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장한 삼년산성(왼), 법주사 금동미륵대불 /최갑수
웅장한 삼년산성(왼), 법주사 금동미륵대불 /최갑수

충북 보은 땅 속리산 자락, 법주사(法住寺) 가는 길은 이제야 비로소 봄이 깃들었다. 공기는 기분 좋게 말랑거리고, 참나무며 떡갈나무, 당단풍나무가 봄 공기 사이로 연둣빛 새싹을 힘껏 밀어 올리고 있다. 소나무도 어두운 초록을 몰아내고 봄 햇살에 밝게 빛난다.

구절양장 고개 넘어가는 길

법주사에 가려면 말티고개를 넘어야 한다. 말티고개의 해발은 300~400m. 높은 고개는 아니지만 뱀이 똬리를 틀 듯 휘어지는 구절양장이라 한층 더 험준하게만 느껴진다. 가파르게 올라가야 하는 험한 길이기에 세조가 연(임금이 타는 가마)에서 말로 갈아탔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말티고개는 ‘왕의 고개’라고 부를 만하다. 고려 태조를 비롯해 조선 태종, 세조가 이곳으로 행차했다. 형제까지 죽이고 옥좌에 오른 태종은 평생 그 죄의식에 시달렸는데, 그는 살해된 두 아우 왕자의 원혼을 달래는 천도불사를 속리산 법주사에서 거행했다. 원래 ‘보령(保齡)’이라 불리던 지명도 태종이 은혜를 갚는다고 ‘보은(報恩)’으로 바꾼 것이다.

말티고개를 넘으면 널따란 분지가 거짓말처럼 나타나고 법주사 가는 길이 평탄하게 이어진다. 법주사 닿기 전, 이방인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는 것이 ‘정이품송’이다. 어느 절집인들 주변에 소나무가 없으랴만, 법주사 소나무는 정이품송 때문에 각별하다. 우리는 정이품송을 아름다운 대칭을 이루며 당당하게 서 있는 소나무로 상상한다. 하지만 1990년대 초 태풍 때 서쪽 가지가 부러져서 우산을 편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이 사라졌다. 몇 군데 지지대를 이용해 고고하게 뻗어 내려가는 가지를 받치고 있는 모습이 이제는 약간 안쓰럽기까지 하다.

정이품송이라는 이름이 세조에게서 비롯됐다고 전해져 온다. 세조가 법주사를 방문하고자 법주사 들머리에 당도했을 때 소나무가 제 스스로 처진 가지를 들어 올려 임금의가마를 무사히 지나가도록 했고, 그것을 가상히 여긴 임금이 오늘날 장관급에 해당하는 정이품이라는 벼슬을 하사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러나 소나무와 관련된 내용이 700회 이상 수록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조가 소나무에 벼슬을 내렸다는 기록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정이품송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우리 모두 사실처럼 믿고 싶어 하는 나무(자연)와 인간의 돈독한 관계를 전하는 한 편의 설화인 셈이다.

소나무 떡갈나무 가득한 명품 길

법주사는 절도 절이지만 절 초입에 있는 숲이 더 좋다. 수령 100~200년 된 아름드리 소나무와 떡갈나무, 참나무가 넉넉하게 자란다. ‘오리(五里)숲’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오리숲은 숲 길이가 ‘5리’에 이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매표소에서 법주사까지 약 2㎞ 정도 이어진다. 예로부터 속리산은 속세와 단절이 가능한 명산으로 꼽혀왔는데, 출가자는 그 초입인 오리숲을 ‘속리(俗離)’, 즉 세상과 이별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삼았다.

숲을 지나 걸음은 자연스레 법주사에 닿는다. 신라 진흥왕 때 창건했다. 법주사엔 ‘부처님의 법이 머문다’는 뜻이 있다. 전란을 피해 피신하던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여기서 기도했고 야인(野人) 시절 태조 이성계도 여기서 구국 기도를 했다.

법주사 하면 금동미륵대불이 떠오른다. 여러 차례 몸을 바꾼 전력이 있는 기구한 미륵불이다. 신라 혜공왕 12년(776년), 진표율사가 처음 조성했는데, 40~50대는 법주사 대불을 1964년에 세워진 시멘트 대불로 기억한다. 1939년, 최초로 서양 조각을 한국 화단에 도입한 조각가 김복진(1901~40)이 100척의 시멘트 미륵불 조성 불사를 맡는다. 그러나 이 불사는 김복진의 갑작스러운 요절로 완성을 보지 못하게 된다. 이 시멘트 미륵불은 1964년에 이르러서야 박정희 대통령의 발원으로 완성된다. 30년을 지탱하던 이 미륵불은 1990년 붕괴 직전에 청동 대불로 다시 태어났다. 그때 들어간 청동이 약 160t가량이라고 한다. 2000년대 들어 다시 금동미륵대불 복원 공사를 시작했다. 원래 제 모습을 찾아준다는 의도였다. 개금불사는 2002년 6월에 끝났는데, 3㎜ 두께로 황금을 입혔고 금이 모두 80㎏ 들어갔다고 한다.

최갑수 - 시인, 여행작가,‘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밤의 공항에서’ 저자
최갑수 - 시인, 여행작가,‘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밤의 공항에서’ 저자

금동미륵대불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목조탑인 팔상전을 내려다보고 있다. 처음에는 웅장한 탑 크기 때문에 건축물로 오인되기도 했으나 1968년 해체하고 수리하면서 발견된 사리함을 통해 탑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전체 높이는 약 23m에 달한다.

신라 삼국 통일의 거점

보은읍 소재지를 빠져나와 속리산으로 가다 보면 멀지 않은 곳에서 산허리를 두르고있는 산성이 눈에 잡힌다. 수년 전 복원 작업까지 마친 삼년산성이다. 삼국시대 때만 해도 보은의 지명이 삼년군이었기에 이 이름이 붙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성을 쌓는 데 3년이 걸렸기에 이런 이름이 유래했다는 얘기도 있다. 신라는 이 지역을 확보함으로써 삼국 통일의 유리한 거점을 얻을 수 있었다.

성문 앞 주차장에 차를 두고 산책 삼아 성벽을 따라 걸어 보는 일이 썩 괜찮다. 산길이 완만하고 주위가 고즈넉해서 더욱 그렇다. 주차장에서 10여 분 발품을 팔면 거대한 성벽 앞에 닿는다. 구들장처럼 납작한 자연석을 가지런히 쌓아 올린 산성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한 칸은 가로, 한 칸은 세로로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쌓고 내부를 모두 돌로 채운 난공불락의 요새다. 나무를 다루듯 돌을 자르고 맞춘 옛 석공의 솜씨가 놀랍다. 일반인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하지만 전문가들은 걸작으로 꼽는 이유다. 조선까지 사용된 것도 그만큼 튼튼하단 뜻이다.

봄 내음 가득한 오리숲 길 /최갑수
봄 내음 가득한 오리숲 길 /최갑수

산성은 보은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백제 성왕을 공격한 신라 관산성 전투 부대가 이곳에 주둔해 있었다. 통일신라의 태종무열왕이 당나라 사신을 접견한 곳도, 고려 왕건이 패퇴해 물러간 곳도 바로 이곳이다.

성벽에 올라 주위를 둘러본다. 산바람이 상쾌하다. 성벽 끄트머리에 오르자, 발 아래가 까마득하다. 절로 오금이 저린다. 지상에서 불과 약 300m를 올라왔을 뿐인데 시야는 거침이 없다. 발 아래로 보은 평야가 드넓고, 지금까지 지나온 법주사며 오리숲을 품은 속리산 자락이 아련하게 다가온다. 

여행수첩

경희식당 산채정식 /최갑수
경희식당 산채정식 /최갑수

경희식당의 산채정식이 유명하다. 속리산에서 나는 버섯, 나물 위주로 만든 반찬 40여 가지가 나온다. 가짓수도 가짓수지만 하나하나 들인 정성과 맛이 대단하다. 북어 보푸라기, 잘게 다져 새콤하게 무친 더덕 등 손이 많이 가 보기 힘들어진 반찬도 나온다. 선병국 가옥에서는 보성선씨 영흥공파 21대 종부 김정옥씨가 된장과 간장 가르는 법을 가르쳐주고 장류를 판매한다.

최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