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기도, 인터넷도 없던 인도 북동부 비하르주(州) 시골 마을 출신 청년이 세운 ‘한국 기업’이 14억 인구의 기회의 땅 인도에서 교육 강국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에듀테크 스타트업 태그하이브의 판카즈아가르왈(Pankaj Agarwal·42) 대표는 한국 스타트업 최초의 인도인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다.
그는 입학 경쟁률이 1000 대 1이 훌쩍 넘는 인도공과대(IIT)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수재다. 2004년 삼성전자 글로벌 장학생으로 한국과 첫 인연을 맺은 그는 서울대에서 전자공학 석사과정을 마쳤고, 삼성전자 디스플레이사업부에서 10년 넘게 개발자로 일했다. 삼성전자 외국인 직원 중 최초로 회사 지원을 받아 하버드대 경영전문대학원(MBA)으로 유학도 다녀왔다.
그랬던 그가 창업으로 눈을 돌린 건 ‘기술을 통해 가난한 아이들이 꿈과 비전을 품도록 돕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책상과 의자, 전기도 없이 맨바닥에 앉아서 공부했던 학창 시절의 경험이 촉매가 됐다. 삼성전자 사내벤처 프로그램 C랩을 통해 태그하이브를 창업 후 분사한 판카즈 대표의 꿈에 날개를 달아준 건 코이카의 혁신적 기술 프로그램(CTS·Creative Technology Solution Program)이었다. CTS는 예비 창업가, 스타트업 등 혁신가의 아이디어와 기술을 ODA에 적용해 기존 방법으로 해결하기 어려웠던 사회적 문제에 대한 솔루션을 찾도록 돕는다.
태그하이브의 핵심 제품은 ‘클래스 사티(Class Saathi)’라는 애플리케이션(앱)이다. 사티는 친구라는 뜻의 힌디어다. 앱을 작동시키는 리모컨의 일종인 클리커(clicker)를 활용해 교실에서 교사와 학생 간 양방향 소통을 촉진하고 수준별 맞춤형 자기 주도 학습을 돕는다. 인터넷이 없는 환경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클래스 사티는 현재 한국·인도·베트남·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의 8000곳이 넘는 학교에서 사용 중이다. 코이카와 함께 진행한 파일럿 테스트에선 클래스 사티 이용 후 인도 학생의 학업 성취도가 8%, 학습 참여율이 10% 상승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5월 9일 서울 송파구 태그하이브 본사에서 만난 판카즈 대표는 “코이카와 CTS가 없었다면 인도에서 사업을 잘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고마움을 표했다. “태그하이브가 한국 기업이어서(인도에서 한국 이미지가 좋아서) 인도 사업에 도움 된 부분이 있다”고도 했다. 태그하이브는 지난 4월 코이카의 포용적 비즈니스 프로그램(IBS·Inclusive Busi-ness Solution Program) 지원 대상으로 선정돼 5년 동안 30억원 규모의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태그하이브는 인도 콜카타에 지사를 두고 있다. 지사라고 하지만 본사보다 직원이 더 많다. 태그하이브의 매출은90%가 인도에서 나온다. 다음은 판카즈 대표와 일문일답.
코이카 지원이 어떻게 도움이 됐나.
“창업 이듬해인 2018년 코이카의 CTS 시드1(인도 기초 교육 이수율 향상을 위한 수업 지원 도구 개발 사업) 과제를 수주해 총 3억원을 지원받았다. 내가 인도 출신인데도 인도 사업이 만만치 않아 ‘포기할까’ 생각도 했는데, 과제를 완수하기 위한 인도 방문 횟수가 늘어날수록 지식과 네트워크가 더해지면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지원금만 주는 게 아니라 지원받은 기업이 잘 성장하도록 관리를 잘해 줬다. CTS 관련 해외 포럼이나 해외 인사가 참석하는 코이카 국내 행사에 초청받아 참여하기도 했는데, 전 세계와 인연을 맺을 좋은 기회가 됐다. 코이카와 소통하면서 보고서 작성이나 사업 관리 노하우도 배울 수 있었다.”
태그하이브가 인도 시장에서 한국 기업으로서 누리는 장점이 있는지.
“인도에서 한국 기업과 브랜드 이미지가 매우 좋다. 사업 때문에 초등학교 교실에 들러 한국어 하는 사람이 있는지 물으면 어린 학생 중에서도 여러 명이 손을 든다. ‘BTS, 블랙핑크를 아느냐’고 물으면 거의 모두가 손을 번쩍 든다. 인도 사람이 한국 사람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믿기 어렵다면 직접 가서 확인해 보기 바란다(웃음). 그런 점에서 한국 기업을 이끌고 인도에서 사업하는 내가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인도에서 투자·사업을 할 때 주의할 점은.
“세계에서 가장 큰 민주주의 국가이면서 첨단 기술에 밝은 젊은 층 비중이 높다는 장점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인도 투자·비즈니스의 전망을 밝게 한다. 하지만 투자에는 항상 리스크가 따르게 마련이다. 인도도 예외일 수 없다. 믿을 수 있는 현지인과 함께하는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문화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도 있을 것 같다.
“한국과 인도 모두 아시아 국가라 비슷한 점도 많지만 차이도 있다. 한국에서는 정해진 프로세스를 따라 업무를 추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인도에서 업무 절차는 개인별로 프로세스가 달라 혼란스럽게 보일 수 있다. 이를테면 꼭 ABC 순서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C부터 시작하는 경우도 있고 B부터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 힌두문화의 영향(그는 힌두교 신자는 교회나 절, 이슬람 사원 어디서나 종교의식에 참여할 수 있다고 했다)일 수도 있지만,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긴 어렵다. 인도에서 사업을 잘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한국인 입장에선 답답할 수 있겠다.
“그래서 더욱 믿을 수 있는 현지인의 도움을 받는 게 중요하다. 사실 나라와 나라 사이 차이 못지않게 나라 안에서도 차이가 크다. 인도만 그런게 아니라 한국을 비롯해 어디 가나 마찬가지다. 사람을 많이 만나 대화하고 토론하는 노력도 그런 이유에서 중요할 수 있다. 그런 노력을 하다 보면 세상 사람 사이에 차이점보다 비슷한 점이 더 많다고 생각하게 된다. 다들 칭찬받고 싶고, 일 잘하고 싶고, 돈 많이 벌고 싶어 한다. 두 부류만 잘 구별할 수 있으면 된다. 정직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인도 최고 명문 공대를 졸업했는데, 서울대로 유학을 와 보니 어땠나.
“이공계 분야에서 인도 대학은 이론 기반이 강하다. 인도공과대 시절 난 ‘어떤 수학 문제도 풀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식 구구단을 ‘49 곱하기 49’까지 외울 정도였으니까. 서울대는 인도공과대보다 실용적인 접근에 능한 듯했다. 석사과정에서 삼성전자의 과제를 할당받았는데, 과제 기반이라 좀 더 의미 있는 공부라는 느낌이 들긴 했다. 인도에서 학부 과정과 한국에서 대학원 과정이 상호 보완적이었던 것 같다.”
인도의 어린이는 구구단이 아니라 19단을 외운다. 그래서 세 자릿수 곱셈도 머릿속으로 단번에 암산한다.
처음 왔을 때와 비교해 한국은 어떻게 달라졌다고 생각하는지.
“2004년과 비교하면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이 많이 늘었다. 직원들이 상사의 지시를 무조건 따르기보다 질문을 많이 하는 것도 긍정적인 변화인 것 같다.”
나빠진 부분도 있는 건가.
“예전의 한국은 업무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런 분위기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요즘에는 조금 느슨해진 것 같다. 한국은 인적자원이 핵심인데, 걱정이 된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한국에서 받은 게 많다. 처음 왔을 때 스스로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코이카와 삼성전자에서 내가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키워주고 기회를 줬다. 그래서 한국을 위해 뭔가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방법을 고민 중이지만, 우선은 지금 하는 사업을 잘하면 자연스럽게 인도 시장에서 한국의 위상 제고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주한인도상공회의소(ICCK) 이사로, 이화여대와 가천대의 겸임교수로, 한국 기업과 청년을 돕고 있기는 하다. 언젠가는 인도 진출을 원하는 한국 기업과 투자자를 본격적으로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