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은 혼슈, 규슈, 시코쿠, 홋카이도 등 7000여 개 섬으로 이뤄진 섬나라다. 주요 네 개 섬 가운데 한반도 남쪽과 가장 가까운 곳이 규슈(九州)다. 비행기로 1시간 남짓, 뱃길로 7~8시간 정도 걸린다. 대한해협과 현해탄을 건너면 닿는 규슈 북쪽은 오랜 옛날부터 한반도와 일본열도 간 교류가 빈번했던 지역이다. 지난 5월 말 찾은 규슈 북서쪽 사가(佐賀)현에서 한일 간 고대, 중세, 근현대 교류 유적지를 많이 만났다. 깊이 보면 볼수록 한국과 일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숙명적인 관계다. 사가현 역사 유적지를 따라가며 한일의 과거와 미래를 생각해 봤다.
나고야성, 임진왜란 왜군 출병 전진 기지
사가현 가라쓰(唐津)는 일본에서 대륙으로 향하는 바닷길의 관문에 있는 고요한 항구 도시다. 일본에서 지역명으로 많이 쓰이는 ‘가라(唐)’는 중국과 조선 등 대륙을 지칭하며 ‘쓰(津)’는 나루터를 뜻한다. 즉 가라쓰는 ‘대륙으로 향하는 나룻터’를 의미한다. 지명만으로도 고대부터 일본과 한반도의 교류 요충지임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가라쓰 해안에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 전국 다이묘(영주)가 모여 왜군 출병 기지로 사용한 나고야(名護屋)성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위해 세운 성이며 그 자신도 1년간 머물며 왜군을 지휘했다(혼슈 중부 나고야에 있는 나고야성과는 다른 곳이다). 이 성에 와 보면 왜국이 출병 1년 전부터 치밀하게 조선 침략을 준비했다는 것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은 성곽 터와 유적만 남아 있지만, 당시 수십만 명의 병력과 영주가 집결해 진지를 구축하고 군사훈련을 했다. 나고야성터 옆에 조성된 나고야성 박물관에서 임진왜란 등 중세 한일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임진왜란 사료가 많고, 왜군의 침략 사실도 비교적 객관적으로 설명돼 있다. 조선 수군의 상징으로 이순신 장군이 지휘했던 ‘거북선’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휘선인 ‘오아타케부네’가 실물 10분의 1 크기로 복원돼 있다. 두 배의 특징과 장단점, 역사적 의미까지 설명돼있다. 나고야성 천수각에 올라가면 쓰시마섬(대마도)과 가카라시마가 한눈에 들어온다. 무령왕의 탄생 설화가 남아 있는 곳이 바로 가카라시마(加唐島)다. 백제 개로왕의 아들인 무령왕은 가카라시마의 오비야우라동굴에서 태어났다. 개로왕 재임 당시 후궁인 어머니가 왜국으로 오던 길에 산달을 맞아 서기 461년에 출산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백제 제25대 왕에 등극한다. 우리나라 남해안에서 대마도를 거쳐 가라쓰로 오는 뱃길은 한일 간 최단 거리다. 1600여 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한반도와 왜국 지배층 간 깊은 관계를 보여준다.

일본 도자기 산업 성지, 아리타 도자기 마을
아리타 도자기의 생산지인 ‘아리타마을(有田町)’은 나지막한 산에 둘러싸인 산촌이다. 14대 이삼평의 안내로 올라간 도잔신사 위쪽에서 내려다보니, 우리나라 시골 마을처럼 정겹다. 작은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곳곳에 도자기를 굽는 가마 굴뚝이 보인다. 아리타마을과 이마리(伊萬里)는 일본에서 도자기 산업의 ‘성지’로 불린다. 아리타야키, 사쓰마야키, 하기야키가 일본에서 3대 도자기로 꼽힌다. 이들 가운데 고품질 백자(白磁) 생산에 가장 성공한 곳이 아리타마을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이삼평(李參平∙현지 발음 이산페이)이 아리타마을 이즈미야마(泉山)에서 도자기 원재료가 되는 자석(磁石∙고령토) 광산을 발견했다. 그는 조선 도자기 기술을 기반으로 해서 1300도가 넘은 고열로 생산하는 설비를 만들어 1616년 일본 최초로 백자 생산에 성공했다. 동인도회사가 1650년쯤부터 ‘이마리야키’를 유럽 각국으로 수출했다. 일본 도자기의 세계화가 성공한 순간이다. 아리타나 이마리 근교에서 생산된 자기는 모두 이마리항에서 수출됐기 때문에 ‘IMARI’로 표기됐다. 당시 유럽 상류층 사이에서 이마리야키 또는 ‘아리타야키’로 불리는 일본 도자기는 비싼 가격에 거래됐다.

도잔신사와 이삼평 갤러리
아리타에 있는 도자기 마을은 도자기 장인의 삶과 흔적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작은 골목을 따라 이어지는 도자기 예술가의 작업장, 가마터, 갤러리, 박물관 등이 모여있다. 지금도 수백 년째 도자기를 굽는 도공의 후예가 남아 있는 전통의 공예 거리다. 아기자기한 도자기 숍이나 카페에서는 직접 만든 생활 자기부터 고급 예술 도자기까지 다양한 제품을 감상할 수 있다. 조선 도공의 혼이 깃든 골목을 천천히 걷다 보면 450여 년 전 일본에 끌려와서 뿌리를 내린 조선 도자기 장인의 강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도자기 마을 한가운데 구릉지 위에 일본 도자기 산업의 ‘성지’로 불리는 ‘도잔신사(陶山神社)’가 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백자(白磁) 생산에 성공, 일본 도자기 산업의 역사를 연 조선 도공 이삼평을 모신 신사다. 20대 중반에 일본에 온 그는 80대까지 살다가 1655년 사망했고, 3년 뒤 1658년 그를 기린 도잔신사가 만들어졌다. 이삼평이 백자 생산에 성공한 300년을 기념해 마을 주민의 주도로 1917년 도잔신사 위쪽에 ‘도조 이삼평 비’도 건립됐다. 신사 본전에서 뒤로 난 산길로 10여 분 올라가면 기념비가 있다. 14대 이삼평의 안내를 받아 이삼평 비를 찾아 참배했다. 전쟁 포로로 고향을 떠나 일본 산촌에 들어와 조선의 백자를 재현해 낸 도공 이삼평을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14대 이삼평은 “일본 전국에 있는 수만 개의 신사 가운데 입구 ‘도리이’가 백자로 만들어진 유일한 신사이며 신을 모시는 신사보다 더 위에 개인 ‘비석’이 있는 곳도 없다”고 설명했다.

Interview 14대 이삼평
“조선(한국)에 은혜 갚을 것”

일본 사가현 아리타 도자기 마을에서 14대 이삼평에게 환대를 받았다. 1600년대 초 이삼평이 발견한 ‘이즈미야마 자석 광산’ 앞에서 만난 14대 이삼평은 자석장(磁石場)에 이어 도잔신사와 이삼평 비, 이삼평 갤러리까지 함께 걸으며 아리타 도자기와 그의 조상 얘기를 들려줬다. 이삼평 도공에게는 아직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듯하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국은 자주 방문하는지.
“매년 두 차례 정도 한국에 간다. 작년 연말에도 한국에서 열리는 도자기 축제에 참석했다. 지난 5월에는 한국 중·고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200여 명의 교사가 아리타마을을 방문해서 안내하기도 했다. 최근 한일 간 상호 방문객이 부쩍 늘어난 것 같다.”
사료를 보면 1대 이삼평의 탄생 연도와 출생지가 정확하지 않던데.
“조선에서 출생지는 충청도 공주라고 아버지에게 들었다. 임진왜란 당시 건너와서 다른 지역에서 지내다가 20년쯤 지나서 아리타마을에 가마터를 만들고 자리를 잡았다. 80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마에서 도자기를 구웠다.”
조상으로부터 전해지는 유훈집이 있는지.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두 가지 당부를 들으며 자랐다. 첫째, 열심히 수련해서 도자기를 제대로 만들 것. 둘째, ‘조선’이 있었기 때문에 ‘이삼평’이 있고, ‘아리타 도자기’가 탄생했다. 선조의 고향인 조선(한국)에 은혜를 갚아라. 아버지의 이 말씀을 늘 새기며 살고 있다.”
이삼평을 모신 도잔신사는 자주 참배하는지.
“국내외에서 도자기 연구자가 찾아온다. 도잔신사는 아리타마을의 ‘수호신’이다. 늘 세상사에 최선을 다하고, 경건한 마음을 가지려고 힘쓰고 있다.”
현재 14대인데, 대를 이을 후계자는 있나.
“올해 대학을 졸업한 20대 초반 딸을 하나 두고 있다. 다행히도 도자기에 애정이 많아 연구도 열심히 하고, 가마터에서 함께 도자기를 굽는다. 한국에도 관심이 많아 최근 한국에 가서 일을 하다가 귀국했다. 기회가 되면, 취업 비자를 받아 한국에서 도자기 관련 연구 업무에 종사하고 싶다고 한다. 딸아이가 도자기를 통해 한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일을 계속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