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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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사는 지인이 딸을 유치원에 입학시키러 갔다가 겪은 일이다. 딸아이를 데리고 가서 선생님에게 인사도 하고 입학 서류도 작성했다. 대화를 나누던 원장님이 갑자기 “아이를 he(그)로 부를까요, she(그녀)로 부를까요?” 하고 물었다. 딸이라고 말했음에도 미국에서는 성 정체성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권고하고 있기 때문에 확인한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아이가 어릴 때부터 젠더(성별)와 관련한 판단 기준이 모호해질까 봐 걱정이 들었단다. 고민하던 지인은 결국 보수 기독교 재단이 운영하는 비싼 사립 유치원에 보냈다.

2024년 7월 13일(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 후보가 펜실베이니아주 유세 도중 총격을 당했다. 다행히 총알이 후보의 귓등을 스치고 지나가 약간의 출혈은 있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이 사건으로 당시 비밀경호국 국장이던 킴벌리 치틀(Kimberly Cheatle)에게 부적격 논란이 제기되고, 정부의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정책이 비판을 받았다. 보수 인사들은 그녀가 자격 부족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고위직에 올랐다고 공격했고, 결국 치틀 국장은 사임했다.

2025년 초, 로스앤젤레스 대형 산불 대응에서도 DEI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보수 언론과 정치인들은 화재 진압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피해가 커진 이유 중 하나로 여성 대원 증가로 인한 체력 부족 문제를 제기했다. 다양성 비중을 높이려고 여성 대원 고용을 확대한 소방 당국의 정책이 비판을 받았다. 불을 끄고 사람을 살리는 데 여성과 남성의 비율이 왜 기준이 되어야 하느냐는 주장에 많은 시민이 동조하고 나섰다.

이러한 사례는 보수 진영에서 DEI 정책이 공공 안전과 효율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DEI는 그간 사회적 약자에 대한 기회를 넓히고 조직 내 포용 문화를 조성하는 데 기여해 왔다. 뿐만 아니라 조직의 혁신과 생산성 향상에도 기여하는 것으로 평가되어 기업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평가에 반영되는 것이 세계적 추세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미국 내 보수층이 이 정책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보수층의 정치적 대변자로 나서면서 ‘문화 전쟁(culture war)’으로 확산하는 양상이다. 

보수층이 DEI 정책에 대해 느끼는 반감은 문화적 가치관 충돌과 공정성에 대한 인식 차이에 근거한다. 보수층에서는 DEI 정책이 제도적으로 도입되면서 자발적인 다양성과 포용을 넘어서 편향된 이념의 강요, 사회적 갈등 조장, 표현의 자유 제한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를 제기한다. 이러한 인식은 트럼프 정부의 정책에 대한 강력한 지지로 연결되고 있다. 

윤덕룡 경기도 일자리재단 대표이사
윤덕룡 경기도 일자리재단 대표이사

트럼프는 지지층의 요구에 따라 문화 전쟁을 단순한 구호가 아닌 정책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그는 취임 첫날부터 DEI 정책 폐지를 명시한 행정명령 14151호에 서명해 연방정부 내 DEI 프로그램 종료와 인력 정리를 지시했다. 이어 행정명령 14168호에서는 성별을 생물학적 이분법으로 정의하고 트랜스젠더 권리를 제한했으며, 행정명령 14190호에서는 학교 내 비판적 인종 이론과 성 정체성 교육을 금지했다.

트럼프는 ‘문화 전쟁’을 실제 정책과 행정명령을 통해 구현하는 중이다. 그는 이를 ‘상식의 혁명’으로 명명하며, 진보적 가치와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반대를 선언했다. 이는 미국 사회의 가치와 제도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려는 시도로 평가되고 있다. 미국을 이해하려면 트럼프의 문화 전쟁이 가지는 의미를 직시해야 한다. 

윤덕룡 경기도 일자리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