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오래전 유행했던 광고 문구지만, 지금도 종종 떠오를 만큼 인상 깊다. 열심히 살아온 누군가에게, 잠시라도 일상을 멈추고 여행을 떠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라고 말해주는 문장처럼 느껴진다.
여행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잠시 물러나, 내 삶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꼭 목적지를 정해 무언가를 이루지 않아도,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여행은 충분히 의미 있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며 잊고 있던 나 자신과 다시 마주할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이는 이런 여행을 ‘현실 도피’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도피라고 해서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삶의 어려움에서 잠시 물러나, 그것을 더 지혜롭고 단단한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기 위한 시간이라면 그것은 회피가 아니라 회복을 위한 용기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피는 꼭 물리적인 이동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때때로 ‘만약’이라는 상상의 문장을 통해서도 지금과는 다른 삶을 그려본다. ‘만약 내가 어디에 있다면….’ ‘만약 내가 무엇을 한다면….’ 이러한 가정 속에서 우리는 눈앞의 현실을 벗어나, 상상의 세계로 발을 들이게 된다. 신체라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 머릿속으로는 우주 저편까지도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다.
어릴 적부터 상상하기를 좋아했던 나 역시, 수업 시간에 종종 선생님으로부터 핀잔을 듣기도 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니?” “그 시간에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워라.” 물론 수업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 건 꾸중 들을 일이었지만, 책상 앞에 얌전히 앉아 있기가 답답했던 사춘기 시절, 내 머릿속에서 펼쳐졌던 상상의 장면은 그 시기를 조금 더 건강하게 버텨낼 수 있게 도와주었고, 훗날 음악을 연주할 때 영감의 실마리가 되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음악 자체가 상상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손으로 잡을 수 없고, 오로지 공기 속 진동을 통해 귀로만 느껴지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음악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현실의 순간을 채우기도 하지만, 수백 년 전 쓰인 바흐와 베토벤의 음표는 지금도 우리에게 무한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상상이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더 깊이 직시하고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다는 관점에서 오늘 나는 하나의 음악을 소개하고 싶다. 프랑스 작곡가 자크 오펜바흐가 남긴 오페라 ‘호프만의이야기’다.

이 작품은 독일 낭만주의 문학의 대표 작가인 에른스트 테오도어 빌헬름 호프만의 소설을 바탕으로, 그의 이름을 딴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상상을 통해 사랑과 자아 그리고 예술을 찾아가는 여정을 펼쳐 보인다. 오페라 속 호프만은 사랑의 열병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워하지만, 세 가지 상상 속 사랑 이야기를 통해 결국 자기 감정의 본질을 직면하고, 그 모든 열정을 내려놓는다.
오페라는 한 선술집에서 시작된다. 이곳에서 주인공 호프만은 자신이 사랑하는 오페라 가수 스텔라를 기다리다가 주변 친구들의 요청에 따라 과거의 연애담을 들려준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서 피어난 공상이 투영된 결과물이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기계인형 올랭피아를 사람이라 믿고 사랑에 빠진다. 두 번째는 노래를 부르면 생명을 잃는 병을 앓는 여인 앙토니아와 비극적인 사랑. 세 번째는 호프만의 그림자를 훔치려는 유혹적인 여인 쥘리에타와 치명적인 만남이다. 각 이야기의 시작은 사랑의 설렘으로 가득하지만, 끝으로 갈수록 음악은 요란해지고, 장면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 세 가지 이야기를 마친 후, 선술집의 현실로 돌아온 호프만은 깨닫는다. 그가 사랑했던 것은 ‘여인들’이 아니라, 그 여인들에게 투영된 자신의 이상과 욕망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이 깨달음을 상실로 끝내지 않고, 예술로 승화하는 선택을 한다. 상상을 통해 현실의 자신을 직시하고 반성하며, 그를 통해 다시 ‘예술가’로서 일어서는 극적인 순간이다. 오펜바흐에게 ‘호프만의 이야기’라는 오페라를 탄생시킨 영감을 준 인물, 호프만은 인간의 이성과 교양이 중시되던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 상상과 무의식, 예술가의 내면이 중요한 시대를 연 독일 낭만주의의 상징적인 작가다.
그는 ‘고양이 무르의 인생관’ ‘모래사나이’ ‘크라이슬레리아나’ 같은 소설 속에서 현실과 상상의 경계, 예술가의 고독과 광기, 분열된 자아의 심연을 예리하게 묘사했으며, 이러한 서사적 상상력은 단지 문학을 넘어 베토벤, 슈만, 오펜바흐를 비롯한 수많은 음악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결국 호프만의 상상은 동시대 예술가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모두의 현실을 직간접적으로 더 풍요롭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상상은 현실을 왜곡하는 허상이 아니라, 현실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해주는 하나의 도구일 수 있다. 칸트는 “상상력은 인식이 존재하기 위한 마음의 필수 능력”이라고 했고, 월터 벤야민은 “환상이란 오직 사유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 말했다. 호프만이 펼친 상상의 이야기는 이 말처럼, 도피가아닌 통찰과 창작으로 이어지는 여정이었다.
우리 모두에게도 그런 여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현실을 직시하라는 사회의 외침 속에서, 가끔은 잠시 이런 외침에 귀를 닫고 상상 속으로 한 걸음 내디뎌 보면 어떨까. 어쩌면 그 상상이야말로, 현실을 더 깊이 껴안을 수 있게 해주는 길이 돼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