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에서는 고령자가 사회 곳곳에서 왕성하게 일을 한다. 평생 근무하던 직장에서 65세 정도에 퇴직한 후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70세가 넘어서도 일하는 건 흔한 풍경이다. 일본 정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2023년 기준 70대 취업률은 50%를 웃돈다. 고령자 두 명 중 한 명이 일을 하며 노후를 보낸다는 의미다. 2024년 말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한국에서도 정년 후 노후를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일본에서 65세 이상 고령자의 노후 생활과 성공한 최고경영자(CEO)로 은퇴한 히라이 가즈오(平井一夫·사단법인 ‘프로젝트 희망’ 대표·이하 히라이) 전 소니그룹(이하 소니) 회장의 인생 2막 스토리를 소개한다.
70대 절반이 일하는 일본
한국보다 20년 일찍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일본에서는 퇴직 후에도 일하는 사람이 많다. 현역 시대에 성실히 업무에 몰두한 사람일수록 계속 일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강한 편이다. 건강 수명이 높아져 70대 중반까지 사회 활동을 할 만한 체력을 가진 시니어가 많아진 게 기본 배경이다. 게다가 장기 저성장이 이어지면서 노후에도 스스로 돈을 벌어야 중류 생활 유지가 가능한 고령자가 늘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자신의 커리어와 경력을 살려 일하고 싶지만, 화이트칼라 출신 고령자가 그런 일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임금을 낮추고, 현장 일을 맡을 경우 ‘업무 자존감’이 떨어지거나 심한 경우 스트레스로 우울증까지 겪는 사례가 적지 않다. 무더운 여름이나 겨울철에 고령자가 체력이 필요한 실외 업무에 나설 경우 병이나 부상을 당해 수명이 단축될 우려도 있다.
평균수명이 90세를 바라보는 초고령사회에서 퇴직 후 계속 일을 하는 게 좋을까. 기업이나 정부, 공공기관 등에서 근무한 경우 선택지가 더 좁아진다. 노후에 관리직이나 사무직으로 일할 기회가 많지 않아서다.
베스트셀러 ‘정년 후 진실(고단샤 현대신서)’ 저자인 사카모토 다카시 리쿠르트웍스연구소 연구원은 “60대에 접어들면 다수 사람이 체력과 기력은 물론, 사고력 및 과제 처리 능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라고 한다. 업무 강도가 높은 일, 스트레스가 심한 업무는 가능한 한 피하고, 무리하지 않는 업무 형태를 찾는 게 매우 중요하다는 조언이다.

히라이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빛이 나를 있게 했다”
히라이는 2021년 퇴임 후 사단법인 ‘프로젝트 희망’을 설립하고, 청소년 대상 문화·스포츠 체험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확대했다. 그는 “유년기에 해외 생활을 비롯한 다양한 경험이 현재 나를 만든 결정적 요인”이라며 체험 학습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히라이는 NHK와 인터뷰에서 ‘어린이를 위한 활동을 구상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게임 사업 총괄 시절, 게임쇼에서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빛을 본 것이 시작”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해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직접 비즈니스하며 체득한 경험의 가치를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고 싶었다”고 청소년 활동을 시작한 배경을 설명했다.
히라이는 최근 와세다대 강연에서 40년 사회생활 경험을 통해 체득한 ‘일의 본질’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근로자로서 회사에 기여하는 것은 기본이지만, 궁극적으로 ‘일’이란 회사와 ‘상호 거래’ 관계”라고 정의하면서 “직원이 서비스를 제공하고, 회사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급하는 공정한 교환”이라고 했다.
그는 “서비스와 보상의 선순환 구조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일의 본질’이기 때문에 일을 통해 가족을 부양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켜야 한다”라고 말했다. 일에 대한 히라이의 정의는 ‘회사 인간’으로 표현되는 전통적인 ‘일본식 경영’과 상당한 차이가 난다. 직원은 평생 회사에 충성하고, 회사 측은 ‘연공서열’과 ‘종신 고용’으로 보상하는 것이 일본 기업의 오랜 풍토였다.
실제 히라이는 일본 업계에서 ‘이단아’로 꼽힌 전문 경영인이었다. 히라이가 2012년 소니 사장으로 취임했을 때 회사 주력은 가전 부문이었으나 그는 음악과 게임 사업을 담당해온 이색적인 경력이 전부였다. 당시 소니는 TV 사업에서 큰 폭의 적자가 이어져 심각한 경영 위기에 빠져 있었다. 히라이는 취임 직후 회사 위기 극복을 위해 주력 사업을 하드웨어 중심에서 소프트웨어와 서비스로 전환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기존 핵심 사업 구조를 근본부터 탈바꿈시키는 과감하고 혁명적인 선택이었다.

소니를 완전히 바꾸는 그의 혁신 전략은 5년 만에 결실을 거뒀다. 2017회계연도 결산에서 소니는 역대 최대 이익을 기록하는 실적을 냈다. 이런 성공 뒤에는 ‘자기 인생은 스스로 생각하고 개척하는 것’이라는 히라이의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요즘 히라이가 가장 열정을 쏟는 일은 젊은이에게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를 조언하는 것이다. 전국 각지 학교와 사회단체 등에서 청소년을 위한 강연 요청이 오면 발 벗고 나선다. 그는 강연을 통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라” 고 항상 조언한다. “타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는 게 그가 전하는 핵심 메시지다.
“고민하는 과정, 행동하는 용기가 중요”
히라이는 청소년 리더십 함양 교육에 특히 힘을 쏟고 있다. 그는 “혁신을 창출하기 위해선 아이디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새로운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은 대부분 젊은 직원으로부터 나온다”라며 “스마트폰 카메라용 반도체의 대규모 투자와 가정용 애완 로봇(AIBO) 부활 등 소니의 주요 성공 사례도 젊은 직원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히라이는 “좋은 아이디어도 ‘해본 적이 없다’ ‘자금이 없다’ ‘실패할까 봐’ 등의 이유로 시도조차 못 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성공하지 못 하더라도 철저한 분석을 통해 교훈을 얻고 재도전을 할 기회를 주는 환경이 혁신을 이끈다”는 것이다.
그는 인공지능(AI) 혁신 등으로 급변하는 비즈니스 환경에 대해 “자기만의 기준을 세우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라”고 한다. “사회가 정해준 길을 무조건 따르기보다 한 발 뒤로 물러서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라”는 것이다. 또 “우선순위가 변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스스로 고민하는 과정 자체”라며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찾아 행동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일본 대표 기업인 소니 부활의 주역인 히라이는 국내외 기업의 거액 스카우트 제의를 물리치고 젊은이의 조언자 역할을 맡아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대기업 대표나 고위 관료 등을 지낸 뒤 새로운 ‘인생의 길’을 찾는 전문직 출신 시니어에게 좋은 모델 사례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