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서 약자를 위해 헌신했던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 두봉 레나도(René Marie Al-bert Dupont) 주교와 인터뷰는 2월 17일에 이뤄졌다. 두 달이 채 못 되는 4월 10일, 두봉 주교는 뇌경색으로 선종(善終)했다.
두봉 주교와 마지막 인터뷰는 언제나 그렇듯 웃음과 사랑이 흘러넘쳤다. 붉은 벽돌 사제관 앞에 도착하니, 97세의 노인이 직접 마중을 나와 있었다.
두봉 주교는 TV 프로그램에 출연(2022년 1월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한 뒤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고 했다. 방문객은 주로 자기의 고달픔을 토로하고, 먹고사는 일의 어려움을 얘기하는데, 말하다 울다 웃다가 돌아가는 것만으로 크게 위로받는다고 했다.
‘클클클, 푸푸푸, 하하하.’
두봉 주교의 웃음소리는 공기의 틈새를 시원하게 벌리고, 투명한 햇빛 방울을 불어넣는다. 수시로 터지는 파안대소는 전염성이 강해, 심각한 표정으로 고달픈 이야기를 하다가도 구겨진 얼굴을 펴 다들 활짝 함께 웃게 된다.
주교님은 항상 기쁨이 차오르시는 것 같습니다.
“기쁘죠. 저는 기쁘게 살고 있어요.”
가톨릭 신자가 아닌 데도 왜 많은 분이 주교님을 찾아오는 걸까요.
“저는 성당 다니라고 안 해요. 충고 같은 거 안 합니다. 그냥 사정을 이야기하면 들어줘요. 들어주고 기도해 달라고 하면 기도해 주고, 좋은 일 얘기하면 힘껏 손뼉 쳐줍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자꾸 돈을 두고 갑니다. 안 받는다고 하면, 저한테 주는 게 아니래요. 필요한 사람한테 나눠주라고 합니다. 저는 돈 준 사람 이름도 몰라요. 몇백만원씩 쌓이면, 몇천만원도 돼요.”
그 돈은 어디로 가나요.
“다 제 길을 딱 맞게 찾아갑니다. 겉으로 괜찮아 보여도 어려운 사람이 있어요. 누가 줬는지 저도 모르니, 받는 사람한테도 제 얘기하지 말라고 해요. 돈이 아무도 모르게 묘하게 흘러가요. 계획도 없이.”
계획도 없습니까.
“네. 묘하게 맞아들어가요. 세상에 선한 사람이 참 많아요.”
아담한 거실과 몇 개의 작은 방으로 구성된 소박한 사제관은 영적인 온기가 가득했다. 쏟아지는 햇빛이 공기의 실핏줄을 타고 사이사이 퍼져갔다. 통유리 창밖으로 펼쳐진 마당은 작물을 심기 전이라 한가로웠고, 와인을 대신해 노(老) 주교가 직접 내려준 커피 향이 코끝에 닿아 향긋했다. 그가 긴 팔을 허공에 뻗을 때마다 모든 동작이 그리는 포물선이 크고 넓었다.
“과자도 먹고 커피도 드세요.”
천국이 따로 없었다.
두봉 주교는 그의 몸이 뿌리내린 농촌 마을을, 그 땅의 이웃을 차별 없이 사랑했다. 20년 전에 이곳에 왔을 때 살던 건넛집 할머니도 10년 전 세상을 뜨고, 지금은 그곳에 중국과 베트남 출신 부부가 네 살 된 딸과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조금 있으면 또 하나 아이가 나올 것도 같은데, 모르겠어요. 아하하.”
부부 모두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두봉 주교의 주례로 식을 올렸다. 한국말을 모르는 베트남 하객을 위해 그는 커다란 종이에 베트남말로 ‘사랑·인내·친절’이라고 쓴 뒤 보여줬다.
“이건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은 너를 위해 내가 죽는다는 말입니다. 이건 인내라는 말입니다, 이것도 내가 죽는다는 말입니다. 이걸 크게 읽었더니 다들 까르르 까르르 웃었어요. 식장이 웃음바다가 됐어요.”
두봉 주교가 또 함박웃음을 지었다.
“저는 프랑스에서 아빠·엄마, 삼촌, 다섯 남매와 다섯 살, 일곱 살 된 사촌과 살았어요. 일곱 아이와 부대끼는 한가운데서 남의 입장을 잘 이해하게 됐어요. 아버지가 제1차 세계대전 때 말라리아에 걸려 저희 집은 살기가 아주 어려웠어요. 대부분 초등학교까지만 다녔고, 저만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고3 철학 시간에 유교, 불교, 도교 등, 세상의 모든 종교를 배웠어요. 그때 예수님의 말씀과 인격에 반해서 두 손을 번쩍 들었죠. 하하. 그 시절에 배운 사랑과 행복의 기둥이 제 인생의 나침반이 됐어요. 사랑이 얕으면 행복도 얕아요. 이웃을 위해 제 목숨을 내어주는 최고의 사랑이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주지요. 행복은 사랑에 달려있어요. 최고로 사랑해야 최고로 행복합니다.”

그는 최고 사랑이 최고 행복이라고 했다. “저는 천막 만드는 기술로 살았던 바오로 사도처럼 노동 사제가 되고 싶었어요. 가족이 다 농사를 지었으니, 노동 사제에 나만큼딱 맞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신학교 학장 신부님은 교황청이 노동 사제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반대하셨습니다. 그러다 파리외방전교회(Les Missions Etrangères de Paris)를 알게 됐어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유엔(UN)군으로 독일에 머물 때였는데, 부대원 중 한 명이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학생이었어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제대 후 파리외방전교회를 찾아갔고, 한국으로 오게 됐어요.”
두봉 주교는 1953년 프랑스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로 한국에 파견됐다. 그는 배를 타고 왔는데, 이집트·스리랑카·홍콩·일본을 거쳐 두 달 만에 인천에 닿았다. 1954년 12월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폐허가 된 거리에서 사람들이 떨면서 배회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을 보고 “한국인의 따뜻한 마음이 보였다”고 했다. 대전에서 사목하며 전쟁고아를 돌봤다.
요즘도 매일매일 행복하게 보내십니까.
“저는 아침 5시면 일어나요. 추워도 그냥 벌떡 일어나서 움직여요. 5분도 안 걸립니다. 1시간 반 정도 여기서 미사드리고, 아침으로 커피하고 빵 먹어요. 행복하지요. 그리고 2시간 기도합니다.”
무슨 기도를 하시나요.
“뭐가 필요한지 (하느님이) 제 마음을 다 아시기에, 가만히 침묵을 지킵니다. 전 평생을 성직자로 살았어요. 저를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하느님 앞에 가만히 있어요. 입을 벌려 ‘하’ 소리를 내고 두 팔을 벌려 엎드립니다.”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으시네요.
“없어요. 낮에는 찾아오는 사람들 만나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누구든지 다 받아줘요. 여름엔 풀 뽑고 물 주고 농사지어요. 기쁘고 떳떳해요.”

그 말이 참 좋습니다. 기쁘고 떳떳하다.
“그 말은 제가 안동교구장으로 있을 때 만들었어요. 60년 전 교구가 생길 당시엔 인구가 170만 명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농촌 인구가 확 줄었어요. 젊은 사람도 없고 앞날이 캄캄했어요. 그런데 그것을 비관적으로 보기보다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도시 사람처럼 노는 거, 먹는 거, 돈 쓰는 거 마음껏 못 해도 괜찮다. 꼭 필요한 건 아니니까. 그래서 열린 마음으로 소박하게 살아보자. 농촌은 생명을 만드는 곳이니까,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서로 나누면서. 그러다 보면 기쁨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가 만들어집니다.”
단순한 말에 눈물이 났다. 한동안 사람들은 다 귀를 막고 제 옳은 소견대로 말했고, 내일의 사명도 내일의 날씨도 몰라 갈지(之) 자로 걸었다. 기쁘지도 떳떳하지도 않게 보낸 시간이 사무쳤다.
“살아보면 알아요. 그렇게 살아져요.”
젊은이가 많이 우울해해요. 청년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어두운 얼굴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도 있을 거예요. 그래도 세상은 보는 눈에 따라 달라져요. 모든 걸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하면 한이 없습니다. 세상에 안 좋은 것도 많습니다. 사람에게도 자연에도. 그래도 이로운 게 더 많습니다. 좋은 것을 먼저 생각하고 선한 것을 많이 생각하고 사세요. 악보다 선이 훨씬 많습니다.”
그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기보다 많이 움직이라고 했다.
“그래야 몸이 건강해지고 나쁜 생각을 덜 합니다. 한국인이 얼마나 용감합니까? 우리나라가 한국전쟁 후에 이렇게 발전하는 모습을 저는 다 봤어요. TV도 굿 뉴스를 좀 더 많이 내보내면 좋겠어요.”

살면서 괴로울 때는 없었나요.
“교회 전체를 생각해 보면 60년 전이었어요. 원래 모든 미사를 라틴어로 드렸는데, 교황청에서 미사도, 사목도 현지어로 현지화하라고 내려왔어요. 엄청난 변화였어요. 그전까지 신부들은 라틴어로 기도문을 외우고 고해성사도 드렸어요. 그때부터는 한국말, 일본말, 중국말이 다양하게 미사에 쓰였어요. 각 나라에는 풍속이 있어서 한국에서는 설이나 세배, 대보름, 유교, 전통 식사 같은 것을 다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그런데 안동교구에 있던 외국인 신부가 적응을 못 해 하나둘 떠났어요. 19개 본당 중 7개 본당이 비었습니다. 그때 마음이 아주 괴로웠어요. 프랑스에 가서 일주일 동안 피정을 했습니다. 피정에서 얻은 깨달음이 ‘내가 신경 써봐야 소용없다’였어요. 하느님께 내어 맡긴다.”
그때부터 침묵 기도가 시작됐다.
“대구교구에서 도움을 주고 다른 선교사가 도와주고, 조금씩 한국 신부님이 태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일평생 제가 머리 써서 이렇게 저렇게 하지 않았어요. 마음 비우고 살면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어요. 그건 평범한 우연이 아니었어요.”
안동교구장이었던 1973년 두봉 주교는 경북 영주에 한센병 환자를 위한 의원을 열었고, 1978년 가톨릭농민회를 설립했다. 장애인 직업 훈련원, 여성 교육을 위한 학교법인 상지학원도 세웠다. 교회가 현지화하면 현지 출신 사제에게 맡긴다는 원칙에 따라, 두봉 주교는 네 번 교황청에 교구장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반려됐다.
1979년 이른바 ‘오원춘 사건’으로 한국 정부와 갈등을 빚었을 때, 오히려 사직 제의를 거절하고 ‘주교’로서 한국 농민의 곁을 지켰다. 1978년 영양군의 불량 감자 종자 피해에 가톨릭 사제가 함께 항의하며 보상을 받아낸 일이 시발이 돼 벌어진 오원춘 사건은 이후 농민운동으로 확대됐다. 1954년부터 71년간 그는 정직과 낙관을 갖춘 한국인의 의젓함을 사랑했다. 한국은 그에게 대통령상을, 프랑스는 나폴레옹 훈장을 수여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인 ‘두봉’을 ‘산봉우리에서 노래하는 두견새’에서 따왔다고 했다. 그는 봉양 두씨로 본관을 정해 시조로 호적에 등록했다.
고향인 오를레앙과 의성 중에 어디가 더 고향 같나요.
“(오를레앙에는) 5년 전 다녀왔어요. 눈이 나빠지고 귀가 나빠져서 이제는 더 못 가요. 이제는 운전도 못 해요. 나는 오를레앙에서 태어났지만, 여기서 살았어요. 여기 우리나라에서 아주 오래 살았어요.”
더 오래 살아 다시 만나기를 기도하며 해지기 전에 사제관을 나왔다. 서울로 돌아가는 양손이 허전하지 않도록 유과와 곶감 선물을 바리바리 챙겨 안겨줬다. 값없이 받은 게 너무 많아 꿈인가 생시인가, 한참 동안 말을 잃었다. 담장 문밖으로 배웅을 나온 두봉 주교가 웃으며 흰 손을 흔들었다.
“잘 사세요. 기쁘게 떳떳하게.”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 두봉 레나도 주교는 4월 10일 오후 7시 47분 선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