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6월1일(이하 현지시각) 폴란드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에서 민족주의 우파 성향의 야권 후보 카롤 나브로츠키(Karol Naw-rocki)가 역전승했다. 친유럽연합(EU) 성향의 라파우 트샤스코프스키현 바르샤바 시장을 50.89% 대 49.11%로 이긴 것이다. 무려 13명의 후보가 난립한 5월 18일 1차 투표에서 나브로츠키는 29.54% 대 31.36%로 상대에게 뒤졌지만, 상위 두 후보만 놓고 진행된 결선투표에서 이전 결과를 뒤집으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무소속이었지만 야당 법과정의당(PiS)의 지지를 받은 나브로츠키는 EU와 관계 개선을 추진해 온 여당과 맞대결에서 승리했다. 이로써 2023년 총선에서 승리해 정권을 잡은 친유럽 우파 연립 정당의 도날트 투스크 총리는 10년간 대통령으로 있다가 임기 만료로 물러나는 안제이 두다 대통령과 유사한, 반EU 우파 민족주의 성향의 또 다른 대통령과 불편한 동거를 계속하게 됐다.
폴란드 대선 결과가 나오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하 트럼프)은 즉각 적극적인 지지와 환영의 뜻을 드러냈다. 그런데 이는 다른 나라 대통령 당선인에게 하는 의례적인 언사와 달랐다. 트럼프 정부의 노골적인 유럽 선거 개입의 연장선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폴란드 대선, 트럼프의 승리이자 EU의 패배
나브로츠키는 트럼프가 원하던 후보다. 나브로츠키는 매우 이례적으로 선거운동 기간 에 미국을 방문해 백악관에서 트럼프를 만났다. 그러고는 함께 엄지를 치켜세우는 사진을 찍어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올렸다. 게다가 미국 보수 단체 연합인 보수정치행동회의(CPAC)는 선거운동 기간 중 처음으로 폴란드에서 회의를 개최하며 그를 지원했다. 트럼프의 핵심 측근인 크리스티 노엄 국토안보 장관은 폴란드 국민에게 그를 선택해 달라고 호소하기까지 했다.
투스크 내각은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을 5년 동안이나 역임한 그로서는 2015년부터 집권한 PiS 전임 정부가 추진한 사법부 무력화와 이에 따른 EU와 긴장 관계를 해소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였다. 전임 정부는 대법원 징계위원회를 설치, 판결 내용에 따른 판사 징계 가능성을 키웠다. 아울러 대법관의 정년을 낮춰 약 40%의 판사를 조기 퇴임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국가사법위원회(KRS) 구성 방식을 변경해 정치권의 사법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헝가리에서 2010년대 초에 일어났던 사법부 무력화와 대부분 같은 내용이다. 이런 PiS의 개혁 조치에 대해 EU는 사법부 독립성 훼손으로 간주했다. EU는 폴란드에 대해 매일 100만유로(약 15억7000만원)의 벌금을 부과하고, 1370억유로(약 215억원)의 EU 자금 지원을 중단하기도 했다. 2023년 12월 선거에서 이겨 총리로 돌아온 투스크는 전임 PiS 정부가 추진했던 사법부 무력화 계획을 되돌리면서 EU와 관계 회복을 시도했다. 징계위원회폐지, KRS의 정치적 영향력 축소 등 사법부 독립성 회복 계획을 제시했다. 이런 노력을 EU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2024년 2월 1370억유로의 EU 자금 지원을 재개했다. 그런데 나브로츠키 대통령이 선출되면서 그동안 진행한 개혁 조치가 막혀버릴 우려가 커졌다.
폴란드는 이원집정부제로 대통령은 군 통수권과 의회에서 통과된 법률안에 대한 거부권을 갖는다. 아무리 투스크 총리가 사법부 독립안을 통과시켜도 새로운 대통령이 거부할 수 있다는 의미다. 전임 두다 대통령에 의해 EU와 관계 개선이 번번이 좌절된 경험이 있는 상황에서 신임 대통령에 의해 또다시 이런 현상이 재현될 우려가 커진 셈이다. 아울러 우파 민족주의자는 이번 기회로 세를 늘려 2027년 총선에서 의회까지 다시 가져오자고 기세를 높이고 있다.
트럼프 정부의 노골적인 유럽 선거 개입
트럼프 정부의 유럽 선거 개입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25년 2월 뮌헨에서 개최된 제61차 뮌헨 안보 회의(Munich Security Conference)에 참석한 제임스 데이비드 밴스 미국 부통령(이하 밴스)이 독일 연방 선거를 9일 남겨 놓은 시점에 급진 우파 정당 독일을위한대안(AfD)의 공동대표인 알리스 바이델을 만난 게 대표적인 사례다.
밴스는 바이델 AfD 공동대표를 만나기 직전 뮌헨 안보 회의 연설에서 “유럽이 기본적인 민주주의 가치를 저버리고 있다”라며 “유럽이 극우 정당을 배제해선 안 된다”라고 작심 발언을 쏟아냈다. 이런 밴스의 발언과 행보는 트럼프 정부가 유럽에 던지는 강력한 메시지라는 분석이 쏟아졌다. 당시 독일 정치권은 밴스 발언과 바이델 AfD 공동대표의 만남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올라프 숄츠 당시 독일 총리는 “우리 민주주의에 외부인이 간섭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AfD와 협력을 거부하는 방화벽 전략은 나치즘의 역사적 교훈에 기반한 것”이라고 했다. 또 메르츠 신임 내각에서도 자리를 지킨 국방 장관 보리스 피스토리우스는 밴스 발언이 유럽을 권위주의 정권과 비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며 이를 “용납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밴스 발언과 행동은 유럽과 미국 간 외교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노르웨이의 요나스 가르 스퇴레 총리는 밴스의 이민정책 비판을 정조준하면서 “유럽 각국이 이민 문제에 손 놓고 있지 않으며 문제 해결에 집중하고 있다”라고 했다. 밴스 연설은 유럽 내에서 미국이 극우 정당을 지지하고 있다는 우려를 증폭시켰고, 이는 트럼프 정부와 유럽 간 이념적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곳곳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유럽 선거
밴스가 유럽의 민주주의가 우려스럽다고 사례로 든 루마니아 선거 결과도 주목할 만하다. 2024년 11월 24일 루마니아 대선 1차 투표에서 1위로 등극한 극우 친러 후보가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SNS 캠페인과 불법적인 선거 자금 지원을 통해 부정한 이득을 얻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헌법재판소는 1차 선거를 무효화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다시 진행된 두 차례의 대선 끝에 2025년 5월 18일 친EU 성향의 니쿠쇼르 단 부쿠레슈티 시장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캐나다와 호주에서는 반트럼프 성향의 기존 집권당 후보가 열세를 딛고 선거에서 승리하기도 했다. 전 세계 주요 선거에서 트럼피즘(Trumpism·극우 선동 정치)과 반트럼피즘이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그 최전선에 유럽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