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14일 외환시장에서 1420원대에 주간 거래를 마친 원·달러 환율이 오후 늦게 하락세로 전환됐다. 블룸버그통신이 “한국과 미국 재정 당국 고위 관계자가 5월 초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환율 관련 실무 협의를 진행했다”고 보도한 직후였다. 미국이 무역 적자 해소를 위해 한국에 원화 가치 절상을 압박할 수 있다는 우려에 원·달러 환율은 야간 거래에서 장중 1390원대까지 밀렸다. 다만 미국 정부가 “이번 무역 협상에서 환율 의제를 포함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면서 원·달러 환율은 다시 1400원대로 반등했다.
공교롭게도 5월 초 대만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미국과 대만 당국이 관세 협상을개시한 직후 대만달러 가치가 급등한 것이다. 미국이 대만에도 통화 가치 절상을 유도했다는 루머가 확산하자 라이칭더(賴淸德) 대만 총통이 직접 ‘가짜 뉴스’라며 진화에 나섰다. 아시아 국가 사이에서 1985년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촉발한 ‘플라자 합의’가 재현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고개를 드는 모양새다.
세계적인 경제 석학 랜달 크로즈너(Ran-dall S. Kroszner) 미국 시카고대 부스경영대학원 경제학 교수는 “미국이 ‘제2의 플라자 합의’를 추진할 가능성은 작다”고 일축했다. 관세와 통상 문제에 대한 협상이 여전히 진행 중인 상황에서 환율을 둘러싼 다자 합의를 도출하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물론 협상 과정에서 ‘환율 조작국’ 지정 관련 기준을 두고 논의될 가능성은 배제하기 어렵다고 봤다.
크로즈너 교수는 조지 W. 부시 정부 시절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을 거쳐, 2006년부터 2009년까지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이사를 역임한 통화정책 전문가다. 다음은 일문일답.


미국의 동맹국 사이에선 스티븐 미란 백악관 CEA 위원장이 지난해 11월 작성한 이른바, ‘미란 보고서’에 대한 우려가 크다. 여기에는 미국이 안보 제공의 대가로 우방에 100년물 초장기 국채를 떠넘겨 재정 적자 부담을 완화하자는 내용도 담겨있는데.
“실현 가능성이 매우 작다. 미란 위원장은 해당 제안과 관련해 취임 이후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그는 이 제안에서 사실상 한발 물러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무역 적자 해소를 위해 다른 나라에 자국 통화 가치 절상을 압박할 수 있다는 점도 우려스럽다. 실제로 5월 초 대만달러 가치가 폭등하면서, 미국이 제2의 플라자 합의를 추진하는 것 아니냐는 루머가 돌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역시 현재로선 실현 가능성이 작다고 본다. 최근 대만달러 강세를 계기로 새로운 환율 협정이 추진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긴 했다. 하지만 관세와 통상 문제에 대한 협상이 여전히 진행 중인 상황에서, 환율을 둘러싼 다자 합의를 도출하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무역 적자 해소를 위해 달러 약세를 선호하지 않나.
“물론 트럼프 정부가 다른 국가의 통화 강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기조인 것은 분명하다. 미국 수출 경쟁력을 높이고 제조업을 보호하기 위한 전략이다. 그래서 향후 환율 조작국 지정과 관련된 것을 놓고 협상이 추가로 진행될 가능성은 있다. 그럼에도 당분간 플라자 합의 때와 유사한 형태의 다자간 통화 협정이 추진될 가능성은 작다고 본다.”
연준이 5월 7일(현지시각) 세 번째 통화정책 회의에서도 기준금리를 동결했다. 앞으로 기준 금리를 인하할 가능성은.
“연준은 어려운 선택에 직면해 있다. 경제는 둔화할 가능성이 높지만,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은 여전히 목표치인 2%를 완고하게웃돌고 있다. 관세는 일시적으로 측정된 인플레이션을 높일 수 있으며, 기업들이 관세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공급 차질은 올해 경제 성장률을 낮출 수 있다. 다행히 장기 기대 인플레이션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최근 설문조사 결과에서 단기 기대 인플레이션이 상당히 상승했다는 점이다. 현 시점에서 연준은 어떤 관세가 실제로 부과될지, 그리고 인플레이션이 계속 둔화될지를 지켜보는 ‘관망 모드’에 있다. 연준은 올해 기준금리를 대략 세 차례 인하하는 경로에 있다. 그러나 기대 인플레이션이 크게 상승하면, 연준은 금리 인하에 더 신중해질 것이다.”
그래서 연준이 기준금리 인하를 주저하는 건가.
“그렇다. 연준은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이후 인플레이션을 일시적이라 판단해 금리 인상을 늦췄던 전례가 있다. 이번에도 섣불리 일시적이라고 단정하고 금리를 인하할 경우, 정책 신뢰를 다시 잃을 수 있다. 다행히 최근 에너지 가격이 하락세를 보이는 점은 긍정적이다. 소비자는 휘발유 가격을 통해 물가를 체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에너지 가격 하락은 단기 기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준금리 인하를 기대하는 분위기다. 최근에도 통화정책 회의 직후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금리 인하를 압박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연준은 늘 비판의 대상이었다. 어찌 보면 비판받기 위해 만들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 중앙은행 총재는 ‘코끼리 가죽 같은 두꺼운 피부’를 가져야 한다. 경기가 좋을 땐 아무도 공을 인정하지 않지만, 상황이 나빠지면 모든 비난이 쏟아진다. 분명한 사실은 팬데믹 이후 인플레이션이 심화하는 과정에서 연준을 포함한 세계 주요 중앙은행의 대응이 지나치게 늦었다는 점이다. 인플레이션을 오랫동안 일시적인 현상으로 오판한 결과다. 이런 전례 탓에 연준은 지금 금리 인하에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다. 자칫 성급하게 통화정책을 완화하면, 정책에 대한 신뢰에 다시금 흠집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이 무역 협상에 일시적으로 합의하긴 했으나, 다시 갈등이 고조될 경우 중국이 미국 국채를 대량 매각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인가.
“중국이 미국 국채를 대량 매각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본다. 이미 수년 전부터 미국 국채의 순 매입을 중단했으며, 보유 자산을 서서히 축소하는 방식에 만족하는 듯하다.”
만약 매각한다면 경제에 어떤 타격을 줄까.
“설령 중국이 미국 국채를 대규모로 매각한다 해도, 시장은 이를 즉각 감지해 국채 가격이 급락하고, 결과적으로 중국이 손해를 볼 가능성이 크다. 조용히 실행하기도 어려운 조치다. 그럴 가능성은 극히 작지만, 만약 아주 예외적인 상황에서 실제 매각이 이뤄진다면, 단기적으로는 미국 국채 금리가 상승하고(가격 하락), 달러 가치도 하락할 수 있다. 장기적 영향은 매각이 어떤 맥락에서 이뤄지느냐에 달려 있다. 가령 지정학적 충돌을 염두에 둔 전략적 조치일 경우, 금융시장에 미치는 파장은 훨씬 더 클 수 있다.”
한국은행은 금리 인하로 경기를 부양할지, 금리 동결로 원화 추가 약세를 막을지 고민이 깊다. 전 연준 이사로서 조언을 준다면.
“한국은행은 매우 어려운 선택을 앞두고있다. 금리를 낮추면 경기 부양엔 도움이 되겠지만, 동시에 원화 가치는 더 하락할 수 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금리를 조정하는 통화정책보다 정부가 신뢰를 회복하고 경제 안정을 제공하는 일이다. 그게 투자 유치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 현재로선 금리를 조금 낮춘다고 기업 투자가 많이 늘어날 가능성은 작다. 정부가 국제 신뢰를 회복하고 경제 안정성을 확립하는 게 시급하다.”
미란 보고서
스티븐 미란 CEA 위원장이 지난해 11월 투자회사 허드슨베이캐피털 수석 전략가로 있을 때 작성한 41쪽짜리 ‘글로벌 무역 시스템 재구성 사용자 가이드’라는 보고서. 미국의 무역·재정 적자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담겼는데, 그 일환으로 달러 약세를 유도하는 동시에 교역 상대국이 보유한 미 국채를 100년 만기 초장기채와 교환하자는 구상 등이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