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동부자바주 대표 도시인 말랑에 있는 바람소주 공장. 연간 50만 병의 소주를 생산하는 곳으로, 대선주조와 무학 출신인 옥점조 공장장이 한국의 희석식 소주 제조 공정을 고스란히 재현했다. /바람소주
인도네시아 동부자바주 대표 도시인 말랑에 있는 바람소주 공장. 연간 50만 병의 소주를 생산하는 곳으로, 대선주조와 무학 출신인 옥점조 공장장이 한국의 희석식 소주 제조 공정을 고스란히 재현했다. /바람소주

지난 4월 말 방문한 인도네시아는 이미 한국의 한여름을 방불케 했다. 낮이면 섭씨 35도까지 오르는 기온에 절로 그늘을 찾게 됐다. 더운 날씨 탓에 시원한 맥주 생각이 날 법했지만, 의외로 인도네시아 식당 곳곳에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초록색 병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이른바 ‘K소주’다.

인도네시아에는 ‘참이슬’이나 ‘처음처럼’ 같은 한국산 소주 외에도 현지에서 생산하는 30여 개 브랜드의 소주가 유통되고 있다. ‘바람·참좋은·첫눈·배(BAE)·대박’ 등 이름도 한국인에게 친숙했다. 현지 주류 기업이나 소규모 양조장이 K팝과 K드라마 열풍을 타고 한국산 소주와 비슷한 제품을 만들어 팔고 있다. 이슬람 문화권인 인도네시아에서는 해외에서 수입하는 술에 세금이 많이 붙는다. 한국에서 한 병에 1300원인 소주 참이슬을 인도네시아 마트에서는 2만원 가까운 가격에 팔고 있다. 반면 현지에서 생산하는 소주는 관세가 붙지 않아 최종 소비자가격이 9000원 정도로 수입 소주의 절반 수준이다. K드라마에 등장한 소주를 한번 맛보고 싶은 인도네시아 젊은이가 비싼 한국산 K소주가 아닌, 인도네시아식 K소주를 자연스럽게 찾는 배경이다. 인도네시아에는 K소주의 본토 한국보다도 많은 브랜드의 소주가 경쟁한다. 그러나 그 맛과 향을 제대로 재현한 경우는 많지 않다. 현지 업체가 만드는 소주 대부분은 한국산 소주를 흉내 내기만 할 뿐, 소주 제조 기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제조 원가를 줄이는 데만 집중한다고 현지 한인 사회는 지적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동부자바주 대표 도시인 말랑에 있는 바람소주 공장. 연간 50만 병의 소주를 생산하는 곳으로, 대선주조와 무학 출신인 옥점조 공장장이 한국의 희석식 소주 제조 공정을 고스란히 재현했다. /바람소주
인도네시아 동부자바주 대표 도시인 말랑에 있는 바람소주 공장. 연간 50만 병의 소주를 생산하는 곳으로, 대선주조와 무학 출신인 옥점조 공장장이 한국의 희석식 소주 제조 공정을 고스란히 재현했다. /바람소주

한국 공장장 영입하고, 증류수로 품질 높인 바람소주

인도네시아 현지 한인 사업가가 한국 소주 맛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곳도 있다. 바로 ‘바람소주’다. 인도네시아 동부자바주 대표 관문 도시 말랑(Malang)에는 바람소주의 공장이 있다. 바람소주 공장은 일하는 직원이 인도네시아 현지인인 것만 빼면 한국의여느 소주 공장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초록색 병에 소주가 가득 담긴 채 공장 안에 가득 쌓여 있었고, 바람이라는 한글이 적힌 박스에 소주를 포장하는 모습도 익숙했다.

바람소주는 대선주조와 무학 출신인 옥점조 공장장을 영입해 한국의 희석식 소주 제조 공정을 인도네시아에서 재현하고 있다. 하영빈 바람소주 이사는 “옥 공장장은 주조 경력 50년의 전문가로, 한국의 희석식 소주 제조 과정을 인도네시아에 그대로 재현했다”며 “인도네시아는 소주의 판매 가격이 높아 한국보다 원가 절감에 대한 부담도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고품질 소주를 생산하기에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2009년 설립된 바람소주는 연간 50만 병의 소주를 인도네시아에서 팔고 있다. 현지 미디어인 인도네시아 어워드 매거진(Indonesia Award Maga-zine) 평가에서 만점인 ‘별 다섯 개(☆☆☆☆☆)’를 받아, 품질을 인정받았다.

술은 주재료에 따라 제조 방식이 달라진다. 하지만 어떤 술이든 빠지지 않고 넣어야 할 재료가 있다. 바로 물이다. 특히 소주의 경우 주정에 물을 희석해 원하는 도수를 맞추기 때문에 물을 아주 많이 사용한다. 보통 희석식 소주 성분의 80% 정도가 물이다. 한국국제소믈리에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고재윤 경희대 명예교수는 “어떤 물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술맛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며 “양조장을 세울 때 가장 먼저 고민하는 게 물을 고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인도네시아는 지하수에 석회질 같은 불순물이 많기 때문에 더욱 물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발리나 자카르타로 여행을 가는 사람이 ‘샤워 필터’를 필수로 챙겨갈 정도다. 바람소주도 같은 고민을 했다. 

희석식 소주는 정제수를 이용해 만든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제수만 해도 여러 여과 방법을 통해 불순물을 걸러내기 때문에 술을 만드는 데 문제가 별로 없다.

그러나 바람소주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희석식 소주에 보통 사용하지 않는 증류수를 쓴다. 증류수는 물을 가열해 기화시킨 증기를 다시 응축해 만드는 물이다. 정제수보다 만드는 과정이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들지만, 그만큼 더 순수한 물을 얻을 수 있다. 증류수에는 수소와 산소, 두 원자 외에는 어떤 광물질도 들어있지 않다. 

하 이사는 “인도네시아에서 정제수는 L당500루피아, 증류수는 L당 3000루피아로 6배 정도의 가격 차이가 있다”라며 “처음에는 글로벌 생수 회사가 인도네시아에서 생산하는 생수를 사용했는데, 이 회사 역시 석회질이 많은 인도네시아 현지 물을 이용하기 때문에 보다 안정적이고 일관된 품질의 물을 쓰기 위해 증류수를 택했다”고 말했다. 

고 명예교수는 “(깨끗하고, 품질이) 좋은 지하수를 쓴다면 가장 좋겠지만, (바람소주는) 지하수를 쓰기 힘든 곳에서 환경에 맞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과학으로 본 증류수의 효과

증류수와 정제수를 사용한 술의 맛과 품질을 비교한 연구는 찾기가 쉽지 않다. 술을 만드는 데 물이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런 중요성에 비해 증류수와 정제수를 사용한 술에 대한 과학적 연구나 고민은 부족한 것이다. 대신 차(茶)나 동치미 등 다른 음식과 물의 특성을 비교한 연구 결과는 쉽게 찾을 수 있다. 가장 최근 연구 결과로는 부산대 이정후 석사과정생이 작성한 ‘먹는 샘물의 수질 특성에 따른 백차와 청차의 성분 특성 비교 연구’ 논문이 있다. 이 연구는 하동에서 생산된 햇차를 대상으로 국내산 생수 3종, 외국산 생수 3종, 증류수 등 총 7종의 원수를 이용해 이화학적 특성(경도·pH· 총용존산소량·전기전도도·총용존고형물)과 침출수의 주요 성분을 비교 분석한 결과를 담고 있다. 논문에 따르면, 증류수의 여러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데, 증류수는 7종의 원수 가운데 경도(물속에 칼슘과 마그네슘 같은 금속이온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가 가장 낮았다. 순수한 물인 만큼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전기전도도(물질이나 용액이 전기를 얼마나 잘 전달하는지를 나타낸 물리량)도 증류수가 가장 낮았다. 경도와 전기전도도가 낮을수록 미네랄 함량도 적다. 한국보다 술에 쓰이는 물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일본에서는 경도와 전기전도도가 낮을수록 술의 품질이 우수하다고 본다. 

우리 술 전문가인 이대형 경기도농업기술원 지방농업연구사는 “우리 술과 물의 관계를 직접 다룬 연구 결과나 자료가 많지 않다” 며 “다만 증류수가 미네랄이 없고 경도와 전기전도도가 낮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데, 이 내용을 전기전도도가 낮으면 증류주 품질이 우수하다는 다른 논문 내용에 연결해 소주에 증류수를 쓸 경우 품질이 더 좋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이종현 조선비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