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후 위기 대응에서 금융의 역할은 ‘녹색 금융’에서 고탄소 산업의 구조 전환을 촉진하는 ‘전환 금융’으로 확장되고 있다. 탄소 중립 목표 달성을 위해 철강, 시멘트 등 다배출 산업의 변화가 필수적이며, 이를 뒷받침하는 핵심 수단이 ‘기후 관련 정보 공시(이하 기후 공시)’다. 기후 공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넘어, 재무적 위험 관리와 투자자 신뢰 확보의 필수 요소다. 금융시장과 투자자가 기후 리스크에 주목하면서 공시의 투명성과 비교 가능성을 키우려는 요구가 많다. 기후 공시 규범화가 전환 금융의 조건으로 자리하고, 공급망 파급효과와 기업 대응 과제, 정책적 보완 방향 등이 중요해지고 있다.
기후 공시 기준의 제도화 동향
기업의 기후 관련 정보를 표준화해 공개하도록 하는 제도화 움직임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 중이다. 기후변화가 금융시장과 기업 가치에 중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국제 기준은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의 IFRS S2 ‘기후 관련 공시’ 와 유럽연합(EU)의 ‘기업 지속 가능성 보고 지침(CSRD) 및 세부 기준(ESRS)’이다. IFRS S2는 거버넌스, 전략, 위험관리, 지표 및 목표의 네 축을 중심으로 공시를 요구하며, 2026년부터 공급망을 포함한 Scope 3 배출 공개와 감축 목표, 전환 계획 공개가 의무화된다.

EU는 2025년부터 단계적으로 의무화를 추진하며, ESRS를 통해 상세한 온실가스 배출 정보와 전 과정 관리 요구를 강화한다. 이는 고탄소 제품의 탄소 집약도를 기준으로 국제 표준을 설정하려는 흐름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에코디자인법은 이러한 기준을 제도적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공급망으로 확산하는 기후 공시의 파급효과
글로벌 공시 기준은 기업의 공급망, 제품 사용 단계 등 간접 배출까지 포함해 보고하는 것을 요구한다. 한 기업의 배출량 산정에는 하청 업체, 물류, 소비 및 폐기 단계까지 포함된다. 이는 공급망 전반에 걸쳐 동일한 탄소 정보공개 기준이 확산하는 파급효과를 낳는다. 실제로 EU 기준에 따라 모든 업종의 기업이 Scope 3 배출량과 감축 목표를 공개해야 하며, 이는 규제 대상이 아닌 협력사, 하청 업체 등도 간접적인 공시 의무를 부담하게 되는 구조를 만든다. 글로벌 공급망에 참여하려면, 최소한 자사 탄소 데이터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시 확대는 기업에 새로운 과제를 안긴다. 탄소 관리 기업인 카본 다이렉트(Carbon Direct) 조사에 따르면, 기후 공시를 시행 중인 기업 83%가 배출량 데이터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답했다. 글로벌 기후변화 대응 관련 프로젝트인 CDP (Carbon Disclosure Project·탄소 정보공개 프로젝트) 보고서 역시 협력사 중 실제로 데이터를 제공하는 비율이 약 56%에 불과하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중소 공급 업체는 인력·예산의 한계로 배출량 측정조차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처럼 가치 사슬 전반의 공시 규범화는 투명성 확보와 동시에 공급망 관리의 부담을 크게 증가시키고 있다.
기후 공시와 전환 금융의 연결
기후 공시의 규범화는 전환 금융과 밀접히 연결된다. 금융기관과 투자자는 공시 수준을 신용 평가 요소로 간주하며, 공시는 자본 접근의 전제조건이 된다. 공시가 미흡한 기업은 투자 유치·대출에서 불이익을 받으며, 감축 목표와 전환 계획 공개가 자본 배분의 핵심 기준이 된다. 국제증권관리감독기구(IOSCO) 등은 글로벌 공시 기준의 정합성을 강조하며, 공시 규범화는 전환 경제로 이행을 가속화하는 자본 배분의 나침반이 되고 있다.
기업의 딜레마: 당위성과 경제적 현실 사이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윤리적·사회적 요구가 거세지면서, 기업은 정보공개를 포함한 탈탄소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압박에 놓여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경제적 제약에 직면해 있다.
첫째, 에너지 비용과 경쟁력 문제다. 재생에너지 전환, 친환경 설비 도입, 탄소 배출권 구입 등 전환 투자는 초기 비용 부담이 크다. 특히 글로벌 에너지 가격의 변동성 속에서 탄소 감축 투자는 당장 수익성을 압박할 수 있으며, 광범위한 무탄소 에너지 인정과 같이 중단기 전환 이행 시기에 유연성을 보장하지 않으면, 기업은 도덕적 책임과 비용 부담 사이에서 줄타기해야 하는 상황이고, 딜레마는 가중될 수 있다.
둘째, 데이터 확보와 검증의 어려움이다. 수백 개 협력사의 배출 정보를 수집·검증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인력이 필요하다. 표준화된 계산 도구나 데이터베이스도 부족하다.
셋째, 규제의 불확실성이다. 현재 미국, EU, 국제기구 등에서 병행적으로 기후 공시 기준을 추진하고 있으나, 각 기준의 적용 범위와 시기가 상이하다. 예컨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Scope 3 공시를 완화한 반면, EU는 더 빠르고 광범위한 공시를 요구하고 있다. 한국 등 다른 국가의 도입 시점도 제각각이어서 다국적기업 입장에서는 기준 선택과 대응 방향에 혼선이 불가피하다.
이러한 요인은 기업으로 하여금 기후 대응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실행 과정에서 리스크를 고민하게 한다.
제도적 대응: 공시 기준과 지원의 정교화
기후 공시의 규범화가 실질적인 전환 행동으로 이어지기 위해선 제도적 정교화와 지원 체계가 필요하다.
첫째, 산업별 공시 기준의 세분화가 필요하다. 산업마다 배출 구조와 감축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산업 특화 지표를 마련해 공시의 실효성과 비교 가능성을 키워야 한다. IFRS S2는 이미 63개 산업에 대한 세부 지표를 제시하고 있다.
둘째, 제품 단위 배출량 정보의 체계화다. 기업 단위 공시를 넘어, 제품별 탄소 발자국을 산정·표기함으로써 공급망 전반의 데이터 연계를 원활히 할 수 있다.
셋째, 가치 사슬 전반의 공시 역량을 높여야 한다. 중소 협력 업체가 배출량을 측정하고 보고할 수 있도록 계산 툴, 교육, 인센티브 제공 등 지원책이 필요하다.
넷째, 전환 계획 공시 요건을 명확히 해야 한다. 단순한 ‘넷제로 선언’이 아니라, 중간 목표, 투자 계획, 기술 로드맵 등 신뢰성 있는 계획 공개가 이뤄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공시 데이터 검증과 금융 활용 체계를 갖춰야 한다. 제삼자 검증을 통해 데이터 신뢰성을 확보하고, 이를 전환 금융 인센티브와 연계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
기후 공시: 금융의 새 조건
기후 공시의 규범화는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글로벌 지배구조의 핵심 수단이다. 정보공개는 산업과 금융의 전략을 재편하는 구조적 변화의 기초가 되고 있다.
표준화된 공시를 통해 투자자와 사회는 기업의 기후 리스크와 전환 준비 상태를 파악할 수 있고, 그 결과 자본은 탄소 효율적인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물론 기업이 직면해야 할 부담과 딜레마도 있다. 그렇기에 일관되면서도 실용적인 기준을 마련하고, 기업이 학습과 투자 여력을 갖출 수 있도록 과도기적 지원 체계를 함께 신중하게 설계해야 한다.
기후 공시와 전환 금융의 연계는 규제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의 경쟁력과 금융의 지속 가능성을 동시에 좌우하는 구조적 조건이다. 결국 과제는 이 새로운 규범을 위기가 아닌 기회로 전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