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히스로 공항에 도착했을 때 유명해진 선글라스 신. /샤론 테이트 인스타그램
런던 히스로 공항에 도착했을 때 유명해진 선글라스 신. /샤론 테이트 인스타그램

끌로에(Chloé)의 2025년 봄·여름 컬렉션. 보헤미안풍의 레이스와 플라워 프린트 드레스, 커다란 오벌 프레임(Oval Frame·타원형 모양의 테) 선글라스를 낀 모델들이 가볍고 리드미컬하게 행진하는 캣워크를 보는 순간, 마음속으로 한 사람의 이름을 속삭이게 된다. 부드러운 웨이브 헤어와 세련된 무표정까지, 패션쇼 전체 무드에서 느껴지는 샤론 테이트(Sharon Tate)의 존재감. 누가 봐도 영화배우 샤론 테이트를 향한 오마주였다. 잠시 잊고 있었던 1960년대 아이콘 샤론 테이트가 다시 살아 숨 쉬는 듯했다.

남편 로만 폴란스키 감독과 샤론 테이트. /샤론 테이트 인스타그램
남편 로만 폴란스키 감독과 샤론 테이트. /샤론 테이트 인스타그램
안타깝게도 샤론 테이트는 오랫동안 비극의 이름으로 남았다. 그녀의 이야기는 대부분 찰스 맨슨 패밀리에 희생된 사건에 집중돼 왔다. 1969년 8월, 당시 26세였던 샤론 테이트는 남편인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와 함께 살던 LA 자택에서 찰스 맨슨의 컬트 패밀리에게 살해됐다. 샤론 테이트는 당시 임신 8개월 반이었다. 그러나 이 끔찍한 비극으로만 기억하기에 그녀가 남긴 찬란한 순간이 더 많다. 언니인 데브라 테이트는 샤론 테이트의 사진을 모은 책 ‘샤론 테이트: 리컬렉션(Sharon Tate: Recollection)’의 서문에서 ‘그녀의 삶이 주로 마지막 순간으로만 기억되는 것이 매우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샤론은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 적었다.
플라워 프린트 드레스 룩의 샤론 테이트. /샤론 테이트 인스타그램
플라워 프린트 드레스 룩의 샤론 테이트. /샤론 테이트 인스타그램

다행히 2000년대가 되며, 샤론 테이트가 남긴 유산이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1960년대 후반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 중 한 명으로 손꼽혔으며, 연기력도 인정받은 슈퍼 루키였다. 배우로서 재능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시대를 앞선 감각으로 자기 존재 자체를 하나의 스타일로 승화시켰다. 화려한 프린트의 미니 드레스, 커다란 후프 이어링(Hoof Earring·링 귀고리), 부풀린 금발 머리와 아이라인을 강조한 메이크업은 ‘테이트 룩’으로 불렸다.

영화 ‘인형의 계곡’의 샤론 테이트(사진 맨 왼쪽). /영화 ‘인형의 계곡’ 포스터
영화 ‘인형의 계곡’의 샤론 테이트(사진 맨 왼쪽). /영화 ‘인형의 계곡’ 포스터
샤론 테이트의 아이코닉 룩은 영화 ‘인형의 계곡(Valley of the Dolls·1967)’에서 보여준 스타일이라 할 수 있다. 샤론 테이트는 제니퍼 노스 역을 맡아 1960년대 후반의 화려하고 비극적인 할리우드 스타의 패션을 표현했다. 마크 롭슨이 감독한 이 영화는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모두 성공을 거뒀으며, 샤론 테이트는 골든 글로브 최우수 신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영화 의상 디자이너는 매릴린 먼로와 작업으로 유명한 윌리엄 트라빌라였다. 그는 미니 드레스, 화려한 가운, 헤드피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패션 아이템을 디자인했다.
영화 ‘원스 어폰 어타임⋯인 할리우드’에서 샤론 테이트를 연기한 마고 로비.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 스틸
영화 ‘원스 어폰 어타임⋯인 할리우드’에서 샤론 테이트를 연기한 마고 로비.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 스틸

샤론 테이트가 연기한 제니퍼 노스는 성공을 갈망하는 배우이자 모델이었기에, 영화 에서 화려하고 노출이 있는 이브닝드레스를 자주 입었다. 특히, 구슬 장식이 된 시프트 드레스(Shift Dress·어깨에서 직선으로 내려오는 라인의 드레스)는 상징적인 의상 중 하나로, 몸의 실루엣을 강조하면서도 1960년대 특유의 미니멀한 라인을 보여줬다. 얼굴을 거의 덮는 듯한 오버사이즈 선글라스가 영화 속 샤론 테이트의 신비로운 이미지를 더했다. 영화 속에서 선글라스는 캐릭터의 심경 변화나 외부와 단절을 암시하는 미장센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또한 꽃무늬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운동하는 장면이나, 사이키델릭한 프린트의 수영장 룩으로 잊지 못할 영화 속 패션 신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선글라스는 그녀의 패션 페르소나를 완성하는 가장 강력한 시그니처였다. 특히 샤론 테이트가 공항과 거리에서 자주 착용했던 올리버 골드스미스의 오벌 선글라스는 이상적인 빈티지 선글라스의 전형으로 손꼽힌다. 연한 갈색 틴트와 섬세한 골드 또는 토르토이즈셸(Tortoiseshell·거북이 등껍질 무늬) 프레임의 오벌 실루엣은 그녀의 여리고 몽환적인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이 선글라스는 1968년 런던 히스로 공항에서 촬영된 사진을 통해 대중의 기억에 각인됐고, 지금까지도 셀린느, 미우미우, 끌로에 등 수많은 패션 하우스의 레퍼런스로 사용되며 현대적인 방식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끌로에 2025년 봄·여름 컬렉션. /끌로에
끌로에 2025년 봄·여름 컬렉션. /끌로에

그녀가 즐겨 착용했던 선글라스 스타일은 크게 두 가지다. ‘인형의 계곡’ 속 제니퍼 노스처럼, 실제로 둥글거나 각진 오버사이즈 선글라스를 통해 신비롭고 글래머러스한 분위기를 자주 연출했다. 얼굴 절반 이상을 가리는 이 실루엣은 ‘샤론 테이트 셰이드(Sha-ron Tate Shade)’란 고유명사를 탄생시켰다. 실제 아이웨어 브랜드에서 모델명으로 사용되고 있다. 샤론 테이트는 눈꼬리가 날렵하게 올라간 캣아이나 나비 날개처럼 넓게 퍼지는 버터플라이 프레임을 착용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버터플라이 프레임은 얼굴 전체를 감싸는 듯한 드라마틱한 효과를 주며, 그녀의 작은 얼굴과 대비돼 더욱 고혹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재능 넘치는 배우이자 스타일 아이콘에대한 진정한 헌사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Once Upon a Time⋯in Hollowood·2019)’를 통해 펼쳐졌다. 영화에서 마고 로비는 샤론 테이트를 완벽하게 재현해 냈다. 언니인 데브라 테이트가 ‘목소리 톤까지 완전히 샤론이었다’고 말했을 정도다. 마고 로비가 영화에서 착용한 귀고리와 반지도 실제 샤론 테이트의 유품으로 전해진다. 마고 로비가 부활시킨 샤론 테이트 스타일은 지금 거리에 그대로 옮겨져도 될 만큼 세련됐다.

김의향 패션&스타일 칼럼니스트 - 현 케이노트 대표, 전 보그 코리아  패션 디렉터
김의향 패션&스타일 칼럼니스트 - 현 케이노트 대표, 전 보그 코리아 패션 디렉터
그렇게 샤론 테이트의 시대 초월 감각은 세대를 넘어 오늘날의 디자이너와 패션 애호가에게 계속해서 영감을 주고 있다. 그녀가 더 이상 비극의 희생자로만 기억되지 않길 바랐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에서 결말을 새롭게 해피엔딩으로 뒤바꿨다. 영화 엔딩에서 살아서 스크린 너머로 밝은 목소리를 들려주는 샤론 테이트 모습은 관객에게 예상치 못한 위안을 안겼다. 오래도록 할리우드의 아픈 상처로 남았던 이야기가 애틋한 찬사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우리는 샤론 테이트를 더 이상 비극적인 가십의 그림자에 가두어선 안 된다. 끌로에의 2025년 봄·여름 컬렉션 런웨이에서 보았듯, 샤론 테이트는 여전히 살아있는 뮤즈다. 그녀에 대한 기억은 빛나던 스크린 속 모습과 스타일에서 시작되고 끝나야 할 것이다.
김의향 패션&스타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