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앙숙일 것 같던 미국과 이란이 핵 협상에 나서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의 서신 교환으로 시작된 양국의 핵 협상은 4월 12일(이하 현지시각) 오만에서 첫 회담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다섯 차례의 협상이 진행됐다. 5월 23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진행된 5차 핵 협상은 일부 진전이 있었지만, 결정적인 성과는 없었다. 중재자 역할을 했던 오만은 남은 쟁점이 며칠 내에 명확히 해결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힘으로써 협상이 쉽지 않음을 내비쳤다. 하지만 양측 모두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을 희망하고 있기 때문에 협상은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2018년 이란 핵 협정(JCPOA)을 역사상 최악의 합의라고 일방적으로 파기했던 트럼프 대통령과 이란이 다시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은 것은 중동 정세의 급속한 변화가 배경이다. 2023년 시작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의 하마스는 물론 레바논의 헤즈볼라까지 무력화시켰다. 튀르키예는 시리아 반군을 지원해 아사드 정권을 붕괴시켰다. 이로 인해 이란이 오랫동안 공들여 구축해 온 중동 내 친이란 네트워크는 와해됐다. 이스라엘의 위협에 직면하게 된 이란으로서는 미국과 협상을 통해 체제 생존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트럼프 역시 중국과 전략적 경쟁에 집중하기 위해서 중동 문제를 빠르게 정리하고 싶어 한다. 최근 중동 순방을 통해 트럼프는 이스라엘과 거리를 두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 지역의 왕정 국가와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중동 지역의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란의 핵 활동이 가속화한 상태에서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할 유일한 현실적 대안이 핵 협상 재개라는 미국 내부의 인식 전환과 미국 제재로 인한 경제난 해소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이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도 협상 재개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란의 핵 개발은 미국의 지원으로 시작됐다. 1950년대 시작된 미국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 계획에 따라 이란은 1967년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했다. 1970년대 막대한 석유 수익을 올린 팔레비 국왕은 1974년 이란원자력기구를 설립하고 2000년까지 23개의 원전을 건설한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발표했다. 팔레비 국왕은 미래 석유 고갈에 대비한 에너지 확보, 패권국으로서 위상 강화 및 잠재적 핵무기 개발 능력 확보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1979년 이슬람 혁명 발발로 이란의 핵 프로그램은 중단됐다. 그때 집권한 호메이니가 핵 기술이 비이슬람적이라고 반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8년간 이란·이라크 전쟁을 통해 이란은 핵무기 필요성을 절감했다. 1990년대 중국, 러시아와 핵 협력을 확대한 이란은 1999년 비밀리에 우라늄 농축에 성공했다. 하지만 2002년 반정부 단체가 나탄즈 우라늄 농축 시설을 폭로하면서 이란 핵 문제는 국제 이슈로 부각됐다.
이란의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압력이 지속되면서 2015년 7월 미국과 이란은 JCPOA에 서명했다. 양측 합의에 따라 이란은 애초 보유한 저농축 우라늄의 규모를 97% 감축했고, 농도도 3.67%로 제한했다. 원자력발전소 연료로 사용하는 데는 충분하지만 핵무기 제조는 불가능한 수준이다. 나탄즈에 있던 원심분리기도 대폭 감축하고 플루토늄 재처리도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대신 이란은 제재 해제와 동결되었던 1000억달러(약 136조6000억원) 자산을 돌려받았다. 원유 수출과 금융거래도 재개됐다. 미국과 이란 양국 모두를 만족시킨 합의였지만 양측 내부적으로는 격렬한 반발이 뒤따랐다. 미국 공화당은 미사일 개발과 지역 내 친이란 세력 지원 문제가 포함되지 않았음을 비판했다. 또 핵심 제한 조치가 10~15년 후 만료되며 25년 후에는 대부분의 제약을 폐지하도록 하는 일몰 조항의 존재도 비판 대상이었다. 중동에서는 이스라엘과 사우디가 반발했다.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보유를 합법화했다고 비판했으며 사우디는 제재 해제로 인한 힘의 균형이 이란에 유리해질 것을 우려했다.
이란 내부적으로도 강경파는 서구에 대한 굴복이라고 비난했고 특히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의한 광범위한 사찰 허용에 대해 주권 침해로 받아들였다. 조약이 아닌 정치적 약속이라는 불안한 지위로 유지되던 핵 합의는 2018년 5월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적 탈퇴로 붕괴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몰 조항의 존재 그리고 이란의 미사일 개발과 중동 분쟁 개입을 내세웠다. 미국은 이후 이란에 대한 최대 압박 정책을 추진하면서 제재를 대폭 강화했고 이란산 원유 수출을 사실상 금지했다. 2020년 쿠드스군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가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암살되면서 양국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이스라엘은 강력 반발, 사우디는 중재자 역할
양국의 핵 협상 재개를 지켜보고 있는 중동 국가의 입장은 복잡하다. 핵 협상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는 곳은 이스라엘이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란 전체 핵 인프라 해체가 아닌 어떠한 타협에도 반대하고 있다. 핵 프로그램 제한과 중단이 아닌 이란 정권 자체의 교체를 희망하는 이스라엘에 이란의 핵 능력을 일정 부분 용인하는 핵 협상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최근 이스라엘은 이란 핵 시설에 대한 독자적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양측 협상이 결렬될 경우 행동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제재 해제를 통해 이란이 경제 회복에 나서고 장기적으로 지역 패권국 지위를 회복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현재 약화한 이란이 이스라엘에는 최선인 상황에서 미국이 이란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불만인 것이다.
사우디의 입장은 복잡하다. 2018년 트럼프의 핵 협정 탈퇴를 환영했던 사우디는 이제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일단 2023년 중국 중재로 이란과 관계 정상화에 합의한 것이 배경이다. 경제개발에 집중하고 싶은 빈 살만 왕세자로서는 지역 평화가 필수적이다. 이란의 지원을 받는 예멘 후티 반군의 사우디 공격 중단만으로도 사우디는 이란과 협력을 통한 이익을 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사우디는 이란의 핵무장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최근 사우디가 미국과 추진하고 있는 원자력협정 체결은 자체적 핵 보유를 위한 의도에 따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우디는 이란을 고립시키지 않으면서도 지역 내 패권 국가로 부상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이 타결될 경우 중동의 지형은 크게 바뀔 것이다. 일단 이란의 핵무기 개발 가능성이 작아지면서 핵 확산 위협이 줄어드는 만큼 역내 긴장은 크게 감소할 것이다. 또 제재 해제로 이란 원유 수출이 재개됨으로써 세계 유가 안정에도 기여할것이다. 하지만 이란의 일부 핵 개발 능력 보유를 전제로 협상이 타결될 경우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무장 가능성을 경계하고 추가적인 군사력 증강에 나서면서 군비경쟁이 가속화될 수도 있다. 또한 이란의 경제 회복에 따라 다시 헤즈볼라나 하마스 등의 지원에 나설 경우 지역 내 분쟁이 격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동의 안정화를 도모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은 필요하지만, 핵 협상 타결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마법은 아니다. 미사일 개발, 역내 불안정 조성 행위 등 더 어려운 과제가 산적해 있다.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이 과연 중동 정세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수 있을지, 아니면 또 다른 갈등의 씨앗이 될지는 앞으로 협상 과정과 주변국의 대응에 달려있다. 국제사회는 이 복잡한 퍼즐 조각이 어떻게 맞춰지는지 예의 주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