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년 전부터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지구 북반구를 덮고 있던 빙하가 사라졌다. 빙하가 녹으며 바닷물이 올라오자,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이 분리되고, 한국의 서해안도 육지에서 바다로 바뀐다. 강의 물줄기도 커져, 나일강과 갠지스강 그리고 황하처럼 거대한 강이 생긴다. 풍요로운 강은 문명을 낳았다. 문명 속에서 인류는 농작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길들이며 지구를 지배하게 된다. 인류 역사에서 아주 길었던 빙하기의 작은 변화가 누적돼, 결국 1만 년 전쯤 비가역적으로 변화하는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가 출현했다. 이처럼 오랜 기간 축적됐던 변화의 씨앗이 발화해, 큰 변화로 갑자기 뒤집히는 지점을 티핑 포인트라 한다.

韓 증시 저평가 진짜 원인은 '주주 가치 훼손'

한국 증시는 지나치게 할인되고 있다. 빙하기의 영구동토대처럼 얼어붙은 지표면은 녹을 줄을 모른다. 한국 증시의 현 좌표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그래프의 왼쪽 Y축은 12개월 선행 주가순자산비율(PBR) 수치를 나타내며, 이 Y축을 기준으로 최근 5년간 최댓값, 최솟값, 평균값, 현재값이 선과 점으로 표시돼 있다. 이 숫자만 봐도 한국 증시는 매우 싸다. 하지만 더 우울한 지표는 오른쪽 Y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른쪽 Y축은 최근 5년간 최대~최소 범위를 100으로 했을때 현재 PBR 수준의 상대적 위치(%)를 나타낸다. 현재 한국의 PBR은 이 범위 대비 10%에도 못 미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역설적으로 글로벌 증시 강세 구간에서 소외돼 있었기 때문에, 한국 증시는 미국의 관세전쟁에 따른 변동성 팽창 국면에서도 상대적으로 탄탄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지나친 할인으로 급락이 진정됐을 뿐, 강한 상승세로 진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상방을 열지 못하면 투자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투자자는 리스크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지, 싸다는 이유만으로 투자에 나서지는 않는다.

PBR이 낮음에도 투자자가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장기 저성장 우려와 관세전쟁 충격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결국 오너 가치가 주주 가치를 압도하는 전근대적 자본시장 구조가 한국 증시 저평가의 근본 원인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쉽게도 한국 증시에서는 오너의 한 주와 일반 주주의 한 주가 동일한 대우를 못 받고 있다. 이를 반영한 지표가 낮은 자기자본이익률(ROE)을 기반으로 한 할인된 PBR이다. ROE는 자본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하는지를 보여준다. 미국과 한국 증시의 차이는 이 ROE의 간극에 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한국 증시를 구성하는 자본은 영업이익으로 이자 비용도 감당하지 못하는 기업이 20%에 달한다. 이들이 퇴출당하지 않는 것은 시장 논리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영진이 주주보다 오너 이익에 충실해 시장 외적인 이유로 상장이 유지된다. 더 큰 문제는 기존 주주의 이익이 자주 훼손된다는 점이다. 물적 분할뿐 아니라, 지주회사의 더블 카운팅(중복 계산) 문제도 여전하다. 한국 자본시장은 기존 주주의 지분 가치를 희석하거나 가치를 빼앗는 일이 빈번하다. 주주 가치를 경시하는 이러한 한국 자본시장의 빙하기는 언제쯤 티핑 포인트를 맞아 해빙기로 들어설까.

윤지호 경제평론가 - 전 이베스트투자증권리서치센터장, 전 LS증권  리테일사업부 대표, ‘주식의 시대, 투자의 자세’ 저자
윤지호 경제평론가 - 전 이베스트투자증권리서치센터장, 전 LS증권 리테일사업부 대표, ‘주식의 시대, 투자의 자세’ 저자

일본은 어떻게 거버넌스(governance·지배구조)를 개혁했나

일본의 지난 10년을 배워야 한다. 1980년 일본은 세계경제의 중심이었다. 세계 시가총액 비중 상위 50개 기업 중 70%가 일본 기업이었다. 당시 일본식 기업 모델을 배우는 분위기에 힘입어 일본의 고용제도, 또 기업 문화를 소개한 책이 유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이 1985년 주도한 ‘플라자 합의’ 후 일본은 경쟁력을 상실하고, 1990년대 초반 거품경제의 붕괴와 함께 증시도 장기 침체에 빠지게 된다. 

무엇으로도 해빙되지 않았던, 일본 증시는 2012년부터 주주 가치를 중시하는 중장기 개혁을 통해 질적 도약에 성공한다. 아무리 돈을 풀어도 움직이지 않던, 일본 증시는 주주 행동주의가 자리 잡고, 기업의 주주 환원이 강화되면서 주가 상승으로 연결됐다. 글로벌 증시 상승에서 매번 소외됐던 일본 증시는 기업 거버넌스 개선에 힘입어 재평가 국면에 들어선다. 2019년 워런 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는 미쓰비시상사, 미쓰이물산 등 일본의 주요 5개 종합상사에 대한 장기 투자에 나섰고 이후 포지션을 늘려가면서 여전히 대규모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일본 증시의 질적 변화를 상징하는 투자다.

숫자로 보면, 더 선명하게 보인다. 일본의 기업 하나하나만 보면, ROE 수준이 한국에 비해 상당히 높지만, 시장 전체로 보면 한국과 일본의 12개월 선행 ROE 수준은 큰 차이가 없다. 반면 PBR 수준은 다르다. 투자자는일본의 변화 방향을 주시해 온 것이다. 

일본의 주주 중시 정책은 2014년 일본 히토쓰바시 경영대학 이토 쿠니오 교수가 작성한 ‘이토 리포트’에서 출발한다. 아베 신조 정부는 이토 리포트를 반영해 기업 스스로 ROE를 늘리기 위한 정책 유인에 나섰다. 먼저 ‘스튜어드십(수탁자 책임)’을 강화했다. 기관 투자자에 강제성은 부여하지 않았으나, 따르지 않을 시 이유를 설명하도록 권고했다. 

이후 일본은 기업의 변화를 이끌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기업 거버넌스의 개혁이다. 거버넌스는 지배구조로 번역되지만, 정확한 의미는 기업 의사 결정 구조의 개혁을 의미한다. 일본은 기업 스스로 이사회의 주주 책임 강화로 나아가게 채찍과 당근을 이어간 것이다. 특히 2023년 3월에는 PBR 1배 미만의 상장 기업에 대해 구체적인 주가 상승 방안을 공개 및 시행할 것을 촉구했다. 당시 일본 토픽스(TOPIX) 지수 내 기업의 절반 이상이 PBR 1배 미만이었다. 하지만 이후 일본의거버넌스 개혁은 속도를 내며 성과를 낸다. 예를 들어, 2015년 말 독립 사외이사를 3분의 1 이상 유지한 기업 비중은 12%대에 불과했으나, 2023년 말에는 95%로 늘어났다. 

장기간 버블 붕괴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일본 증시는 주주 가치를 중시하는 기업 변화가 자리 잡힌 후, 장기 상승 추세에 진입했다. 일본 니케이225 증시는 2012년 8240에 불과했지만, 2014년 1만8000대로 올라섰고, 2024년 7월 4만2400까지 추세적 상승을 이어갔다. 한국 코스피(KOSPI)가 2012년 1800에서, 2024년 7월 2896까지 움직인 것과는 차별화된 행보였다. 일본의 주주 가치를 향한 작은 움직임이 쌓여 결국 티핑 포인트를 만들어 냈다. 

거버넌스 개혁으로 한국 증시 빙하기 끝내야

이제라도 일본을 배워야 한다. 한국은 아직 상법 개정이라는 작은 한 걸음조차 나아가지 못했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다. 대통령 선거의 주요 쟁점으로 기업 거버넌스 개혁이 부상했기 때문이다. 4월 21일 야당 대통령 후보는 리서치 센터장과 간담회를 갖고, 한국 증시의 저(低)PBR 상황을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물론, 이로 인한 기업의 반발도 이해는 된다. 이사에 대한 배임죄 소송 증가, 경영권 방어 비용 부담, 투자 여력 감소 등 부작용이 예상된다. 더욱이 지배주주 입장에서는 상속세 및 증여세를 시가 기준으로 부과하다 보니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다. 역설적으로 상속을 위해서는 주가가 낮게 유지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거버넌스 개혁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일반 주주를 경시하는 한국 증시의 퇴행이 이제 묵과하기 힘든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아직 한국 증시의 빙하기는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본시장 개혁이 시작됐고 주주 행동주의는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상법 개정 등을 통해 주주 자본주의가 뿌리내린다면, 한국 증시도 PBR 저평가 국면에서 벗어나 도약할 수 있다. 기업은 벌어들인 돈을 주주에게 돌려주거나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하며, 투자자는 전근대적 거버넌스를 재편해야 한다. 소수의 지배주주가 다수 일반 주주의 권리를 훼손하는 걸 막아야 한다. 2025년 한국 증시의 거버넌스 재편은 되돌리기 힘든 티핑 포인트에 들어섰다. 

윤지호 경제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