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95) 버크셔 해서웨이(이하 버크셔)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가 은퇴한다. 버핏은 5월 3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 있는 버크셔 본사에서 열린 주주총회(주총)에서 “올해 말 은퇴하겠다”고 밝혔다. 1965년 망해가던 직물 회사였던 버크셔를 인수한 지 60년 만이다. 버핏은 버크셔를 약 200개 자회사를 거느린 시가총액 1조2000억달러(약 1674조원)의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전 세계 상장 기업 중 기업 가치 8위다.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64% 수준이다. 버핏의 갑작스러운 은퇴 선언에 주총장을 찾은 4만여 명의 주주는 잠시 침묵에 휩싸였으나, 곧 1분간 기립박수를 보냈다. 버크셔 주가는 1965~2024년 연평균 19.9% 상승했다. 같은 기간 연평균 10.4% 상승한 미국 S&P500 지수 수익률의 약 두 배다.
주총서 트럼프·김정은 비판
버핏은 이번 주총에서 “나의 두 자녀인 수지와 하워드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고 있지만, 나머지 이사에게는 새로운 소식일 것 같다”며 “그레그 에이블(62)이 연말에 회사 CEO를 맡을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버핏은 2021년부터 에이블 버크셔 비(非)보험 부문 부회장이 자신의 후임 CEO가 될 것이라고 예고했으나, 버핏이 사망한뒤 에이블이 CEO를 맡을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설적인 투자자가 말하자 거대한 경기장은 침묵에 휩싸였다”며 “그가 말을 마치자, 에이블을 포함한 수많은 주주가 기립박수를 보냈다”고 전했다. 이날 주총에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팀 쿡 애플 CEO,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 장관 등이 참석해 버핏의 깜짝 은퇴 발표를 현장에서 지켜봤다.
버핏은 “나는 때로 (버크셔에)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운영, 자본 배분 등 무엇이든 최종 결정은 에이블이 내리게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버크셔 주식은 팔 생각이 전혀 없다”고 덧붙였다. 버핏은 버크셔 지분 약 14%를 보유한 최대 주주다. 버핏은 “에이블이 경영하는 동안 버크셔의 전망이 내가 경영할 때보다 더 좋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내린 경제적인 결정”이라고 했다. 캐나다 앨버타주 에드먼턴의 노동자 계층에서 태어난 에이블은 어릴 적 빈 병을 모으거나 소화 용액을 채우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랐다. 버크셔에서 25년간 근무했고, 찰리 멍거 부회장이 2023년 별세한 뒤인 2024년 주총부터 버핏의 옆자리에 앉았다. 2018년부터 버크셔의 비보험 사업을 총괄해 왔다. 버크셔 이사회는 5월 11일 에이블을 2026년 1월 1일 자로 버크셔 CEO로 임명하는 안건을 통과시켰고, 버핏은 버크셔 회장직을 유지하기로 했다.
버핏은 이번 주총에서 “무역은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버핏은 “75억 인구는 싫어하는데, 3억 명(미국 인구)은 그들이 한 일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내 생각엔 큰 실수”라며 “나는 그게 옳다고 생각하지 않고 현명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우리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하고, 다른 나라도 자국이 가장 잘하는 것을 해야 한다”면서 “세계 다른 나라가 더 번영할수록 우리가 손해 보는 게 아니라 그들과 함께 더 번영한다”고 말했다.

버핏은 트럼프의 관세정책으로 미 증시가 급락한 현상과 관련해서는 “지금은 극적인 베어마켓(약세장)이 아니다”고 진단했다. 버핏은 “이것은 주식시장의 한 부분”이라면서 “시장이 하락할 경우 겁먹고 시장이 오를 때 흥분하는 사람이라면 주식시장은 참여하기에 끔찍한 곳”이라고 밝혔다. 이어 “특별히 비판하려는 의도는 아니다”라면서 “사람이 감정이 있다는 걸 알지만, 감정이 투자를 좌우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버핏은 북한의 김정은을 겨냥해 “북한에는 자신의 머리 스타일을 비판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남자가 있다”며 “북한이 핵무기가 왜 필요한가”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최고의 위치에서 물러나는 전설
버핏의 투자는 장기 투자와 가치 투자로 요약된다. 코카콜라가 버핏 투자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1987년 10월 블랙 먼데이 이후 코카콜라가 저평가되자, 버핏은 1988년부터 수년간 코카콜라 주식 약 13억달러(약 1조8132억원)를 매입했다. 현재 지분 가치는 250억달러(약 35조원)에 달한다. 또 다른 성공 사례는 애플로, 버핏은 2016년부터 지속적으로 애플 주식을 매입했다. 2024년 말 기준 버크셔의 포트폴리오는 애플(28.12%), 아메리칸익스프레스(16.84%), 뱅크오브아메리카(11.19%), 코카콜라(9.32%), 셰브런(6.43%) 등이다. 분기마다 공개되는 버핏의 투자 포트폴리오에 전 세계 투자자 관심이 쏠리고, 매년 5월 열리는 버크셔 주총에 세계 각지의 투자자가 몰려든다. 버크셔는 가이코(자동차 보험회사), 벌링턴 노던 산타페이(미국 최대 철도 화물 회사), 버크셔 해서웨이 에너지(전력·에너지 회사), 프리시전 캐스트파츠(항공기 부품사) 등 다양한 산업에서 자회사를 두고 있다. 버크셔 주가는 버핏이 인수한 뒤 60년 동안 550만% 상승했다.
버핏의 가장 유명한 투자 조언은 1996년 주총에서 남긴 “10년간 보유할 생각이 없다면 10분도 보유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이 탐욕스러울 때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할 때 탐욕스러워져라” “적당한 회사를 훌륭한 가격에 사는 것보다 훌륭한 회사를 적당한 가격에 사는 게 훨씬 낫다”는 말도 전 세계 투자자를 인도하는 철학이다. “명성을 쌓는 데 20년이 걸리고, 명성을 망치는 데 5분이 걸린다” “최고의 투자는 자신에 대한 투자”라는 가르침은 인생을 성찰하게 한다.
버핏은 억만장자임에도 소탈한 생활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58년 3만1500달러(약 4400만원)를 주고 산 오마하의 주택에서 아직도 살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 주택의 현재 가격은 122만4500달러(약 17억1000만원)로, 서울 평균 집값(13억원)보다 4억원가량 비싼 수준이다. 버핏은 아침으로 맥도널드를 즐기고, 자가용을 직접 운전한다. ‘부자가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한다’는 지론으로 존경받으며, 재산의 99%를 기부하기로 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버핏은 버크셔를 최고의 위치로 올려둔 순간 물러나게 됐다” 고 보도했다. 버크셔 A주는 5월 2일 주당 80만9350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연초부터 5월 14일까지 주가가 12.6% 상승했는데, 같은 기간 S&P500 지수는 0.1% 상승하는 데 그쳤다. 뉴욕타임스(NYT)는 버핏의 은퇴를 보도하며 “현대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유명한 투자자의 시대가 끝났다”고 밝혔다. 쿡 CEO는 소셜미디어(SNS)에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버핏 회장의 지혜에 영감을 받았다”면서 “그를 알게 된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영광 중 하나였다”고 했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CEO는 “버핏은 정직과 낙관, 상식으로 미국과 미국 기업의 성장에 투자한 인물”이라며 “버핏에게 많은 것을 배웠고, 그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어 영광”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