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워싱턴의 광활한 포도밭 너머로 컬럼비아강이 보인다. 2 오리건의 포도밭. 저 멀리 캐스케이드산맥의 봉우리 마운드 후드가 보인다. /김상미
1 워싱턴의 광활한 포도밭 너머로 컬럼비아강이 보인다. 2 오리건의 포도밭. 저 멀리 캐스케이드산맥의 봉우리 마운드 후드가 보인다. /김상미

미국 와인 중심지는 캘리포니아주다. 그런데 요즘 와인 애호가의 시선은 점점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 바로 워싱턴주(이하 워싱턴)와 오리건주(이하 오리건). 태평양 북서부에 있는 두 이웃이지만 이들이 만드는 와인은 놀라울 정도로 다르다. 워싱턴 와인이 묵직하고 힘차다면, 오리건 와인은 섬세하고 정교하다. 이런 차이는 무엇보다 기후 때문이다. 도대체 날씨가 얼마나 다르기에 이토록 상반된 스타일의 와인이 생산되는 걸까? 체험해 보기 위해 워싱턴과 오리건을 다녀왔다.

강렬한 햇볕이 빚은 워싱턴 와인

워싱턴의 주도는 시애틀이다. 많은 사람이 회색빛 하늘을 떠올릴 만큼 시애틀은 비가 잦은 곳이다. 필자가 도착한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잠깐 시내를 돌아보려 나섰을 때 우산을 챙겨야 하나 고민했을 정도로 오후 내내 구름이 오락가락했다. 하지만 다음 날 캐스케이드산맥을 넘어 워싱턴 동부로 향하자, 날씨는 급변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습기 하나 없이 마른 대기에서는 바람마저 바스락 소리를 내는 듯했다. 이렇게 극적으로 대비되는 날씨는 산맥이 만드는 비 그늘 효과 때문이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습한 서풍이 산맥에 부딪히면 서쪽에 있는 시애틀에 비를 뿌리고 건조한 바람만이 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내려간다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워싱턴 동부의 연평균 강우량은 300㎜가 채 되지 않는다. 준사막기후여서 물을 대지 않고는 포도 재배가 어렵다. 그래서 워싱턴의 포도밭은 컬럼비아강 근처에 집중돼 있다. 미국에서 네 번째로 긴 컬럼비아강은 240㎢에 달하는 광활한 산지를 적시고도 남을 만큼 넉넉한 수자원이 돼 준다. 워싱턴 동부에서 머문 3박 4일 내내 하늘은 맑았고 이제 막 싹을 틔운 포도나무는 강렬한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났다. 날씨가 워낙 건조하니 포도에 가장 큰 피해를 주는 곰팡이성 질병은 걱정할 필요가 없고, 아침저녁으로 큰 일교차는 당도와 산도의 균형이 완벽한 포도를 길러낸다.
워싱턴의 와인 산지 중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레드 마운틴(Red Mountain)이었다. 연 강우량이 150㎜ 이하로 매우 건조하고 기온까지 높은 이곳은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메를로(Merlot), 시라(Syrah) 같은 품종으로 진하고 강건한 프리미엄 레드 와인을 생산한다. 다음 날 방문한 야키마 밸리(Yakima Valley)는 워싱턴에서 가장 먼저 와인 산지로 개발된 지역이다. 포도밭이 넓어 지형과 토질에 따라 여러 가지 와인이 생산되는데, 레드 와인도 수준급이지만 샤르도네(Chardonnay)와 리슬링(Riesling) 같은 화이트 와인이 균형 잡힌 맛과 달콤한 풍미를 뽐낸다. 워싱턴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한 산지는 왈라 왈라 밸리(Walla Walla Valley)였다. 이곳은 해발고도가 150~600m로 다양해, 포도밭 위치에 따라 다채로운 와인이 생산된다. 똑같은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만들어도 왈라 왈라 밸리 와인은 스타일이 더 경쾌하고, 시라 등 프랑스 론(Rhône) 품종으로 만든 레드 와인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왈라 왈라 밸리에 있는 그라머시의 와인 메이커 브랜든 모스가 와인을 설명하고 있다. /김상미
왈라 왈라 밸리에 있는 그라머시의 와인 메이커 브랜든 모스가 와인을 설명하고 있다. /김상미

피노 누아의 향기가 가득한 오리건

닷새째 되는 날에는 오리건의 대표 산지인 윌라메트 밸리(Willamette Valley)로 향했다. 워싱턴과 오리건 경계를 따라 서쪽으로 다섯 시간이 넘는 긴 자동차 여행 내내 장엄하게 흐르는 컬럼비아강이 차창 밖 친구가 돼 줬다. 윌라메트 밸리의 기후는 워싱턴 동부와는 딴판이다. 캐스케이드산맥 서쪽에 있는 이곳은 날씨가 온화하고 연 강우량이 900~1200㎜에 이른다. 일부 지역은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영향을 받아 더 서늘한 기후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처럼 선선하고 습도가 적당한 기후는 까다롭기로 유명한 피노 누아(Pinot Noir)를 기르기에 이상적인 조건이다. 윌라메트 밸리의 피노 누아가 프랑스 부르고뉴의 레드 와인을 연상시킬 정도로 우아하고 섬세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캐스케이드산맥과 해안 산맥 사이에 있는 윌라메트 밸리에는 고도와 방향이 저마다 다른 포도밭이 펼쳐져 있고 지형에 따라 바람 세기도 달라 산지별로 피노 누아 맛이 뚜렷하게 갈린다. 태평양의 차가운 바람을 바로 맞는 이올라-아미티 힐즈(Eola-Amity Hills), 북향 밭이 많은 셰할렘 마운틴즈(Chehalem Mountains), 고도가 높은 맥민빌(McMinnville)의 피노 누아는 산도가 높고 가벼우며 과일 향이 신선하다. 고도가 낮은 얌힐-칼튼(Yamhill-Carlton)과 언덕으로 둘러싸인 남향 경사지의 던디 힐즈(Dundee-Hills)에서 생산된 피노 누아는 과일 향이 풍부하고 질감이 한결 부드럽다. 이처럼 산지명이 레이블에 명시된 와인은 뚜렷한 개성을 드러내고, 윌라메트 밸리라고만 적힌 것은 여러 산지 포도를 혼합해 만들어 조화로운 맛이 일품이다.

워싱턴과 오리건 중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말하긴 어렵다. 두 지역의 대비되는 자연만큼이나 와인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지막한 구릉이 끝없이 펼쳐진 워싱턴의 산지는 호연지기가 느껴질 정도로 광활하다. 그런 풍광을 닮아서인지 워싱턴에는 대형 와이너리가 많고 와인도 힘차고 직설적이다. 반면에 울창한 숲 사이 골짜기마다 들어선 오리건의 포도밭은 아기자기하고 유연하다. 그곳의 작은 와이너리가 장인 정신으로 소량 생산하는 와인은 섬세하고 사랑스럽다. 스테이크나 갈비찜처럼 기름지고 묵직한 음식에는 워싱턴의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시라가 제격이다. 촉촉하게 비가 오는 날 파스타나 부침개를 즐길 때는 오리건 피노 누아만 한 것이 없다. 미국이라는 한 나라 안에 상반된 두지역과 와인이 공존한다는 것도 흥미롭지만 그만큼 골라 마실 와인이 많다는 점은 와인 애호가에게는 더없는 기쁨이다.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