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로도항에서 배로 3~5분 거리에 있는 ‘쑥섬’의 난대림은 마을 사람이 신성하게 여겨 400년 동안 외부에 개방하지 않다가 2016년부터 일반에게 공개했다. 쑥섬 정상
인근의 풍경. 2 금세기정원의 수변 공원. /이용성 기자
1 나로도항에서 배로 3~5분 거리에 있는 ‘쑥섬’의 난대림은 마을 사람이 신성하게 여겨 400년 동안 외부에 개방하지 않다가 2016년부터 일반에게 공개했다. 쑥섬 정상 인근의 풍경. 2 금세기정원의 수변 공원. /이용성 기자

세상에 여행 목적으로만 존재하는 곳은 없다. 많은 이가 바쁜 일상의 ‘쉼표’를 찍기 위해 찾는 지중해와 카리브해의 이름난 휴양지도 누군가에겐 치열한 삶의 현장일 뿐이다. 그래도 여행지로서의 매력을 가늠하는 보편적인 척도가 하나 있긴 하다. 바로 ‘차이(差異)’다. 누구라도 평상시와는 뭔가 다른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래서 시대가 바뀌고 생활 환경이 달라지면 여행지에 대한 취향도 변하는 경우가 많다. 

전라남도 남쪽 끝자락에 있는 고흥은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여수·순천에 비해 오랫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산업 기반과 인프라가 취약하다 보니 1960년대에 23만이 넘었던 인구는 약 6만으로 줄어들었다. 산업화·도시화의 물결은 비껴갔지만, 덕분에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다도해의 청정 쪽빛 바다와 수백 년간 인적이 닿지 않은 원시 난대림을 고스란히 보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의 첨단 도시 문명에 지친 사람이 ‘힐링 여행지’ 고흥의 매력에 이끌리기 시작했다. 

나로호와 누리호의 발사 성공이 추진력으로 작용했다. 국내에서도 우주 시대가 활짝 열리면서 많은 이의 이목이 고흥을 향했기 때문이다. 나로호와 누리호를 발사한 곳은 고흥군 나로도에 있는 나로우주센터다. 나로도는 내, 외나로도로 나뉘는데 우주센터는 외나로도의 끝자락에 있다. 아쉽게도 평소에는 로켓 발사장을 볼 수 없다. 대신 입구에 있는 우주천문과학관 관람으로 간접경험을 할 수 있다. 발사장은 고흥우주항공축제가 열리는 이른 봄에 잠깐 공개되는데 전국에서 관광객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멀리 고흥까지 와서 축제만 보고 그냥 돌아갈 리 만무하다. 때 묻지 않은 고흥의 아름다움은 그렇게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내나로도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한적한데, 섭정삼거리~국립청소년우주센터로 이어지는 해안도로의 풍광이 특히 아름답다. 도로를 달리는 느낌이 어쩐지 제주도와 많이 닮았다. 이유가 있었다. 고흥은 난대림의 북방 한계선이다. 그래서 식생(植生)이 제주와 비슷하다. 

곶자왈 닮은 숲길과 이어지는 ‘비밀 꽃정원’

나로도항에서 배로 3~5분 거리에 있는 ‘쑥섬’의 난대림은 마을 사람이 신성하게 여겨 400년 동안 외부에 개방하지 않다가 2016년부터 일반에게 공개했다. 후박나무·동백나무·육박나무·돈나무·푸조나무·팽나무 등이 정글처럼 우거진 숲길을 걸으니 몇 해 전 ‘곶자왈(제주의 원시림)’ 트래킹의 기분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전날 온종일 내린 비에 촉촉하게 젖은 숲속 공기가 죽은 세포라도 되살릴 듯 청신하다. ‘한반도에서 제주를 빼면 가장 제주와 비슷한 곳은 고흥이 아닐까’ 생각했다.

쑥섬은 주민이 20여 명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그런데 2024년 한 해 동안 고흥 인구와 비슷한 6만여 명이 이곳을 찾았다. 그만큼 다채로운 매력이 넘친다. 이름에 걸맞게 봄이면 쑥 향이 가득 번져 더욱 운치가 있다고 한다. 동행한 가이드가 “쑥이 ‘많이’ 나서 쑥섬이 아니라 쑥의 ‘질이 좋아서’ 쑥섬”이라고 귀띔한다. 

언덕을 향해 완만하게 이어진 난대림 숲길을 통과하면 다도해의 수평선과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어우러진 ‘환희의 언덕’이 나온다. 멀리 거문도·손죽도·초도 등 섬이 눈에 들어온다. 야생화가 어우러진 오솔길을 지나 정상에 접어들면 철마다 다른 꽃이 피고 지는 ‘비밀 꽃정원’이 또 한번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요즘 쑥섬은 ‘고양이 섬’으로도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쑥섬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십중팔구 갈매기 모양을 본뜬 카페 건물(오리를 닮았다는 의견도 많다)과 느긋하게 ‘사람 구경’을 즐기는 고양이일 것이다. 쑥섬에 고양이가 많은 건 무병과 풍년을 비는 당제(堂祭) 전통 때문이다. 당제를 지낼 때 개·소·닭 등이 울면 부정을 탄다고 믿었다. 그래서 고양이만 길렀다고 한다. 

바다를 메워 일군 ‘금세기 정원’

쑥섬이 자연이 만든 천혜의 정원이라면, 고흥의 또 다른 명소 ‘금세기정원’은 불굴의 의지로 자연의 힘을 극복해 일군 인공 정원이다. 경남 마산 출신 김세기 전 죽암농장 창업주가 1966∼77년 삽과 리어카로 흙을 퍼 나르며 바다를 메워 912㏊(헥타르) 땅으로 바꿔 놨다. 공사비가 떨어지면 일본 탄광에서 한동안 일해 돈을 모았다고 한다. 

김 전 회장을 기리는 전시관 한쪽 벽에 ‘아, 무서운 비 푸른들’이라는 그의 친필 문구 확대본이 걸려있다. 폭우가 내려 작업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곤 했던 아픈 기억을 글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일군 농지 사이 자투리땅을 활용해 조성한 것이 금세기정원이다. 약 5만3000㎡(약 1만6000평) 규모의 금세기정원에는 배롱나무·석류나무·메타세쿼이아·은행나무·이팝나무·종려나무 등 46종의 수목과 수국·장미·연꽃·백일홍·상사화 등 77종의 화초가 자란다. 한반도 모양 연못이 있는 수변 공원도 운치가 있다. 

Plus Point

참돔·민어도 구워 파는 110년 된 고흥전통시장

고흥전통시장의 ‘숯불생선구이’. 2 카페 보아즈의 유자가 들어간 다양한 디저트. /이용성 기자
고흥전통시장의 ‘숯불생선구이’. 2 카페 보아즈의 유자가 들어간 다양한 디저트. /이용성 기자

고흥은 ‘미식의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갯장어(하모)는 고흥의 여름철 별미다. 갯장어에는 참장어와 붕장어가 있는데 샤부샤부에는 참장어를 사용한다. 장어 육수에 채소 넣고 끓인 국물에 장어 살점을 살짝 담그는데, 잘게 칼집 낸 살점이 동그랗게 말리며 꽃 모양으로 변한다. 그 ‘참장어 꽃’을 생양파 조각에 얹어 먹는다. 

1915년에 설립해 110년이나 된 고흥전통시장은 ‘숯불생선구이’가 간판이다. 총 100개의 점포 중 30여 개가 숯불생선구이를 판매할 정도다. 고등어처럼 흔한 생선도 있지만, 참돔과 민어, 갑오징어 등 여간해서 구이로 먹어보기 힘든 것이 많다. 

고흥에는 수준 높은 빵집과 카페도 적지 않다. 녹동항에 있는 mkr 커피는 블루리본 인증을 받은 곳이다. ‘마카다미아라떼’와 ‘아인슈페너’ ‘자몽크러쉬’ 등이 인기다. 80여 년 된 한옥을 개조한 동강면 죽암리의 ‘카페 죽암리 415’는 한적한 바닷가에서 다양한 종류의 홍차와 디저트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쑥섬의 갈매기 카페는 숲길 산책 후 몰려오는 공복감을 해소할 수 있는 곳이다. 정통 ‘아메리칸 스타일’ 수제버거를 맛볼 수 있다. 색다른 뭔가가 아쉽다면 탄산음료 대신 향기가 진한 ‘쑥라떼’ 한 잔 곁들일 것을 권한다. 

고흥 하면 유자를 빼놓을 수 없다. 남계리의 카페 보아즈는 달콤한 유자 향 에스프레소와 얼음을 섞어 부드러운 거품과 함께 마시는 ‘유자 사케라또’와 부드럽고 상큼한 ‘유자 파운드케이크’를 함께 맛볼 수 있다.

과역면의 르와르 베이커리는 ‘남도 빵지 순례’에서 빠지지 않는 집이다. 프랑스산 버터와 호밀종에 이르기까지 고급 재료만을 사용해 ‘제대로’ 빵을 만든다. 고흥 특산 유자와 간척지 쌀을 사용한 ‘구움과자’가 인기다. 팔영산·연홍도·쑥섬 등 지역 이름을 딴 빵도 있다.

이용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