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렵게 일궈낸 한일 관계 개선의 모멘텀을 유지·강화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경제, 경제 안보, 첨단 과학기술, 인적 교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협력 사업을 발굴하자는 데 뜻을 같이했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1월 13일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이와야 다케시 일본 외무상과 회담을 가진 뒤 연 공동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12·3 비상계엄 사태 여파로 한국 정치권이 크게 요동치는 상황에서 일본 외무상이 방한한 것은 한일 관계 강화에 대한 일본의 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해석된다. 일본 외무상이 한국과 양자 회담을 목적으로 방한한 것은 2018년 4월 고노 다로 이후 약 7년 만이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여파로 치러질 조기 대선(6월 3일) 19일 뒤인 6월 22일은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 기념일이다. 조기 대선 결과에 따라 어떤 분위기로 양국 간 국교 정상화를 기념하게 될지 불확실한 상황이다. ‘이코노미조선’은 국내외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아 상호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한일 관계의 뉴노멀(New Normal·새로운 표준)’을 모색했다.
미·중 갈등이 전방위로 확산하는 시대에 가까운 이웃이자 경쟁국인 일본과 경제, 외교, 전략적 관계는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미·중 신냉전 속에서 이들 두 나라 사이에 있는 한국과 일본의 선택은 더욱 중대한 의미를 띠게 됐다. 관세와 방위비, 북핵 문제 등 공통 과제를 안고 있는 한국과 일본이 필요한 지점에서 협력해 한·미·일 3국 협력 구도 속에서 국익을 지켜야 하는 공통의 도전도 떠안게 됐다.
지난 60년간 양국의 경제력 격차가 크게 줄어들면서 동등한 위치에서 협력이 가능해 진 것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1970년대 초반 1인당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일본이 한국보다 10배 가까이 컸다. 하지만 2024년 10월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달러 기준 1인당 명목 GDP 추정치는 한국이 3만6130달러, 일본이 3만2860달러로 한국이 다소 앞섰다.
재일 교포 1.5세로, 국내 대표적인 일본 전문가 중 한 명인 이지평 한국외국어대 융합일본지역학부 특임 교수는 ‘이코노미조선’에 “반도체와 관세 등 주요 이슈에 관해 한국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비슷한 만큼 한·미·일 협력의 틀 안에서 일본과 협력하는 게 중요하다”며 “(트럼프 2기 정부에서) 중국산 반도체에 대한 미국의 제재 범위를 한국과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조정한다든지, 관세율을 인하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장기 불황 여파로 일본의 기술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의견도 있다. 일본은 디지털화가 빠르게 진행된 분야에서 경쟁력이 약해졌지만, 자동차처럼 복잡성이 큰 쪽에서는 여전히 최첨단에 있다. 소재·부품·장비 부문 경쟁력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며, 기동력이 좋은 소형 탱크나 호위함을 개조한 경항공모함 등 무기 제조에서도 미국이 깜짝 놀랄 만큼 뛰어난 기술력을 뽐내고 있다. 그렇다면 한일 경제협력의 실마리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테라다 다카시 일본 도시샤대 교수와 나카바야시 미에코 와세다 교수 등 일본의 국제관계 전문가는 한국이 일본 주도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가입할 것을 권한다. 2018년 출범한 CPTPP는 아시아·태평양 국가가 결성한 다자간 자유무역협정(FTA)이다. 애초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설계된 미국 주도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모태지만, 트럼프 1기 정부 시절인 2017년 미국이 탈퇴를 선언하면서 일본 주도의 CPTPP로 거듭났다. 총 12개국(일본·캐나다·영국·호주·뉴질랜드·멕시코·칠레·페루·말레이시아·베트남·싱가포르·브루나이)이 회원국으로, 이들의 GDP 총합은 전 세계 GDP의 15%인 14조7000억달러(약 2경859조원)에 달한다. 일본 매체는 CPTPP의 성장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보호무역주의 기조가 강화하는 것과 대조되는 흐름”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한·중·일 경제협력, 한·미·일 안보 협력과 공존 가능"
한일 양국이 안보 측면에서 필수 불가결한 한·미·일 협력과 경제적으로 중요한 한·중· 일 협력 양쪽 모두에서 협력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문가 사이에서 이견이 없다.
글로벌 리스크 예측 전문가 이언 브레머 유라시아그룹 회장은 “한·중·일 3국 협력은 한·미·일 협력과 공존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체제 사이의 긴장감은 어느 정도 감내할 수밖에 없다. 한·중·일 협력은 지난 20년간 지속되어 왔으며 주로 경제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브레머 회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파이프라인 사업에 한국과 일본이 공동 투자하는 것도 양국 협력의 좋은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그렇게 해서 트럼프 대통령의 마음을 사로잡아 관세를 면제 또는 할인받을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이희섭 한·중·일 3국 협력사무국(TCS) 사무총장은 “한·미·일 협력은 역내 평화에 긴요한 한반도의 평화·안정을 담보하는 안보 공동체라 할 수 있고, 한·중·일 협력은 동북아시아라는 한 공간에서 서로 이웃하며 함께 숨 쉬고 생활하면서 경제를 영위하는 생활 경제 공동체에 가깝다”며 “양쪽은 각기 추구하는 바와 그로부터 얻는 국익이 서로 다를 뿐 아니라, 어느 하나가 다른 협력을 대체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상호 보완적인 측면이 강하다. 양쪽 모두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에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지평 교수는 “한·미·일은 안보 동맹, 한·중·일은 지역 협력과 경제 활성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중국이 변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먼저 단정 지을 필요는 없다. 교류가 뜸해지면 마찰이 생길 위험은 더 커지게 마련”이라고 했다. 한일 간 경제협력이 유망한 분야로 이창민 한국외국어대 융합일본지역학부 교수는 △수소 경제 및 탄소 중립 전환 분야 △디지털 표준과 기술 윤리 △저출산·고령화 대응 기술 △디지털 전환과 중소기업 혁신 생태계 구축의 네 가지 분야를 제시했다.
코트라(KOTRA)는 4월 1일 발간한 ‘대전환 시대, 일본 자동차 산업의 대응 전략과 시사점’ 보고서에서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경쟁 관계인 한국과 일본이 손을 맞잡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한국과 일본의 자동차 업체가 미국 트럼프 2기 정부의 고율 관세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공통적으로 미국 현지 생산을 확대하고 부품 조달을 미국 내 거점으로 전환 중이라고 전했다. 이 과정에서 도요타와 LG에너지솔루션, 닛산과 SK온 등 한일 기업 간 추가 공급 계약을 맺는 등 협력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보고서는 또 일본 자동차 제조 업체가 SDV(Software De-fined Vehicle·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산업과 전략적 연계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의 강점을 결합한 새로운 협력 가능성이 크며, 모빌리티 서비스 관련 소프트웨어(SW) 분야에서 한국과 일본의 협력과 제휴 가능성 또한 크다고 봤다.
한일 관계의 최대 변수는 양국의 국내 정치와 과거사 문제다. 한일 관계는 매번 과거사 갈등으로 좌초돼 왔다. 조 장관도 이를 의식한 듯 3월 17일 일본 아사히신문과 진행한 서면 인터뷰에서 “일본 국민이 먼저 과거사로 인한 우리 국민의 아픈 상처를 헤아리는 손길을 내민다면 우리 국민은 분명 그 손을 잡고 미래를 향해 더 큰 발걸음을 내디딜 것” 이라며 일본의 전향적인 태도를 촉구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한일 관계는 물론 한·중· 일 협력도 원만해지려면 양국 정치인이 표를얻기 위해 반일과 혐한을 부추기는 행태가 사라져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