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과 일본은 여러 방면에서 협력할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언급한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파이프라인 사업에 공동 투자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그렇게 해서 트럼프 대통령의 마음을 사로잡아 관세를 면제 또는 할인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언 브레머 유라시아그룹 회장은 최근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과 일본을 거의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면서 “두 나라는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며 미국의 대(對)중국 전략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브레머 회장은 글로벌 리스크(risk· 위험) 예측 전문가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국가가 사라졌다는 의미에서 ‘G 제로’ 이론을 제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01년에는 신흥국을 대상으로 정치 리스크를 점수로 매겨 지수화한 정치 리스크 인덱스(GPRI·Global Political Risk Index)를 개발하기도 했다. 다음은 브레머 회장과 일문일답.
한국과 일본의 경제 상황을 각각 어떻게 보고 있나.
“한국 경제는 비상계엄 사태 장기화와 트럼프 2기 정부 출범으로 이중 타격을 입었다. 한국 경제 관료와 외국계 은행은 2025년 한국의 GDP(국내총생산) 성장률 전망치를 계속 하향 조정하고 있다. 소비자신뢰지수가 낮아지는 가운데 (트럼프 정부의 관세정책으로 인한) 무역 역풍까지 거세지고 있다.”
일본의 경우는 어떤가.
“일본은 수십 년 동안 디플레이션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최근 2년 동안 2%를 상회하는 완만한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임금 인상률이 인플레이션을 따라잡지 못해 집권 자민당의 정치적인 고민이 커졌다. 또한 엔화 약세로 인한 에너지와식료품 수입 가격 상승이 가계에 큰 부담을 주고 있다. 수년간 초완화 통화정책을 이어온 일본은행(BOJ)은 인플레이션 대응을 위해 금리를 서서히 인상하고 있으며, 통화정책 정상화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트럼프 정부의 공격적인 관세정책으로 불확실성이 확산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이 어떤 분야에서 서로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협력할 수 있을까.
“한국과 일본은 여러 방면에서 협력할 수 있다. 트럼프가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언급한 알래스카 LNG 파이프라인 사업에 공동 투자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그렇게 해서 트럼프 대통령의 마음을 사로잡아 관세를 면제 또는 할인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도체 제조와 로봇공학, 인공지능(AI)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상호 투자와 교역을 늘릴 필요도 있다. 두 나라를 오가는 관광객을 늘리는 것도 양국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를 매개로 한국과 일본의 경쟁을 부추기는 것이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일까.
“한국과 일본이 경쟁하기보다는 공동 투자하기를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해당 프로젝트가 두 나라에 모두 큰 비용이 들고 리스크도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3월 4일(현지시각) 집권 2기 첫 의회 연설에서 미국이 “알래스카주에 세계 최대 규모 중 하나인 거대한 LNG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고 있다”면서 “일본, 한국 그리고 다른 나라가 수조달러씩 투자하면서 우리 파트너가 되기를 원한다”고 언급했다. 최북단 노스슬로프의 포인트톰슨 가스전에서 LNG를 추출한 후 태평양과 접한 남쪽 니키스키 지역까지 수송해 전 세계로 수출하는 것이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의 핵심이다. 알래스카주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LNG 매장량이 많다. 노스슬로프에만 한국이 약 10년간 쓸 수 있는 엄청난 양이 매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포인트톰슨 가스전 개발을 위해서는 혹한을 뚫고 남부 부동항인 니키스키까지 1300㎞에 이르는 가스관을 깔아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과 일본을 어떤 부분에서 다르게 보고 있을까.
“한국과 일본을 거의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두 나라는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며 미국의 대중국 전략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트럼프는 한국과 일본이 자국 내 미군을 지원하고 방위비 지출을 늘리기 위해 더 큰 비용을 지불할 것으로 기대한다. 한국과 일본 기업은 미국의 주요 투자자이기도 하다. 무역에 있어서는 양국 모두 미국에 대규모 흑자를 내고 있어서 트럼프 대통령과 그 측근이 우려하고 있다. 향후 북한과 협상에서 합동 군사훈련과 한반도 배치 미군 자산을 포함해 한국에 대한 미국의 안보 지원이 협상 대상이 될 수도 있는 반면, 일본에 대한 군사 지원을 줄일 가능성은 작다는 점이 차이점일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이 힘을 합쳐 트럼프의 미국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도 때로는 좋은 전략일 수 있을까.
“두 나라 모두에 바람직하지 않다. 한국과 일본 모두 안보를 위해 미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미국의 뜻에 반해 한목소리를 내기 위해 힘을 합치는 것은 한·미·일 3국 협력과 양국을 대하는 트럼프의 태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관세 면제를 위해 트럼프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향으로 한국과 일본이 힘을 합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지역 협력과 경제 관점에서 한·중·일 협력도 중요할 수 있다. 그런데 트럼프 정부에서 한·미·일 협력과 공존할 수 있다고 보는지.
“한·중·일 3국 협력은 한·미·일 협력과 공존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체제 사이의 긴장감은 어느 정도 감내할 수밖에 없다. 한·중·일 협력은 지난 20년간 지속되어 왔으며 주로 경제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한·중·일 경제·통상 장관은 3월 30일 5년여 만에 한자리에 모여 3국 간 경제·통상 협력을 확대해 나가자는 데 뜻을 모았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왕원타오(王文濤) 중국 상무부장, 무토 요지(武藤容治) 일본 경제산업성 대신이 서울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장에서 제13차 한·중·일 경제·통상 장관회의를 개최한 것이다.
트럼프는 북한에 우호적인 것으로 보인다. 북·미 관계가 한미, 미·일, 한·미·일 협력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나.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휴전 합의 완료 후 북한으로 관심을 돌릴 가능성이 크다. 2025년 하반기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 대한 접촉 노력이 빈번해질 수 있다. 김 위원장은 2018~2019년보다 더 강력한 위치에서 협상에 임할 것이다. 러시아와 안보 동맹과 더 정교해진 무기 체계로 인해 비핵화 논의조차 꺼릴 것이다. 북한의 무기 프로그램과 미사일 시험 유예를 대가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안보 지원 대폭 축소를 요구할 것으로 본다.”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임기에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한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적극적인 노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아베 전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과 관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외국 지도자 중 한 명임에 틀림없다. 트럼프와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서 골프 라운딩 등을 통해 자주 만났고, 듣기 좋은 소리도 잘했다. 트럼프와 개인 차원에서 교류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건 한국의 정치 지도자도 배울 필요가 있다.”
향후 한일, 한·미·일 협력의 주요 변수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외교를 재개할지 여부와 그렇게 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더 광범위한 협상의 일환으로 김 위원장에게 어디까지 양보할 의향이 있는지가 매우 중대한 변수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안보 지원이 줄어들면 한일 관계는 물론 미국과 3국 협력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또 다른 주요 변수는 반도체, 자동차, 의약품에 대한 미국의 상호 관세와 부문별 관세가 한국과 일본에 얼마나 높은 수준으로 적용될지도 지켜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