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진국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가까이 있는 것 같아 두려움과 절망감이 몰려옵니다.” 4월 24일(이하 현지시각) 태국 방콕에서 열린 경제 안보 및 통상 전략 관한 회의에서 태국의 한 경제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중진국 함정이란 것이 경제학적으로 타당한 개념인지 그리고 실재하는지 따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냥 성장의 기회가 닫혀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트럼프 정부의 관세정책이 이런 현실을 확인시키고 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4월 2일 상호 관세율을 발표한 이래 동남아 각국은 충격에 휩싸여 있다. 90일의 유예기간이 뒤늦게 발표됐지만, 부과하기로 한 관세율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트럼프 정부가 발표한 상호 관세율은 캄보디아(49%), 라오스(48%), 베트남(46%), 미얀마(44%), 태국(36%), 인도네시아(32%), 말레이시아와 브루나이(각각 24%), 필리핀(18%), 싱가포르(10%)순으로 높다. 대체로 소득수준이 낮은 동남아 국가에 더 높은 상호 관세율이 부과된 지극히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대부분 동남아 국가에 이런 말도 안 되는 높은 관세율 수준은 재앙 그 자체가 되고 있다.
그런데 동남아 국가는 미국 시장에 대한 문턱만 높아지는 것인데 왜 이렇게 심각하게 절망하는 것일까. 성장 전략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까지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 닫아거는 미국 시장, 동남아에 큰 위협
그동안 동남아 국가는 풍부하고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선진국의 투자를 유치해 주로 미국과 유럽을 대상으로 상품을 만들어 파는 수출 지향 산업화 전략으로 성장해 왔다. 1960년대부터 수십 년간 동남아는 일본의 최대 투자처였다. 일본은 동남아를 자국의 생산 거점으로 활용해 왔다. 이후 한국과 중국, 미국 그리고 유럽으로부터 대규모 투자를 유치한 동남아는 세계 최고 투자 대상지로 등극했다.
가령 2023년 아세안 10개국으로 유입된 외국인직접투자(FDI)는 2300억달러(약 321조원)에 달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3년 연속 FDI가 증가해 아세안 10개국은 전 세계 FDI 유입의 17%를 차지하는 등 개발 도상 지역 중 최대 FDI 수혜 지역으로서 입지를 확고히 했다.
역내 시장을 겨냥한 소비 시장 지향형 투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주요국의 대(對)동남아 투자의 주목적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동남아를 생산 거점으로 삼아 선진국으로수출하는 수출용 상품 생산형 투자였다. 동남아 각국 정부도 이러한 목적에 맞게 성장 전략을 추진해 왔다. 그 결과 동남아 국가의 대미 상품 무역수지 흑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예컨대 2023년 베트남의 대미 수출이 1144억달러(약 160조원)인데 같은 해 베트남의 대미 무역수지 흑자가 1046억달러(약 146조원)에 달해, 대미 수출이 수입의 10배에 달하는 극심한 상품 무역수지 불균형을 보였다. 2024년에도 베트남의 대미 무역수지 흑자는 1131억달러(약 158조원)에 달해 중국과 멕시코 다음으로 3위에 해당한다. 415억달러(약 58조원)의 흑자를 보인 태국과 함께 베트남은 미국에 대한 10대 무역수지 흑자국 명단에 포함돼 있다.

중국의 우회 수출 막아라
트럼프 1기(2017~2020년) 정부 당시 미· 중 갈등이 격화된 이래 중국은 베트남에 대한 투자를 크게 늘려왔다. 미국으로 직접 수출이 어려워지자 수많은 중국 기업이 베트남으로 생산 시설을 이전해 만든 상품을 미국 시장에 내다 팔았기 때문이다.
2016년 10억달러(약 1조3950억원)로 베트남이 유치한 총투자 금액의 8.4%에 불과했던 중국의 베트남 투자는 2023년에 45억달러(약 6조2770억원)로 24.2%에 달했고, 홍콩으로부터 투자액까지 합하면 거의 40%에 육박했다. 2016년 이후를 종합하면, 베트남은 2900억달러(약 404조원) 규모의 FDI를 유치, 동남아 최고의 투자 대상지로 등극했는데, 이 중에서 중국과 홍콩 투자가 540억달러(약75조원)에 이르렀다. 중간재 수입도 크게 증가해 베트남 전자 제품 수출 약 80%가 중국산 부품에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다.
태국의 경우도 베트남과 별반 다르지 않다. 2023년 태국의 대미 수출이 약 500억달러인 데 반해 대미 수입은 90억달러(약 13조원)에 불과해 대미 무역수지 흑자가 약 410억달러(약 57조원)에 달했다. 태국은 전통적으로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해외 투자 유입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중국 투자가 증가하고 있다. 특히 전자, 자동차, 석유화학 분야 투자가 내수보다는 수출용으로 이뤄져 왔기 때문에 수출 주도형 산업구조가 강화되고 있다.
트럼프 2기 정부의 대동남아 관세정책은 중국의 대미 우회 수출을 막기 위한 노력으로 해석되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베트남을 ‘최악의 무역 남용국’으로 지목하며, 상호 관세율을 46%로 책정했다. 이에 대해 경제 조사 업체 ING이코노믹스는 “이런 조치가 베트남 국내총생산(GDP)을 최대 5.5%까지 감소시킬 수 있다”고 분석했다. 태국의 경우도 36% 상호 관세율이 지정돼 대미 수출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관세율뿐만 아니라 원산지 검증도 강화하고 있다. 원래 아세안자유무역지대(AFTA) 기준에 따르면, 아세안의 원산지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상품 부가가치 40% 이상의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미국은 아세안에서 미국으로 수출되는 상품이 이러한 원산지 기준을 충족하는지, 검증을 강화하고 있다.
성장 전략 수정해야 할 동남아
아세안 10개국의 상호 관세율이 이렇게 높게 책정된 데는 동남아 국가의 수출 지향형 산업화 전략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왜냐하면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이미 밝혔듯이 상호 관세율은 무역 상대국의 대미 수출량 대비 무역수지 흑자액의 비율을 반으로 나눈 값이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도출됐을 뿐 특별히 동남아 국가를 벌주려고 한 것이 아니다. 동남아 국가에 높은 상호 관세율이 책정된 것은 이 나라들이 대미 상품 무역에서 극심한 불균형, 즉 큰 규모의 상품 무역수지 흑자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미국과 중국이 상대국에 부과하는 관세율을 각각 30%와 10%로 내리기로 합의했지만,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이 과거와 같은 상황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 미국의 상품에 대한 평균 관세율은 2.5%에 불과했는데 무역 비중으로 환산한다면, 2% 남짓에 불과했다. 미국은 미·중 간 대타협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본 관세 10%와 품목 관세 25%에 대해서는 좀처럼 양보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동남아 각국은 수출 시장 다변화에 힘쓰고, 내수 시장을 키우고 강화하며,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산업구조를 빠르게 전환해야 하는 등 새로운 성장 전략을 시급히 모색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관성을 없애기는 어렵다. 게다가 탄소 중립(net zero·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만큼 흡수량도 늘려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늘어나지 않는 상태)과 녹색 전환, AI와 디지털 전환, 기후 재난과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가능성, 미국의 신고립주의에 의한 국지전 발발 가능성 등 복합적 위기 상황에서 동남아 각국은 이 모든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한다. 위기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