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일은 좀 빨라지겠네.” “보고서 작성 시간은 절반으로 줄겠어.”
생성 AI(Generative AI)를 처음 도입한 조직에서 자주 들리는 말이다. 문서 요약, 기획안 정리, 코드 생성까지 몇 번의 프롬프트만 입력하면 결과물이 순식간에 나오고, 이를 통해 반복 작업에서 해방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시간을 절약한 실무자가 “이제 좀 여유롭다”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할 일은 더 많아졌다”는 반응이 잦다. 필자가 기업 교육 현장에서 만난 한 중간 관리자는 “챗GPT(오픈AI의 채팅형 AI)로 보고서를 더 빨리 쓰게 됐는데,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다. 더 많은 버전을 요구받고, 검토도 더 오래 걸린다. 결국 시간은 줄었는데 일은 더 많아졌다”고 말했다.
인공지능(AI)의 사용으로 시간은 절약했지만, 체감은 어렵다. 단순한 개인의 느낌일지, 정말 그런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사벨 엥겔러 스위스 로잔대 경영학부 부교수 등 연구에 따르면, 업무에 AI를 활용해 시간을 줄인 경험이 있는 관리자 37%는 자신이 얼마나 시간을 절약했는지 인식하지 못했고, 또 38%는 절약한 시간의 절반 이상을 비생산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AI 사용으로 업무 시간은 줄었지만, 절약한 시간이 낭비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AI를 업무 효율성을 높일 단순 도구로 사용할 문제가 아닌, 시간을 어떻게 설계하는지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실제 현장 사례는 이런 AI 사용 문제를 더선명하게 나타낸다. 한 유통 대기업 실무자는 ‘앱시트(프로그래밍 지식 없이도 앱을 만들 수 있는 무코드 플랫폼)’를 활용해 현장 판매 데이터를 자동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된 뒤, 하루 평균 업무 시간을 약 두 시간 절약하게 됐다. 그러나 두 시간의 시간이 막상 생기니 그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전했다. 그는 “그냥 회의 준비를 좀 더 꼼꼼히 하거나 원래 하던 반복 작업을 더 하게 됐다”고 말했다. 절약한 시간을 어떻게 쓸지에 대한 방향성이 없었고, 결국 시간은 기존 루틴(습관)에 다시 흡수됐다.
또 다른 사례로 한 중견 제조 기업의 책임급 직원은 “챗GPT 덕분에 생산 계획 보고서 작성 시간을 기존에 비해 40% 줄였지만, 줄인 시간만큼 더 많은 자료를 요구받거나 다른 버전의 보고서를 작성했다”라고 했다. 오히려 업무량은 줄지 않았고 기대 수준도 높아졌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절약한 시간이 체감되지 않았으며, 일이 더 많아진 느낌까지 받았다고 한다. 조직 구성원에게 피로를 유발할 뿐 아니라, AI 활용의 효과성에 대한 회의를 키운 사례로 여겨진다.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경영학 잡지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는 이런 상황을 세 가지 함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시간 절약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둘째, 절약된 시간을 어디에 쓸지 계획하지 않는 것, 셋째, 그 활용을 도와줄 리더십이 부재한 것 등이다.
AI는 업무 시간을 줄여 줄 수 있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새로이 채울지 몰라 방황하게 되면, 절약한 시간은 금세 낭비로 바뀌고, 조직은 또다시 소모적인 일로 시간을 채우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직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시간을 재설계하기 위한 세 가지 제안
AI 사용에 따른 시간 재설계에는 세 가지 방향이 필요하다. 첫 번째 제안은 ‘시간을 보이게 만들라’는 것이다. 많은 구성원은 AI가 시간을 절약하게 해줬다는 사실조차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실제 필자가 만난 교육생 중 다수는 “업무가 빨라진 느낌은 있지만, 얼마나 줄었는지는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팀 단위로 AI 도입 전후의 시간을 시각화해 보여주자, 교육생은 ‘분명히 바뀐 것이 있구나’를 눈으로 확인하고 실감했다. ‘HBR’의 2023년 기사에 따르면, 절약한 시간이 실제 얼마인지를 알려주는 시각화 도구가 없다면 AI 도입 효과는 단기 기억에 머문다. 사람은 ‘효율성’이라는 추상적 표현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 제안은 ‘시간 활용법을 함께 제시하라’다. 단순히 시간이 생긴다고 해서 그 시간을 누구나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아니다.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세일러와 캐스 선스타인은 공동 저서인 ‘넛지’에서 “사람들은 자유로운 선택보다 구조화된 선택지를 더 선호한다”고 말했다. AI 활용도 예외는 아니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 맥킨지의 2023년 보고서에 따르면, AI 도입 이후 ‘작업 단위별 활용 방안’을 명확하게 제시한 조직일수록 AI 도입률과 직원 만족도가 높았다. IGM이 운영한 기업 교육 과정에서도 유사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고객 불만 분석’ ‘자동화 아이디어 제출’ ‘챗GPT 팁 공유’ 등 구체적인 활용 방안을 제시한 팀이 더 높은 성과를 냈다. AI를 통해 확보한 여유 시간을 실질 성과로 바꾸려면, 그 시간을 어떻게 쓸지에 대한 명확한 ‘메뉴판’이 함께 제시돼야 한다.
세 번째 제안은 ‘절약한 시간을 공동 학습의 시간으로 구조화하라’다. 많은 관리자는 “알아서 (AI를) 잘 쓰고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구성원이 아낀 시간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시간을 절약하라고 지시해 놓고, 그 시간이 어떻게 사용되는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이는 아무 일도 이뤄내지 못한 것과 같다. 지난 3월 ‘HBR’ 보도에 따르면, 한 글로벌 AI 기업 데이터 책임자는 “AI 덕분에 시간이 생긴 만큼, 그 시간에 무엇을 할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실제 절약한 시간이 성과로 이어지려면 그 시간을 그냥 흐르도록 두지 않고 ‘학습과 확산의 시간’으로 구조화하는 리더십의 개입이 필요하다.
필자와 프로젝트를 진행한 한 금융기관은 생성 AI 도입으로 확보한 여유 시간을 개인에게 맡기지 않고, 회의 중에 ‘AI 실험 공유’ 시간을 정례화해 시간을 구조화했다. 매주 팀원이 돌아가며 ‘AI 덕분에 달라진 한 가지’ 를 공유하고, 그 시간을 자연스럽게 실험과 학습의 계기로 활용했다.
이런 기반 위에서라야 비로소 ‘절약된 시간-새로운 시도-성과’라는 선순환이 만들어질 수 있다.
시간을 설계하는 데 가장 중요한 변수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이고, 특히 리더다. 기술은 시간을 비워주지만, 비워진 공간을 채우는 건 결국 사람이다. AI는 작업 속도를 줄여주고, 반복 업무를 덜어준다. 그러나 줄인 시간은 스스로 흐름을 갖지 않는다.
보고서를 빠르게 끝낸 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절약된 시간은 곧 조직의 성장 가능성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는 건 사람의 선택과 설계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