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그리고 인플레이션, 지난 20년 동안 세계적인 충격이 이어지면서 유럽 전역에서 산업 정책이 부활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재선되면서 유럽은 경제 회복력을 강화하고 국가 및 지역 안보를 경제정책에 통합해야 할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됐다.
현재 노골적이고 적대적인 미국 정부에 직면한 유럽연합(EU)과 영국은 디지털 경제를 핵심 과제로 삼아야 한다. ②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의 ‘EU 경쟁력 보고서’와 영국의 ‘AI 기회 행동계획(AI Op-portunities Action Plan)’은 모두 디지털 및 AI 기술을 미래 혁신과 성장의 잠재적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가장 큰 과제는 유럽이 미국의 주요 기술 기업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를 줄이는 것이다. 미국은 조 바이든 정부 시절 빅테크에 대해 공격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다. 하지만 트럼프 정부는 EU가 새로운 디지털 규제와 세금 추징을 철회하는 조건에 따라 향후 무역협정 체결 여부가 결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유럽에 있어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대로’ 사업을 운영하는 것은 더 이상 선택지가 아니다. 정책 결정자는 미국 기술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일관되고 전략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만약 이것이 비현실적으로 들린다면, 보잉에 맞서기 위해 유럽이 만든 에어버스(Airbus)의 사례를 떠올려 보라. 미국 기반 플랫폼에 대응하는 ‘AI 분야의 에어버스’, 즉 공적 자금으로 지원되며 상업적으로 운영되는 ‘대안 플랫폼’은 실현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
또한 최근 유럽의 공공 서비스와 민간 부문이 자국 정부와 관계 유지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미국 기술 기업 최고경영자(CEO)의 변덕에 얼마나 취약한지 드러났다. 일론 머스크가 유럽 정부와 스타링크 계약을 위반할 의사를 보인 일은 미국 플랫폼 신뢰성에 대한 우려를 더욱 키웠다.
다른 미국 기업이 무역 갈등을 이용해 ③ EU의 디지털 시장법(Digital Markets Act)이나 영국의 온라인 안전법(Online Safety Act)같은 유럽 규제를 저지하려 로비를 벌인 점도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트럼프 정부가 당장 내일 자국 우선 보호무역 정책을 철회한다고 해도 미국 기술 기업에 대한 신뢰성에는 여전히 의구심이 남아 있다. 중국 기술 플랫폼 역시 마찬가지로 문제가 많다. 이에 따라 유럽 정부 독자적인 디지털 및 AI 생태계를 구축해야 할 필요성은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정치인은 어렵거나 비용이 많이 드는, 하지만 필요한 결정을 내리는 일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조슈아 탄과 브랜든 잭슨 그리고 필자는 새로운 정책 브리핑을 통해 대규모 유럽형 AI 시스템 구축을 위한 공공·민간 상업 모델(파운데이션 모델)이 기술적·재정적으로 실현 가능하며, 신속하게 출시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럽의 여러 연구소와 기관은 이미 협력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통합된 제품 전략과 혁신에서 시장까지 이어지는 경로는 뚜렷하지 않다. 에어버스는 이에 대한 청사진이 될 수 있다. 이 회사는 1970년 유럽 각국 항공사가 분열된 상태로는 보잉과 경쟁할 수 없다는 인식 아래 설립됐다. 프랑스와 독일, 영국, 스페인은 최첨단 혁신 항공기를 개발하기 위해 전문성과 자원 그리고 자금을 모으는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에어버스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상업적 실현 가능성을 강조했다. 동시에 공적 자금 지원과 사전 구매 약정, 연구개발 투자, 기술 교육 같은 산업 정책 도구의 지원을 받았다. 또한 공급망 전문화를 통해 각 참여국에 혜택이 고르게 돌아가도록 함으로써 정치적인 요구도 해결했다.
이 프로젝트는 A300 개발을 통해 큰 돌파구를 마련했다. 과학 연구를 시장 수요에 부합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입증했다. 21세기형 AI를 개발하려면 이와 비슷한 규모의 인프라 투자와 지속적인 정치적 의지가 필요하다.
다행히 이러한 모델을 구축하기 위한 기반은 마련돼 있으며, 유럽의 일부 주요 국가가 신속히 이를 가동할 수 있다. 많은 국가가 이미 국가 차원의 공공 컴퓨팅 인프라에 투자하고 있으며, ④ LLMs4Europe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 선도적인 유럽 연구소는 AI 연구의 경계를 넓히는 최첨단 기반 모델을 잇달아 공개하기 시작했다.
필요한 규모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노력의 조율이 필요하다. 이는 납세자에게 가치를 창출할 뿐만 아니라, 유럽의 기술 기업이 지배적인 미국 기술 기업과 차별화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즉, 상업적으로 생존하기 위한 핵심 조건이다.
프랑스의 미스트랄(Mistral) 같은 민간 기업은 전략적으로 조율된 행동을 통해 유럽 내 강력한 시장을 형성하고 방어적 진입 장벽을 구축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비록 아직 대규모는 아니지만, 싱가포르도 효과적인 공공·민간 협력 모델 가능성을 입증했고, 일본과 미국의 반도체 산업에서도 유사한 성공 사례가 나타났다.
미국 기업이 선점 효과(first-mover advantage)를 누리고 있는 상황에서, 유럽의 모든 프로젝트는 상당한 공적 지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지원이 반드시 직접적인 자금 지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공공 컴퓨팅 자원에 대한 접근, 공익적 약속에 따른 세제 혜택, 미국 기업이 이용할 수 없는 정부 데이터세트에 대한 우선 접근권 그리고 공공기관 구매 약정 등의 형태로 지원이 이뤄질 수 있다.
시장 수요 역시 전략적 조치를 통해 더욱 촉진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부가가치 산업 응용 분야에 초점을 맞춘 EU의 ‘AI 챔피언스(AI Champions)' 이니셔티브는 유럽 컨소시엄이 필요한 기술을 공급할 준비를 갖추는 순간 강력한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의 AI에 대한 대안을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략적, 경제적으로 설득력 있다. 그러나 공공·민간이 함께 주도하는 유럽의 AI 이니셔티브는 단순히 산업 정책이나 안보 목표 달성에 그쳐서는 안 된다. 자체 AI를 개발하는 데 유럽 중견국의 문화와 가치를 반영해야 한다. 현재 미국에서 개발된 AI 모델은 점점 더 미국 중심적인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빠르게, 어쩌면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유럽과의 세계관과 멀어지고 있다. 이제 유럽 국가 스스로 길을 개척해야 할 때다.
Tip│
① 중국 스타트업 딥시크가 1월 20일 선보인 추론형 생성 AI. 중국의 토종 인력 중심 연구진이 독자적으로 개발했으며, 가성비가 뛰어나 출시 일주일 만에 미국의 앱 마켓에서 챗GPT를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이에 엔비디아 등 미국 기술주가 타격을 받아 나스닥 시총이 하루 동안 1조달러 증발했다. 특히 오픈소스로 이를 제공해 개도국을 중심으로 미국 AI 기술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것이라는 관측이 커졌다.
② 이탈리아 총리를 지낸 마리오 드라기 전 ECB 총재가 2024년 9월 펴낸 ‘EU의 미래 경쟁력 보고서’는 유럽이 미국과 중국에 비해 AI, 클라우드 컴퓨팅, 고성능 컴퓨팅(HPC) 등 디지털 인프라에서 뒤처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를 해결하려면 유럽이 기술적·정책적으로 디지털 역량을 강화하고 데이터 보안 및 암호화, 클라우드 서비스의 주권을 확보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또한 산업별 거대 언어 모델(LLM) 같은 AI 기술 개발을 통해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③ 디지털 시장법(Digital Markets Act)
EU가 디지털 시장의 공정하고 경쟁적인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제정한 법률. 2024년 3월 전면 시행됐다. 시장 지배력 남용 방지 등을 내걸고 있으며 구글, 애플, 메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의 빅테크가 주요 타깃이다.
④ LLMs4Europe
유럽의 70여 개 연구소 등 파트너사가 협력해 만들고 있는 개방적이고, 신뢰할 만하고, 다국적 언어를 쓰는 LLM. EU의 ‘디지털 유럽 프로그램’은 이 같은 AI을 비롯해 슈퍼 컴퓨팅, 사이버 보안, 선진 디지털 스킬, 디지털 기술의 광범위한 사용 확보 등 다섯 가지 영역의 프로젝트에 자금을 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