반으로 활동한다는 건 아이러니다). 그중 하나인 보이콧바러프라USA(미국제품불매)그룹에서는 9만 명이 넘는 회원이 활동 중이다(덴마크 인구는 약 600만 명이다). 회원은 넷플릭스, 디즈니+ 등 모든 미국 스트리밍 서비스 구독을 해지하고 유럽과 덴마크 스트리밍 서비스로 전환했으며, 맥도널드 등 미국 패스트푸드 체인점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세계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에는 두 달여 전 유럽 제품을 추천해 주는 ‘바이 프롬 EU(Buy from EU)’라는 페이지가 생겼다. 나이키 대신 독일 아디다스를 추천해 주는 방식으로 운영 중인데, 어느덧 가입자가 22만 명을 넘어섰다.

캐나다인 美 여행, 1년 새 32% 감소
‘미국의 51번째 주(州)가 되라’는 트럼프 발언에 캐나다 국민은 미국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눌 만큼 감정이 상했다. 무엇보다 여행지 목록에서 미국을 지운 이가 크게 늘었다. 캐나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3월 미국을 자동차로 여행한 캐나다인 수는 전년 동기 대비 32% 감소했다. 항공편 예약도 큰 폭으로 줄었다. 시장조사 업체 OAG 에이비에이션 월드와이드에 따르면, 오는 9월까지 캐나다발 미국행 항공권 예약 건수는 전년 동기 대비 70% 감소했다. 이에 미국 여행협회(USTA)는 캐나다발 관광객이 10%만 줄어도 21억달러(약 3조원)의 손실이 발생하고 호텔 및 관광 업계 일자리가 14만 개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 여행이 줄어든 건 유럽도 마찬가지다. 영국 관광청은 지난 3월 서유럽발 미국행 항공 수요가 17% 감소했다고 밝혔다. 프랑스 호텔 체인 아코르도 유럽 관광객의 올여름 미국 호텔 예약 건수가 25% 줄었다고 전했다. 골드만삭스는 여행 감소와 보이콧으로 인한 미국의 경제 손실은 최악의 경우 국내총생산(GDP)의 0.3%, 약 900억달러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반미 여론의 심상치 않은 확산은 일본에서도 감지된다. 일본 재팬뉴스네트워크(JNN)가 자국민 2600여 명을 대상으로 4월 5~6일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57%가 ‘일본 정부는 트럼프 관세에 맞서 대항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답했다. 대항 조치를 취하는 데 ‘반대한다’는 응답은 33%에 머물렀다.
미국의 실질적인 ‘주적(主敵)’인 중국이 물러설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트럼프를 초조하게 한다. 트럼프가 올해 중국에 부과한 누적 추가 관세율은 145%, 이에 맞서 중국이 미국에 부과한 보복관세율은 125%에 달한다. 린젠(林劍)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4월 15일 정례 브리핑에서 “관세전쟁과 무역 전쟁에는 승자가 없다”며 “중국은 싸우고 싶지 않지만,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4월 11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중국의 대형 항공사인 지샹(吉祥)항공은 미국 보잉에 주문했던 항공기 인수를 무기한 연기했다. 지샹항공은 1억2000만달러(약 1712억원)에 달하는 보잉 787-9 드림라이너 한 대를 3주 안에 인수할 계획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중의 관세 갈등이 극에 달하면서 높아진 관세 부담과 중국 내 반미 정서 등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 소셜미디어(SNS) 웨이보·더우인에선 ‘미국산 불매 리스트’가 빠르게 돌고 있다. 여기엔 코카콜라·아이폰·테슬라·피자헛·맥도널드·스타벅스·나이키 등 미국 브랜드와 이를 대체할 중국 제품이 적혀 있다. 팔로어 2만 명의 여성 인플루언서 후리파이는 “내 아이폰을 화웨이 것으로 교체하겠다”고 했고, 팔로어 7000명인 ‘링링보석1점’이란 계정은 “이제 나이키 대신 리닝(중국 스포츠 브랜드)을 입겠다”고 했다.
미국 기업 중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건 테슬라다. 극우 정당을 지지하며 유럽 정치에 개입해 온 일론 머스크 최고경영자(CEO)에 대한 반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테슬라의 2월 기준 전년 대비 신차 등록 수는 독일에서 76%, 덴마크 48%, 프랑스 26% 감소했다. 올해 첫 두 달간 유럽 누적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반 토막 났다. 유럽 전기차 시장이 약 30% 성장했지만, 테슬라만 역성장했다.
헤지 펀드 대부 달리오 "군사 충돌도 배제 못 한다"
2008년 금융 위기를 예견했던 세계 최대 헤지 펀드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 설립자이자 ‘헤지 펀드 대부’ 레이 달리오는 트럼프 관세정책과 미국 부채 증가 등의 여파로 “경기 침체보다 더 나쁜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달리오는 4월 13일 미 NBC방송의 시사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해 수입품 관세, 재정 적자 확대, ‘기존 권력에 도전하는 신흥 세력’ 결합을 “상당히, 매우 파괴적인 변화”라고 짚었다.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한 우려’와 관련해 그는 “통화 질서 붕괴, 우리가 알고 있는 정상적인 민주주의 방식이 아닌 내부 갈등, 세계경제에 매우 혼란을 주는 국제분쟁, 경우에 따라선 군사적 충돌”이라고 밝혔다.
주먹구구식으로 관세 폭격을 쏟아붓고 다시 거둬들이는 과정에서 트럼프조차 관세정책 방향을 잃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기에 인플레이션과 경기 둔화 우려로 미국 내 여론까지 점차 악화하면서 트럼프도 관세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기 어려운 상황이 돼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