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료수 자판기에 코카콜라, 환타처럼 입맛 까다롭지 않은 범대중의 동전을 끌어당길 만한 메뉴가 중심인 것처럼. 주크박스 뮤지컬의 전략도 비슷하다. 귀에 익은 히트곡을 뮤지컬로 엮어서 딱히 ‘뮤지컬 마니아’가 아니어도 ‘아는 노래의 아는 맛’에 이끌려 찾게 한다.
아바의 히트곡을 엮어 만든 뮤지컬 ‘맘마 미아!’의 한 장면./ 현대홈쇼핑
아바의 히트곡을 엮어 만든 뮤지컬 ‘맘마 미아!’의 한 장면./ 현대홈쇼핑

‘주크박스 뮤지컬’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대략 1990년대쯤이다. 주크박스와 뮤지컬을 붙여놓은 말. 주크박스는 (주로 미국에서) 노래 자판기를 뜻한다. 레스토랑이나 바에서 동전 몇 개를 집어넣고 듣고 싶은 노래를 고르면 재생해 주는 기계. 주크박스에 전면 배치된 노래는 대개 남녀노소 좋아하는 대중적 히트곡이다. 음료수 자판기에 코카콜라, 환타처럼 입맛 까다롭지 않은 범대중의 동전을 끌어당길 만한 메뉴가 중심인 것처럼. 주크박스 뮤지컬의 전략도 비슷하다. 귀에 익은 히트곡을 뮤지컬로 엮어서 딱히 ‘뮤지컬 마니아’가 아니어도 ‘아는 노래의 아는 맛’에 이끌려 찾게 한다.

1999년 첫선을 보인 뮤지컬 ‘맘마 미아!’는 초연 후 사반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주크박스 뮤지컬의 대명사다. 스웨덴이 낳은 불세출의 팝 그룹 아바(ABBA)의 히트곡을 엮었다. 아바는 ‘유명한 곡으로 유명하다’. 각종 잡지나 평단이 꼽는 명반 리스트에 그들의 정규 앨범이 오르는 일은 극히 드물지만, 히트곡 모음집인 ‘ABBA Gold’만은 말 그대로 팝 음악사의 ‘금’자탑으로 자리매김했다. 1000만 장 이상 팔려나갔다. 아바의 1집, 3집은 들어본 사람 없어도 아바 베스트는 웬만하면 다들 들어보지 않았나. 몇 년 전 스웨덴 스톡홀름에 갔을 때, 아바 박물관의 중심 전시관에서 저 ‘ABBA Gold’의 금장 카세트가 진열된 것도 봤다.

빌리 조엘의 히트곡을 엮어 만든 뮤지컬 ‘무빙 아웃’의 한 장면./ 플레이빌
빌리 조엘의 히트곡을 엮어 만든 뮤지컬 ‘무빙 아웃’의 한 장면./ 플레이빌

‘Dancing Queen’ ‘Mamma Mia’ ‘Super Trouper’ ‘The Winner Takes It All’ ‘SOS’ ‘Waterloo’⋯. 최근 막을 내려 화제가 된 유럽의 메가톤급 노래 국가 대항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1974년 ‘Waterloo’로 우승한 이래 저 혼성 4인조는 황금 같은 히트곡을 차곡차곡 쌓아간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디스코 광풍이 몰고온 ‘백래시’인 디스코 혐오 경향이 음악계를 덮치면서 아바의 반짝이의상과 반짝이는 멜로디는 음악 팬 사이에 대표적인 ‘길티 플레저’가 돼버렸다.

길티를 빼고 플레저만 남긴 것이 바로 뮤지컬 ‘맘마 미아!’다. 1980년대풍의 반짝이는 의상 대신 배경을 미풍 부는 그리스 지중해의 한 섬으로 옮겼고, 세 명의 계부 후보와 모녀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 요절복통 감성 스토리로 완전히 탈바꿈시킨 것이다. 아바의 히트곡은 적재적소에 꽂혀 스토리에 들기름을 쳤고, 멜로디의 금가루를 공연장 가득 뿌려댔다. 

2001년 브로드웨이에 진출했고 2008년에는 영화로 만들어져 또 한 번 메가히트를 기록했다. 뮤지컬 버전만 해도 지금껏 세계적으로 1000만 장 가까운 입장권을 팔았고 수익은 40억달러(약 5조5000억원)를 훌쩍 넘은 것으로 추산된다. 국내에서는 2004년 처음 무대에 올라 230만 관객을 모았다. 올해도 7월부터 10월까지, 2년 만에 상연되는데 ‘이게 웬 곰탕이냐’ 할 게 아니다. 최정원, 송일국 등 스타 출연진에 공연장도 LG아트센터 서울을 잡았다.

주크박스 뮤지컬의 핵심은 노래다. 대개 한 가수, 한 그룹의 히트곡을 줄 세운다. 더 후의 ‘토미’, 퀸의 ‘위 윌 록 유’, 비치 보이스의 ‘굿 바이브레이션스’ 등등. 한 시대나 비슷한 조류의 아티스트 여럿의 히트곡을 뭉뚱그려 품는 경우도 있다. 2006년 ‘록 오브 에이지스’ 는 1980년대 글램 메탈을 위주로 곡목을 짰다. 당대의 밴드 본 조비, 화이트스네이크, 나이트 레인저, 트위스티드 시스터 등의 곡이다. 몇 년 전 뉴욕에서 ‘직관’한 적 있는데, 야구장처럼 객석에서 캔맥주를 팔고 중장년층이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서서 ‘떼창’하는 풍경이 웬만한 록 콘서트 못잖은 에너지로 공연장 안팎을 휘감았다.

임희윤 문화평론가 - 현 한국대중 음악상 선정위원, ‘예술기: 예술과 기술을 이야기하는 8인의 유니버스’ ‘한국 대중 음악 명반 100(공저)’ 저자
임희윤 문화평론가 - 현 한국대중 음악상 선정위원, ‘예술기: 예술과 기술을 이야기하는 8인의 유니버스’ ‘한국 대중 음악 명반 100(공저)’ 저자

김광석, 이문세 히트곡도 뮤지컬로

국내에서도 시도됐다. 고 김광석의 노래로 꾸민 ‘그날들’,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가 대표적이다. ‘광화문 연가’는 조용한 스테디셀러로 남았다. 앞서서 핵심은 노래라고 했던가. 하지만 노래가 주옥같다고 능사는 아니다. 서태지의 곡을 앞세운 ‘페스트’는 서태지의 두꺼운 팬덤과 한때 문화 대통령이라고까지 불렸던 아이콘적 위상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했다. 조용필 뮤지컬은 아직도 이뤄지지 못한, 한국 주크박스 뮤지컬계의 ‘미답의 성배’다. 조용필의 수많은 히트곡을 기막힌 스토리로 꿰어낸 수백 편의 각본이 조용필 측에 답지했지만, 조용필 본인이 맘에 쏙 드는 대본이 없어 여전히 ‘미결’ 상태다.

그러고 보면 핵심은 노래지만 관건은 대본이다. 아바의 주크박스 뮤지컬도 이미 1983년 한 차례 ‘아바카다브라’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진 바 있지만 기억되지 못하고 거의 사장됐다. 아직 ‘맘마 미아!’를 이기는 주크박스 뮤지컬은 세계적으로도 나오지 않았다. 반의반도 따라가기에 벅차다. 

‘맘마 미아!’ 성공 이후 뉴 밀레니엄 무대는 주크박스의 격전장으로 화했다. 빌리 조엘의 ‘무빙 아웃(2002년)’, 존 레넌의 ‘레넌(2005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올 슉 업(2005년)’, 조니 캐시의 ‘링 오브 파이어(2006년)’, 밥 딜런의 ‘더 타임스 데이 아 어체인징(2006년)’ 이 잇달아 출격했지만, 화려한 면면, 뭉클한선곡 리스트와 별개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데는 실패했다.

이제 주크박스 뮤지컬 시장은 거의 포화 상태다. 웬만한 팝스타의 주크박스 뮤지컬은 거의 만들어졌다. 그 형태도 다양하다.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 이후 최고의 히트 메이커라 불리는 스웨덴 출신 팝 프로듀서 맥스 마틴도 ‘앤드 줄리엣’이라는 주크박스 뮤지컬을 2019년 내놨다. 브리트니 스피어스, 케이티 페리, 아리아나 그란데, 저스틴 팀버레이크, 셀린 디옹의 히트곡이 교차하는 노래의 호화 캐스팅이다. ‘물랑 루즈’처럼 영화(2001년)가 먼저 나오고 뮤지컬(2008년)이 나중에 나온 사례도 있다.

작품성이나 흥행과는 상관없이 대부분 주크박스 뮤지컬의 감성적 성패는 ‘노래의 팬’에게 얼마나 와닿느냐에 달려 있다. 퀸의 ‘위 윌 록 유’는 다소 황당한 SF 오페라지만 천문학자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와 괴짜 로커인 퀸이 상상했을 법한 세계관이라 팬 입장에서는 즐거웠다. 그린데이의 ‘아메리칸 이디엇’에서는 세 친구의 엇갈린 상황과 걸프전 참전 후 다리 절단 수술을 받는 터니의 절규를 한 무대에서 교차 편집해 낸 ‘Give Me Novacane’의 잔상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노래가 가진 슈퍼파워 위에 새로운 스토리, 새로운 심상을 얹어내는 마법. 이것이야말로 시장 논리를 넘어 주크박스 뮤지컬이 대중음악의 본질인 감성으로 승리하는 길이자 존재 이유가 아니겠는가.

임희윤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