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1884~1920). 그의 이름 앞에는 늘 따라붙는 이미지가 있다. 긴 타원형 얼굴, 우아하게 늘어진 목, 눈동자 없는 시선. 우리는 그가 그린 많은 여성의 얼굴에서 이상하리만치 비슷한 인상을 받는다. 왜 그는 이런 이미지의 여성을 많이 그렸을까? 언뜻 보기에는 모딜리아니 그림은 단순한 ‘스타일’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스타일이 아니다. 그 안에는 시대를 초월한 영혼의 탐색, 고독한 예술가의 시선 그리고 분명한 그만의 미적 선언이 담겨 있다.
조각에서 시작된 조형 언어
1884년 이탈리아 리보르노에서 태어난 모딜리아니는 어린 시절부터 병약한 체질이었다. 14세에 병으로 학교를 중단했고, 17세에는 결핵 진단을 받으며 평생 건강과 싸워야 했다. 이러한 신체적 제약에도 예술에 대한 그의 열망과 재능은 결국 그를 예술가의 길로 인도했다.
1906년 파리에 도착한 그는 조각에 몰두하며 본격적인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이 바로 ‘두상(Tête· 1910~12)’이다. 석회암으로 제작된 이 조각은 약 65㎝ 높이로, 길게 뻗은 목과 감긴 눈, 마스크 같은 얼굴이 특징이다. 이는 실제 인물이라기보다는 이상화된 존재에 가까운데 모딜리아니는 외형이 아닌 인간 정신의 본질을 형상화하고자 했다. 추상 조각의 혁신가인 콩스탕탱 브랑쿠시의 대리석 조각에서 영향받았지만, 그는 조금 더 부드러운 석회암을 자주 사용했다. 이 작품의 우아한 윤곽과 추상적 형태는 브랑쿠시의 미학뿐 아니라 고대 이집트 흉상의 형식미와도 닮아 있다. 특히 두상에 나타난 길쭉한 목, 뾰족한 코, 틈처럼 가늘게 그어진 눈은 모딜리아니가 이후 초상화와 누드에서도 반복해서 사용한 형식적 특성이다. 이는 조각과 회화 사이 긴밀한 연관성을 보여주며, 그의 예술 세계의 일관성을 입증한다. ‘두상’은 2010년 파리 크리스티 경매에서 4320만유로(약 675억원)에 낙찰되며 주목받았다.
그러나 지병인 결핵으로 인해 무거운 돌을 다루는 조각 작업을 지속하지 못했다. 경제난까지 겹치면서 그는 조각을 중단하고 회화로 전환했다. 이후의 회화 작품에 조각의 조형 실험과 형식미가 지속적으로 반영됐는데, 그것이 바로 모딜리아니 회화의 독창성과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가 됐다.

눈동자를 그리지 못한 이유
회화로 전환한 이후에도 모딜리아니는 일관되게 인물의 얼굴을 중심으로 작업을 이어갔다. 그의 회화는 조각처럼 느껴지는 독특한 형식을 띤다. 인물의 목은 지나치게 길고, 눈동자는 자주 생략됐으며, 표정은 고요하고 침묵에 잠겨 있다. 그는 이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의 영혼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눈동자를 그릴 수 없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금발의 누드(Blonde nude·1917)’는 감미롭고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모딜리아니는 폴란드 출신의 미술상과 인연을 맺게 됐고, 그의 후원으로 1917년 파리의 작은 갤러리(Berthe Weill Gallery)에서 최초이자 유일한 개인전을 열었다. 이 작품은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유사한 구도를 취하고 있다. 흘러내리는 금색의 머리카락, 약간 기울어진 머리와 자세 등에서 고전적 요소가 암시되지만, 모딜리아니는 이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가 머리카락으로 신체 일부를 가리고 수줍은 미소를 띠고 있는 반면, 모딜리아니의 ‘금발의 누드’는 주요 부위를 드러낸 채 정면을 응시하며 도발적인 모습을 보낸다. 전시는 뜻밖의 논란에 휘말렸다. 붐비는 군중을 수상히 여긴 경찰이 전시장 안을 보고 전시회가 외설적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전시는 중단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은 모딜리아니를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됐다. 예상치 못한 스캔들이 오히려 그의 이름을 널리 알렸고, 그에게는 예술가로서 활력을 되찾는 전환점이 됐다. 비난과 갈채가 교차하는 가운데, 모딜리아니는 더욱 깊이 있는 내면 탐구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마침내 눈동자를 그리다
1917년, 모딜리아니는 잔 에뷔테른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당시 19세였던 그녀는 모딜리아니보다 열네 살이나 어렸다. 처음에는 미술 학도로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가 그의 뮤즈이자, 아내가 됐다. 모딜리아니 친구들은 헌신적인 그녀가 모딜리아니의 무절제한 생활을 잡아주길 바랐지만, 그녀는 모딜리아니를 존중하며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다. 작품에도 그러한 느낌이 반영돼 있다. 그녀를 모델로 한 작품에는 이전과 다른 고요함과 평온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특히 1919년에 그린 ‘잔 에뷔테른의 초상’ 은 작가의 감정과 형식이 가장 밀도 높게 응축된 작품이다. 이 초상은 모딜리아니 회화에서 보기 드문 완전한 정면 구도로 구성돼 있으며, 정면을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화면 속 배경은 좌우가 확연히 구분돼 있다. 왼쪽은 차분한 푸른색, 오른쪽은 따뜻한 붉은색으로 처리돼 있는데, 이 대비 속에 자리한 그녀의 얼굴은 세속과 성스러움, 생과 죽음 사이의 상징적 균형을 이룬다. 특히 이 그림에서는 뚜렷한 눈동자가 묘사됐는데, 이는 모딜리아니가 그녀의 영혼을 마주했다고 느꼈음을 그리고 그녀에 대한 믿음과 애정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1918년, 두 사람 사이에 딸이 태어났고, 모딜리아니는 딸에게 어머니 잔의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결핵은 그의 몸을 결국 무너뜨렸고, 1920년 35세의 나이로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전해 들은 그녀는 이틀 후, 둘째를 임신한 채 스스로 투신해 생을 마감했다. 겨우 21세였다.

우아한 긴 목과 내면의 고요
모딜리아니의 ‘긴 목’은 단순한 양식적 특징이 아니다. 그것은 우아함과 고요함을 상징하며, 영혼을 향한 통로처럼 기능한다. 모딜리아니는 생전에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나 사후에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특정한 예술운동에 소속되진 않았지만, 입체주의적 조형 감각과 아프리카 마스크 같은 비서구적인 형식미를 결합한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했다. 그의 여성 초상과 누드는 긴 목으로 특징되는 형식과 심리적 통찰로 기존 장르의 틀을 뛰어넘었고, 이후 많은 작가에게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들의 유일한 딸인 잔은 아버지 모딜리아니의 전기를 쓰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 모딜리아니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목이 긴 여성을 통해 인간 내면의 본질과 영혼의 침묵을 영원히 예술로 남겼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노천명의 시구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