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발적이고 순간적인 힘을 전달하는 전기동력계의 영향력이 고성능 차 시장에서도 각광받고 있다. 현대차·테슬라·샤오미 등이 고성능 전기차 시장에 뛰어든 가운데, 스포츠카 명가 포르셰가 이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전기차가 고성능을 내는 데 가장 핵심이 되는 건 배터리 기술이다. 전기차 배터리는 단순 에너지원이 아닌, 주행 성능, 차량 구조, 안전성, 충전 효율성, 지속 가능성 등에 영향을 미친다. 전기차 시대에도 ‘가장 뛰어난 스포츠카’를 만들겠다는 포르셰는 특유의 역동성과 주행 감각을 전기차에 구현하려고 한다. 배터리를 여러 부품 중 하나로 보는 게 아니라 브랜드 철학을 완성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5월 21일(현지시각) 독일 남서부 슈투트가르트에서 서쪽으로 약 25㎞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 바이작(Weissach)의 포르셰 연구개발(R&D)센터에서 ‘포르셰 전기차 글로벌 워크숍’이 열렸다. 포르셰 바이작 R&D센터는 1971년 설립됐으며, 현재 약 6000명의 기술자가 일하고 있다. 자체 테스트 트랙과 풍동센터 등을 갖춘 포르셰 기술의 총아다. 고성능, 고속 충전, 안전으로 대표되는 포르셰의 배터리 철학을 실천하는 현장이다.

배터리 개발, 시스템 균형 중시
포르셰는 고성능 전기차를 위해 고출력, 고에너지밀도, 열관리, 경량화 충전 속도 등 여러 핵심 요소를 정교하게 통합한 배터리 기술을 설계했다. 포르셰 배터리 기술 개발 총괄 마티아스 골드쉐(Matthias Goldsche) 박사는 “배터리는 고객 경험을 좌우하는 핵심”이라며 “주행 역학, 충전 시간, 무게, 내구성 등 다양한 요소를 조화롭게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타이칸을 비롯한 포르셰 전기차에는 800V(볼트) 고전압 시스템이 들어간다. 일반적인 대중 전기차가 400V 시스템인 것에 비해 두 배 높은데, 고전압 시스템은 고출력 모터 구동에 적합하다. 고전압 시스템 장착으로 타이칸 터보GT는 최고 1108마력(오버부스트 작동 시)의 출력을 낸다. 현존 전기차 중 최고 수준이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걸리는 시간은 2.3초, 시속 200㎞까지는 6.6초 걸린다.
배터리는 삼원계(NCM·니켈, 코발트, 망간) 리튬이온 셀을 사용한다. 이 역시 고에너지밀도와 고출력을 동시 구현해 높은 가속력과 긴 주행거리에 기여한다. 벤저민 파센베르크(Benjamin Passenberg) 포르셰 배터리 시스템 셀·제어 총괄은 “기존 리튬인산철(LFP) 대비 높은 에너지밀도를 확보하고, 스포츠카 주행 특성에 맞는 출력을 낼 수 있는 형태”라며 “NCM 배터리가 현재 포르셰에 가장 적합한 해법”이라고 했다.
배터리 고속 충전에 역할을 하는 건 소재다. 포르셰는 배터리 음극재로 실리콘을 사용한다. 음극재는 리튬이온을 저장했다가 방출하면서 전류를 흐르게 하는 소재로, 주행거리와 충전 속도를 결정한다. 실리콘 음극재는 단위 무게당 용량이 흑연 음극재보다 약 10배 높아, 같은 부피에서 더 많은 전력을 저장하므로 주행거리가 길고, 리튬이온이 빠르게 확산해 고속 충전에 유리하다. 다만 충· 방전 시 리튬이온이 팽창하는 스웰링(swell-ing) 현상이 흑연에 비해 심하다. 파센베르크 총괄은 “충전 성능 개선을 위해 실리콘 음극재를 사용했다”라며 “셀 내 바인더(틀) 구성, 열 제어 시스템, 전류 분산 설계 등으로 구조 안전성을 확보했다”고 했다. 포르셰는 이런 배터리 개발과 생산을 LG에너지솔루션 및 중국 CATL(닝더스다이)과 협업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타이칸에, CATL은 마칸에 배터리를 공급한다.
최고 수준의 안전 추구
포르셰가 설정한 배터리 안전 기준은 업계 최고 수준이다. 고전압 시스템의 경우 15년, 30만㎞를 기준으로 내구성을 보장한다. 바이작 R&D센터는 고전압 복합 시험 장치(HVV·High Voltage Validation)라는 통합 시스템을 통해 배터리를 검증한다. 실제 주행을 가정해 충·방전, 열 스트레스, 전압 불균형 등을 24시간 측정한다. 배터리 하나에 사용되는 센서만 100개에 달한다.
오트마 비체(Otmar Bitsche) 포르셰 배터리 개발 수석 고문은 “포르셰는 고전압 배터리의 통합 시스템 방식으로 시험하는 최초의 자동차 제조사”라며 “통합 테스트는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고, 모든 기능과 고장에 대해 신뢰성 높고, 재현 가능한 결과를 얻게 해준다”라고 했다.
포르셰 배터리는 33개 모듈, 396개 셀로 구성돼, 부하 분산이 효율적이다. 액체 냉각 시스템을 포함해 고속 주행 시에도 과열을 방지하고, 모듈 단위로 온도를 조절한다. 파센베르크 총괄은 “셀 내부 열이 급격히 상승하면 열 폭주로 이어진다. 이를 막기 위한 냉각 경로 최적화가 중요하다”라고 했다.
배터리가 강한 외부 충격을 받으면 배터리 셀 내부 구조가 깨지고, 열 폭주가 나타날 수 있다. 전기차 충돌 사고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는 이유다. 바이작 R&D센터는 전기차 충돌 사고에 대비하는 충돌 시험 센터도 두고 있다. 배터리를 단순 에너지 저장 장치가 아닌, 자동차 구조의 일부로 여겨 충돌 시험도 그런 관점으로 진행한다. 골드쉐 총괄은 “배터리도 차체 강성 설계의 일부로 보고, 충돌 시 셀 손상 가능성을 줄이고 전기적 사고를 사전 차단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 충돌 실험은 시속 64㎞ 정면충돌, 32㎞ 측면 충돌 등 다양한 상황과 속도로 이뤄진다. 여러 충돌 조건에서 배터리 팩의 구조적 손상은 없는지, 전해질 누출이나 화재 발생 가능성은 없는지 등을 살펴본다. 배터리 바닥이 도로의 돌이나 턱 등과 접촉하거나 전복 등의 상황도 가정한다.
포르셰는 지속 가능한 배터리 순환 경제를 추구한다. 이를 위해 배터리 재활용 기술이 있는 독일 스타트업 사일립(Cylib)에 전략적 투자를 단행했다. 향후 협력을 통해 배터리 핵심 소재를 회수하는 폐배터리 공장을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베네딕트 핑켄나우어(Benedikt Finkenauer) 포르셰 지속 가능성 전략 책임자는 “배터리 안전은 사고를 막는 기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원을 다시 쓰고 환경 영향을 최소화하는 것까지 포함해야 한다”라며 “포르셰는 배터리의 전체 생애 주기에서 지속 가능한 기준을 제시하려고 한다”고 했다.
AI가 자동차 이상 예방한다

배터리는 기획부터 양산까지 수많은 테스트를 거친다. 그러나 실제 운용 단계에서 문제가 언제나 발생한다. 포르셰는 2024년 12월 미국에서 고전압 배터리가 장착된 전기차 약 2만7000대를 리콜(결함 시정)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이 전기차는 배터리 내부 단락으로 잠재적 화재 위험이 제기됐다.
일반적으로 제조사는 차에 문제가 생기면 정비소를 통해 문제를 진단하고, 수리한다. 하지만 포르셰는 전기차에 ‘예방적 이상 탐지(Preventive Anomaly Detection)’ 기술을 적용했다. 발생하지 않은 문제를 사전에 진단하고, 분석해 문제를 예방하는 서비스다.
예방적 이상 탐지 서비스는 자동차와 배터리가 끊임없이 생성하는 데이터를 AI와 머신러닝을 활용해 분석한다.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하며, 배터리 셀 단위의 아주 작은 데이터까지도 살핀다. 이를 통해 자동차에 혹시 모를 이상이 생겼거나 생길 것으로 예측될 경우 포르셰는 ‘마이포르셰(My-Porsche)’ 앱을 통해 소비자에게 알린다.
마칸 일렉트릭에 최초 적용됐으며, 현재는 독일을 중심으로 서비스가 이뤄지고 있으나, 포르셰는 국제 허브를 통해 글로벌 서비스로 확장한다는 방침이다. 또 전기차뿐 아니라 전체 자동차로 이 서비스를 넓힐 계획이다. 노라 로벤슈타인(Nora Lobenstein) 포르셰 데이터 기반 품질 책임자는 “예방적 이상 탐지는 자동차에 고장 난 뒤에 일을 처리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며 “실제 이상 발생 시점보다 훨씬 전에 (이상 피드백을) 받기 때문에, 소비자는 다음 정기 검사 때 고장 가능성 있는 시스템을 점검할 수 있다. 정비 유연성과 선택권을 제공받는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