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이 선종했다. 전통에 따라 그가 끼고 있던 ‘어부의 반지’가 파쇄되고 교황의 방이 봉쇄된다. 신과 인간을 이어주던 최고 사제의 자리는 이제 공석이다. 토마스 로렌스 수석 추기경은 슬픔을 추스를 여유도 없이 차기 교황을 정하는 콘클라베를 준비한다. 교황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맡긴 임무였다. 로렌스는 바티칸을 떠나려 했지만, 교황이 그를 붙잡으며 말했다. “양치기로 선택된 자도 있고, 목장 관리자로 선택된 자도 있다네.”
성 베드로 광장에 모여든 인파는 침묵으로 애도를 표한다. 세상의 시간은 멈춘 듯 고요하다. 하지만 바티칸의 시계는 쉬지 않고 움직인다. 교황의 선종은 마침표가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의 신호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던 108명의 추기경이 하나둘 바티칸에 도착한다. 그들의 여행 가방이 검색대를 통과하고 휴대폰은 수거된다. 시스티나 성당에 도청 방지 시스템이 설치되고 창문은 봉쇄된다.
성 마르타의 집에서는 수녀들이 조용히 침상을 정리하고 음식을 준비한다. 투표자인 동시에 잠재적 교황 후보자인 추기경들이 성당을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은 숙식을 위해 게스트 하우스로 이동할 때뿐이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고 초조한 듯 꽁초를 버린다. 가장 신성해야 할 시간에도 신념과 야망, 두려움과 기대, 믿음과 욕망이 뒤섞인 속삭임과 숨결이 교차한다. 그렇게 세계에서 가장 은밀하고 고요한 정치가 시작된다.
보수의 상징인 테데스코, 개혁을 외치는 벨리니,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 교황 후보로 거론되는 아데예미, 파문 의혹 속에서도 온건한 후보로 남은 트랑블레,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합류한 베니테스. 그들은 손을 맞잡고 축복의 말을 주고받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욕망과 의문을 감추며 상대를 탐색한다. 누가 교황이 될까. 누가 되는 것이 교회에, 세계에 가장 온당할까. 아니, 내가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위한 최선이 아닐까.
콘클라베에는 공식적인 후보도 없고 연설도 없다. 각자 마음에 떠오른 이름을 용지에 적는다. 그다음 신 앞에 나아가 “심판자이신 그리스도 주님, 선출되어야 할 이름을 적은 제 표를 하느님 앞에 바칩니다”라는 기도와 함께 투표함에 넣는다. 3분의 2의 득표자가 나오고 하얀 연기가 성당 굴뚝에서 솟아나올 때까지 투표는 하루에 두 번씩 반복된다.
콘클라베를 시작하며 ‘확신은 화합의 가장 큰 적’이라는 내용의 감동적인 강론을 펼친 로렌스가 뜻밖에 물망에 오른다. 표가 분산되었다고 생각한 유력 후보는 로렌스를 원망한다. 반면 베니테스는 그에게 투표했다고 고백한다. 로렌스는 자신은 교황이 될 인물도 아니고 콘클라베가 끝나면 바티칸을 떠날 생각이라며 다른 후보에게 투표하라고 설득하지만, 베니테스는 뜻을 굽히지 않는다.
그즈음 유력 후보들에 대한 부정과 비리 의혹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로렌스는 당혹스럽다. ‘혹시 나에게도 권력에 대한 욕망이 있었던가?’ 콘클라베를 관장하는 추기경의 당연한 의무와 책임인데도 스캔들을 조사하는 것이 공정한 판단인지, 아니면 그들을 떨어뜨리고 교황의 자리를 넘보려는 야심의 검은 그림자인지, 그는 혼란스럽다.
로렌스는 봉인을 깨고 폐쇄되어 있던 교황의 방에 들어간다. 텅 빈 어둠 속에 앉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마침내 답을 얻는다. 교황은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존경받는 자리여야 한다. 한 치의 의심도, 한 줄의 불신도 남겨서는 안 된다. 로렌스는 진실에 접근한다. 증언과 기록, 사실과 양심이 드러나며 유력 후보가 하나둘 경쟁에서 탈락한다. 자연스레 사제들의 눈길은 로렌스에게 향한다.
“만용이었네. 자네에게 마음을 살펴보라고 했던 말. 줄곧 살펴봐야 했던 건 내 마음이었는데 말이야.” 표를 빼앗겼다고 화를 냈던 동료 추기경은 로렌스에게 투표하겠다고 약속한다. “교황이 되면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가?” 그가 묻자, 로렌스는 겸허히 생각한 끝에 답한다. “요한, 요한으로 하겠네.” 과연 로렌스는 새로운 교황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이 신의 뜻이었을까.
‘열쇠로 잠근다’는 뜻의 콘클라베는 단순히 밀폐한다는 의미를 넘어 욕망과 야망도 함께 봉인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잠그고 감추어도 마음은 꿈틀거린다. 힘껏 누르고 닫아둘수록 욕망의 형체만 선명해진다. 영화는 소리 높여 다투지 않는다. 대신 정지된 화면, 어두운 조명, 낮은 숨결과 교차하는 시선을 비춘다. 그리고 묻는다. 가장 신성해야 할 순간조차 인간은 욕망 없이 설 수 없는가. 완전한 교황을 바라는 건 인간의 어리석음이 아닌가. 이 모든 의심을 통과해 마지막 순간,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의외의 진실이다. 그때 또 다른 물음표 하나가 가슴 깊숙한 데서 고개를 쳐든다. 불완전을 껴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성(神聖)인가.
스스로 신 앞에 엎드린 이도 결국 인간일 뿐이다. 이상과 현실, 신념과 야망 사이에서 갈라지고 흔들리고 때로는 무너지며 그 모든 혼란 끝에 그들이 찾는 것 역시 신이다. 그들도 부서질 듯 연약한 사람이기에. 일반인과 똑같이 흔들리고 갈망하는 인간이기에.
콘클라베의 끝, 굴뚝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것은 순결과 완벽의 상징이 아니다. 인간의 욕망과 불완전을 인정한 끝에 찾아온 격려의 손짓이다. 내면 깊은 곳의 흔들림을 지나 마침내 자신을 내려놓은 순간 찾아오는 빛. 우리는 그 빛이 이끄는 곳에서 다시 일상을 시작한다. 성스러움은 완벽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품는 데서 탄생하는 평범이다.
교황이 기르던 거북이들은 자꾸만 작은 연못에서 탈출한다.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지만 그들은 떠날 수 없다. 자유의지는 소중하지만, 연못이 감옥이 아니라 보호였다는 걸 아는 데도 시간과 지혜가 필요하다. 사람도 자신의 역할이 양치기인지 목장 관리자인지조차 모른 채 다른 세계를 동경한다. 그러나 소망과 함께 알아야 할 것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깨달음이다. 자기의 능력과 재능 그리고 가고 싶은 곳보다는 묵묵히 지켜야 할 자리를 아는 것,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진짜 신의 뜻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