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이 무기화되고 공급망이 지정학적으로 재편되는 경제 안보 시대 속 한국과 일본 모두 전략적 독립성을 중시하게 됐지만, 한일 간 협력 가능성은 닫혀 있지 않다.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산업 질서와 사회적 공통 과제를 중심으로 한 협력 모델을 모색할 적기다.”
이창민 한국외국어대 융합일본지역학부 교수는 4월 25일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 교수는 일본 도쿄대에서 경제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도쿄공업대 조교수를 거쳐 한국외국어대 교수로 자리 잡았다. 그는 ‘아베노믹스와 저온호황’ ‘아베 시대 일본의 국가전략(공저)’ 등의 책을 쓰는 등 일본 정치· 경제 전문가로 자리매김했다.
현재 한일 양국 모두 지정학적 긴장과 미국의 관세정책 변화 등으로 경제구조 취약성과 불확실성을 안고 있어 ‘경제 돌파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은 향후 우리나라와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까. 다음은 일문일답.
최근 한국과 일본의 경제 상황을 진단해 달라.
“2024년 이후 한국과 일본 모두 경제구조의 취약성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한국은 성장률 둔화 속 한국은행의 경제성장률 전망치 하향 조정, 가계 소비 회복 지연, 산업 간 수출 회복 불균형 심화 등 내수와 대외 수요 모두 불안정한 양상을 보인다. 특히 대통령 탄핵 정국이라는 정치적 불확실성은 경제 심리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으며, 외국인 자본 유입에도 제동을 걸었다.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 지연 속 고금리 기조 장기화는 가계 부채 부담을 가중해 내수 침체와 부동산 시장의 불안정을 심화할 수 있다.
일본 역시 마이너스 금리 해제와 금리 인상 등 통화정책 전환기에 들어섰다. 장기간 초저금리정책의 후과로 일본의 국채 잔액은 국내총생산(GDP)의 250%를 넘어선 상황이다. 향후 국채 금리 상승에 따른 재정 부담 증가 가능성이 제기된다. 엔저 현상으로 인한 수입 물가 상승으로 실질임금 정체와 소비 위축도 발생하고 있다.”
경제 안보가 중시되는 상황인데, 한일 간 산업·기술 협력이 가능할까.
“한일 양국의 반도체 산업은 상호 보완적 협력을 바탕으로 발전해 왔다. 한국은 제조 역량을 중심으로, 일본은 소재와 장비 부문에서 강점을 가지며 상호 보완적 협력 구조를 구축했다. 그러나 일본이 2019년 반도체 소재 3품목(불화수소·포토레지스트·플루오린폴리이미드)에 대한 수출규제를 한 이후 협력 구조가 흔들렸다. 아울러 일본은 인공지능(AI) 분야에서도 자국어 기반의 생성 AI 개발, AI 데이터센터 건설, AI 연산용 반도체 설계 및 생산 추진 등 ‘미니 생태계’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경제 안보 시대에 한일 양국의 협력이 줄어들 것이라 보일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한·일 두나라가 새로운 산업 질서와 사회적 공통 과제를 중심으로 한 협력 모델을 모색할 적기이기도 하다.”
어떤 분야에서 한일 양국이 협력할 수 있나.
“첫째로는 수소 경제 및 탄소 중립 전환 분야에서 협력이 유망하다. 한국과 일본은 모두 2050년 탄소 중립 목표를 설정하고 있으며, 양국 모두 수소는 에너지전환의 핵심 열쇠다. 일본은 수소 수입 인프라와 응용 기술에 강점이 있으며, 한국은 수소 생산과 저장 기술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어 상호 보완적 협력이 가능하다.
둘째, 디지털 표준 기술 윤리 도입은 양국이 함께 국제 규범 형성에 기여할 수 있는 분야다. AI 윤리 가이드라인, 디지털 신원(Dig-ital ID), 디지털 통화 등의 표준을 공동으로 실험하는 협력도 할 수 있다.
셋째, 저출산·고령화 대응 기술 역시 한일 간 시급하고도 구조적인 공통 과제다. 일본은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20%가 넘는 초고령사회 선진국으로 다양한 돌봄 로봇 기술과 노인 친화 인프라 개발 경험이 있으며, 2024년 12월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한국은 ICT 기반 의료 기술과 스마트 헬스케어에서 강점을 보이고 있다. 고령 노동력 활용, 평생교육 등에서도 정책 교류와 기술 협력이 가능하다.
넷째, 디지털 전환과 중소기업 혁신 생태계 구축도 중요한 협력 영역이다. 양국 모두 제조업 기반을 바탕으로 중소기업의 디지털화가 국가 경쟁력 유지에 핵심이 되고 있다. 스마트 팩토리 기술, 스타트업 교류, 공공 데이터 행정 시스템 등에서 공동 생태계 조성이 가능하다.”
안보·경제에 있어 한·미·일 동맹은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하 트럼프)은 한국과 일본을 어떻게 바라보나.
“트럼프는 한국과 일본을 모두 ‘안보 무임승차’ 국가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경제 측면에서도 트럼프는 무역수지를 매우 중시하는 인물이라, 일본과 한국 모두 미국의 주요 무역 적자 대상국으로 간주했다.
트럼프의 협상 전략은 항상 ‘누가 먼저 미국과 딜(거래)을 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이번에 미국이 지정한 우선 협상 대상국 5개국에 일본과 한국이 모두 포함되었다는 점은 이들 국가가 트럼프에게 있어 협상 우선순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트럼프는 이들 국가를 상대로 비교적 신속하고 효과적인 협상 성과를 끌어낼 수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양국을 대하는 태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트럼프는 개인적 경험과 선호 측면에서 일본에 더 큰 호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와는 ‘골프 외교’로 대표되는 긴밀한 개인적 관계를 형성해, 일본과 외교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됐다. 반면, 한국과 관계는 일본에 비해 다소 불안정한 면이 있다. 트럼프는 문재인 전 대통령과 관계에서 신뢰보다는 일정한 전략적 거리 두기를 유지하려는 태도를 보였고, 특히 북한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 차이는 양국 정상 간 시각차를 분명히 드러냈다. 현재도 지도력 공백 상태에 있는 한국에 대해 트럼프가 특별한 호감을 갖고 있을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미국과 일본의 관세 협상을 어떻게 평가하나.
“트럼프의 관세 부과 발표에 앞서 일본은 선제적으로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누적 대미 직접투자를 1조달러까지 확대하겠다고 하고, 미국 노동자가 민감해하는 US스틸 인수도 투자로 돌리겠다고 제안했다. 방위비 분담금도 트럼프 1기 정부때보다 두 배 정도 늘리겠다고 했다. 이후 관세 부과에 있어서 일본이 빠지지 않자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일본 정부는 당황했을 거다.
하지만 얼마 후 트럼프가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 금지를 재검토하겠다고 하는 등 일본에 우호적인 입장을 하나씩 내놓지 않았나. 아마 일본 측도 미국이 선물을 받으면서 ‘약속 대련’ 식으로 먼저 때려도 나중에 구해 준다는 심리를 가지고 있을 거다. 그래서 관세 협상도 일본이 제일 먼저 손 들지 않았나. 이는 미국이 유럽이나 캐나다 등 여타 동맹국을 상대로 일본을 ‘협상 태도에 있어 모범 사례’로 삼으려는 계산과도 연결된다.”
일본 내에선 '조공 외교'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는데.
“트럼프 1기 정부(2017~2020년) 당시 아베 일본 총리는 트럼프와 개인적 친분을 바탕으로 일명 ‘퍼스트 프렌드(First Friend)’ 전략을 구사했다. 트럼프 집권 초기 가장 먼저 정상 외교에 나섰고, 골프 회동을 비롯한 유대 강화를 통해 양국 관계를 밀착시켰다. 당시에도 일본 내에서는 이를 조공 외교라고 비판하는 여론이 적지 않았으나, 미일 간 무역 협상 결과를 보면 일본이 실리를 챙긴 측면이 많다. 이번에는 이시바 총리가 아베 모델을 답습한 듯한 ‘라스트 프렌드(Last Friend)’ 전략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관세 부과를 못 피했음에도 가장 먼저 관세 협상에 손을 들었다. 일본의 대미 전략은 가장 먼저 움직여 동맹의 가치를 입증하고, 그 대가로 실질적 이익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일본의 외교 전략에 대해 우리나라가 참고할 부분이 있을까.
“한국이 일본의 전략을 그대로 따라 할 필요는 없다. 미국이 한국에 기대하는 협력의 내용이 일본과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은 안보 면에서는 북한 문제에 더 밀접하게 얽혀 있고, 경제적으로는 반도체 생산 역량, 고부가가치의 조선 기술, 전략 광물 정제 및 소재 가공 능력 등에서 미국이 필요로 하는 기술적 자산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한국은 일본을 모방하기보다는 한국만의 협상 자산과 외교적 입지를 활용한 독자 전략을 쓰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고 효과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