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철 동원그룹 명예회장이 4월 23일 경영 에세이 출간 기념 강연회에서 청중과 대화하고 있다. /사진 동원그룹
김재철 동원그룹 명예회장이 4월 23일 경영 에세이 출간 기념 강연회에서 청중과 대화하고 있다. /사진 동원그룹

“미국의 사업가이자 시인인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라는 시를 보면,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한다’ 는 구절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늘 엉뚱하지만 새로운 걸 생각하고 도전하는 게 청년이라고 본다.”

동원그룹·한국투자금융지주 창업주 김재철 명예회장(90)은 4월 23일 서울 강남구 교보타워에서 열린 경영 에세이 ‘인생의 파도를 넘는 법’ 출간 기념 강연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 명예회장은 “나는 여전히 물고기가 싫어하는 저주파를 발사해 물고기가 넘어가지 못하는 ‘벽’을 만들어 굳이 원양어선을 타고 먼바다까지 나가 조업하지 않아도 되는 ‘바다목장’ 같은 엉뚱한 꿈을 꾸고 있다”고 했다. 

1969년 동원산업을 창업한 김 명예회장은 대한민국 산업화 1세대 기업인이다. 가난한 소작농 집안의 11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농업고를 나와 서울대 농과대에 진학하는 꿈을 꿨지만, ‘바다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보겠다’고 결심한 뒤 1958년 우리나라 첫 원양어선의 무급 실습 항해사가 됐다. 이후에도 항해사에서 선장, 수산업체 부장, 임원까지 도전을 지향하는 삶의 자세를 유지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는 도전 영역을 식품, 포장재, 물류, 금융 등으로 확장했고 마침내 동원그룹·한국투자금융지주를 일궈냈다. 현재 김 명예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KAIST에 사재 544억원을 기부하는 등 인공지능(AI) 분야 연구개발(R&D)과 인재 육성에 집중하고 있다.

"경쟁력 앞에선 시대의 성장 속도 중요치 않아"

이날 경영 에세이 출간 기념 강연회는 오후 7시 30분부터 약 1시간 진행됐다. 강연회에는 동원그룹 임직원과 일반인 등 약 120명이 참석했다. 김 명예회장은 “영국 역사학자아놀드 토인비는 인류 역사를 가리켜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고 했다. 젊었을 때 도전해 보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어 농업고를 졸업하고 왜 바다로 나갔는지, 기업 경영 위기를 어떻게 돌파했는지, 현재를 살아가는 청년에게 왜 도전이 중요한지를 청중에 설명했다. 

강연 이후 독자와 대화 시간에서 김 명예 회장은 한 직원의 “본인이 지금 같은 저성장 시대 살고 있는 청년이라면 어떻게 살고 싶은지”라는 질문에 “고성장과 저성장을 보는 시각에 대해 견해를 달리하고 싶다”라며 “고성장 시대에는 기회가 많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확실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면 시대의 성장 속도나 환경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이어 “(주어진 환경에 대해) 세상 탓을 해선 안 된다”라고 했다. 

김 명예회장은 저서에서 ‘빠른 포기’를 언급했다. 이에 대해 한 청중이 “적절한 (포기) 시점은 언제인가”라고 묻자 “포기 시점을 일률적으로 따지기는 어렵지만, 실패했을 때 기업 전체 또는 본인 스스로가 흔들릴 정도의 도전이라면 빠를수록 좋다”라며 “매몰 비용을 과감하게 포기해야 한다. 새로운 걸 손에 쥐려면 기존 손에 쥐었던 것을 놓아야만 한다. 그래야 다른 것을 쥘 수 있다”라고 했다. 

미래 먹거리로 점찍은 '육상 연어 양식'

김 명예회장이 최근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는 동원그룹이 추진 중인 ‘육상 연어 양식 사업’이다. 해당 사업은 동해 밖 3.2㎞ 지점에서 퍼 올린 심해수를 파이프로 끌어와 한류성 어종인 연어를 육지에서 키우는 프로젝트다. 김 명예회장은 출간 기념 강연회 후 기자와 만나 “(육상 연어 양식 사업은) 양질의 단백질 섭취를 위한 인류의 미래 먹거리 사업” 이라고 했다. 그는 “연어 양식 전문 기업 노르웨이 새먼에볼루션과 협업해 사업을 추진하고자 했지만, 정부 환경영향평가가 3년을 넘기면서 흐지부지됐다”며 “새먼에볼루션 측은 전기료가 싸고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캐나다로 가자고 했지만, 다른 나라에서 사업을 시작하는 건 의미 없다는 생각에 거절했다. 이후 새먼에볼루션과 동·협업과는 별개로 라이선스 개념으로 사업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이 사업에는 3000억원 이상이 필요하다고한다. 김 명예회장은 이와 관련해 “거액의 재정이 투입되는 만큼 정부 지원이 필수다. 해양수산부가 이 사업을 강하게 추진하고 있다”라며 “이후 기획재정부의 예비 타당성 검토를 통해 예산 지원 검토도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사진 동원그룹
사진 동원그룹

동시 상장 非윤리적…글로벌 경기에 기민하게 대응해야

김 명예회장은 이날 강연회에서 최근 동원에프앤비(동원F&B) 상장폐지 등 그룹 현안에 대한 생각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모회사(동원산업)와 자회사(동원F&B)가 증시에 동시 상장한 것이 (주주를) 헷갈리게 할 수도 있고, 기업을 운영하는 데 장난치기 쉽다는 오해를 풀고자 지주회사인 동원산업으로 동원F&B 주식을 합병한 것”이라며 “모든 과정은 실무적으로 검토해서 나온 결과”라고 했다. 

김 명예회장은 한국 산업화 1세대 기업인으로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정책과 글로벌 경기 침체에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움직임은 럭비공처럼 예측이 어렵다”라며 “정책 변화에 맞춰 민첩하게 대응해야 한다.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대통령), 중국 시진핑(국가주석)을 포함해, 강대국 리더의 성향이 드러나는 세계정세에 적응하고, 기민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이런 경제 불확실성 시대에 국내 정치를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김 명예회장은 “우리나라 경제체제를 자유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로 삼겠다는 건 시류에 맞지 않는다”라며 “특정 정치인과 정당이 경제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유주의 경제에 시장을 맡겨야 인간의 무한한 창의력이 발휘되고 경쟁 원리가 작동해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고 했다. 

"리더는 솔선수범해야 존경받아"

김 명예회장은 이날 강연회 후 대화에서 리더십에 대한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리더는 권위와 명령이 아닌 솔선수범으로 존경받아야 하지, 권위만 부려서는 안 된다”라며 “(리더는) 동경을 불러일으킬 만큼 희생해야 한다. 그래야 존경받을 수 있다”고 했다. 

김 명예회장은 과거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회장이 동원산업 직원이던 시절에 김 회장이 본인의 장남이라는 것을 숨기고, 원양어선에 태워 혹독한 바다를 경험하도록 했다. 또 차남인 김남정 동원그룹 회장에게 창원 공장 생산직과 서울 청량리 지역 말단 영업직을 경험하게 했다. 

두 사례에 대해 김 명예회장은 “(두 아들이) 고생하더니 사람이 바뀌더라. 이렇게 밑바닥부터 배운 경험이 경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노동의 가치를 알고 말단에서 일하는 사람의 고충도 잘 알아야 (경영에서) 대화가 잘된다. (현장 경험은) 두 아들에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이라고 했다. 

창업을 준비하는 청년에게도 말을 전했다. 김 명예회장은 “과거 한국투자금융을 인수한 뒤 10년 동안 너무 고생했다. 증권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며 “사업을 시작할 땐 먼저 사회적으로 필요한 분야인지 그리고 자신이 잘 아는 분야인지부터 따져봐야 한다”고 했다. 

이어 김 명예회장은 “(본인이 잘 아는) 어업에선 ‘노 캐치 노 페이(No catch, no pay)’ 같은 인센티브 제도가 있는데, 이걸 금융 업계 최초로 도입해 효과를 봤다”라며 “당시 한국 (금융) 기업엔 이런 제도가 없어 초반에 노조와 갈등을 겪었지만, 이후 성과 보상을 확실히 하니 회사가 잘됐다. 결국 본인이 잘 아는 걸 (사업에) 접목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민영빈 조선비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