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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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제도는 동아시아 역사가 다른 지역과 차별되는 지점 중 하나다. 한나라 때 처음 원형이 나타난 과거제도는 이후 수당 시대 과도기를 거쳐 송대에 이르러 우리가 아는 형태로 정착했다. 그전까지 국가의 주요 공직은 세습되는 것이 보편적이었고, 이는 족벌에 기반한 세력이 왕조보다 길게 존재하며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형성하는 데 큰 걸림돌이었다. 통신이나 교통수단이 마땅치 않았던 시절, 지역 기반의 귀족 집단이 중앙정부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딴죽을 걸었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게다가 세습제는 인재 풀이 극도로 제한되기에, 국가적인 재능이 충분히 활용되지 못한다는 문제도 있었다. 동아시아 역사의 클리셰는 군사적 재능으로 가득 찬 영웅이 기존 체제를 부수고 새로운 왕조를 만들지만, 후손의 재능이 범용해지고, 중앙정부의 역량보다 세습 귀족의 힘이 세지며 결국 나라가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다는 거다. 외부 재능 수혈 없이 최초 왕조를 세웠던 공신의 후손이 지속적으로 중앙정부에 남아 있기에, 왕조의 전반적인 역량이 쇠락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과거제도는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동아시아 특유의 발명품이다. 일례로 과거제도가 어느 정도 정착했던 당나라 시절, 신라시대 최고의 천재라 일컬어지는 최치원이 6두품 출신을 극복할 길이 없기에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18세에 과거에 급제한 것은 잘 알려진 일화다. 당나라 과거제도는 당시 중국 대륙에 거주했던 재능 있는 사람뿐 아니라, 한반도에서 태어난 최고 두뇌까지 당나라를 위해 일하게 한 제도인 셈이다. 출신 성분과 관계없이 시험만 잘 보면 큰 역할이 맡겨지기에 사회의 총체적 역량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 거다.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두뇌가 외국인 노동자라는 설움을 기꺼이 감내하고 미국으로 떠나는 것처럼 말이다.

과거제도 정착은 예기치 않은 사회적 효과를 불러왔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결투 신청을 했던 서양과 달리, 우리는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한다. 연인인 춘향이를 변학도에게 빼앗긴 이몽룡이 선택한 길은 변학도 암살이 아니라 공부하는 것이었다. 과거 급제만 하면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시스템이 조선에 정착돼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 게다. 사사로운 원한조차 국가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시스템이 허용한 범위 안에서 해소하겠다는 당시 사회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 시대 ‘춘향전’이 서양에서 쓰인 소설이었다면, 아마도 변학도와 이몽룡의 결투로 이야기가 끝났을 거다.

또 다른 사회적 효과는 시험 대상이 되는 과목이 폭발적으로 발전한다는 거다. 군사부일체, 즉 왕은 스승이나 아버지 같은 사람이기에 절대적 충성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유학(儒學)은 지배 계층에 굉장히 매력적인 사상이다. 백성이 유학을 신봉한다면, 군사적으로 억압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왕조에 충성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제도에 유학이 필수과목이 되는 건 필연이다. 과거를 준비하는 모든 사람이 자연스레 유학을 깊이 공부하게 될 것이며, 과거에 급제할 정도로 뛰어난 사람은 하나같이 뛰어난 유학자가 돼, 왕에게 절대 충성할 개연성이 크다. 그 과정에서 유학은 극도로 성장하고, 유학의 원류인 중국에서조차 우러를 정도의 이황, 이이 같은 최고의 유학자가 정치하는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김우창 한국과학 기술원(KAIST) 산업 및 시스템공학과 교수 - 서울대 산업공학, 미 프린스턴대 경영과학 및 금융공학 박사
김우창 한국과학 기술원(KAIST) 산업 및 시스템공학과 교수 - 서울대 산업공학, 미 프린스턴대 경영과학 및 금융공학 박사

본격적인 산업화 경쟁이 시작되며 그 색이 약간 흐려지긴 했지만, 인공지능(AI) 판의 경쟁 문법은 과거제도와 상당히 닮아있다. AI 분야의 젊은 연구자에겐 몇몇 알려진 학회에 논문을 출간하는 것이 지상 과제가 된다. 통상 ‘톱 AI 콘퍼런스’라고 하는데, 신경정보처리시스템학회(NeurIPS), 국제머신러닝학회(ICML), 국제표현학습학회(ICLR) 등 부동의 톱 3를 포함해 10개 정도의 국제 학회를 의미한다. 막 커리어를 시작하는 젊은 학자에게는 이 학회에 논문을 총 몇 편 냈는가가 본인의 성과 지표가 된다. 이러한 객관적인 지표가 좋은 사람이라면, 구글이나 오픈AI 같은 회사에도 쉽게 취직되고, 상위권 대학교수 임용도 용이해진다.

이 학회에 논문을 출간하는 데 본인 소속이나 과거 연구 실적은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저자가 MIT 교수든 카이스트 학부생이든 블라인드 리뷰어가 더 좋은 논문을 냈다고 평가해 주면, 논문이 출간되는 거다. 또한 연구 주제도 어느 정도 잘 정의돼 있으며, 무엇보다 논문 평가 방식이 상당히 객관적이다. 예를 들어 가짜 뉴스를 탐지하는 알고리즘 연구를 했다면, 본인 알고리즘이 소위 SOTA(state-of-the-art)보다 더 나은 성능을 낸다는 것을 잘 보여주면 된다. SOTA란 해당 과업을 위해 현재까지 나온 알고리즘 중 가장 좋은 성능을 내는 것을 의미한다. AI 판에서 경쟁은 모두가 인정하는 하나의 목표를 뛰어넘는 것이고, 그 뛰어넘는다는 것의 정의와 정량적 기준이 명확하다.

이러한 경쟁 문법은 전 세계 모든 젊은 두뇌에게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내가 미국의 금수저든 인도의 하층민이든 상관없다. 나이, 종교, 성별 모든 것을 뛰어넘어 좋은 연구 결과만 낸다면 출세할 수 있다. AI가 과거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폭발적으로 발달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전 세계의 수없이 많은 젊은 재능이 AI에 올인할 수 있는 경쟁의 문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AI가 모든 재능을 빨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다. 과거 신라의 최고 두뇌였던 최치원이 당나라 과거를 보기 위해 유학길에 오른 것처럼 말이다.

톱 AI 콘퍼런스에 한국인 학자가 상당히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우리나라 AI 역량은 세계 5~10위권으로 평가되는데, 경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나 최근 들어 지속적으로 어려워지고 있는 이공계 상황을 감안하면, 괄목할 만한 성과다. 

안타까운 사실은 부동의 1·2위인 미국·중국과 격차가 너무 압도적이라는 거다. 순위로는 몇 단계 차이 나지 않지만, 그 격차는 소위 ‘넘사벽’에 가깝다. 특히 중국의 양적 성장은 무서울 정도다. 앞서 언급한 톱 AI 콘퍼런스에는 아주 많은 논문이 투고된다. 일례로 필자가 참여했던 ‘국제인공지능학회(AAAI)-25’에는 총 1만3000편의 논문이 투고됐다. 이 중 3000여 편이 게재 승인됐는데, 물리적으로 3000개의 발표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최상위급 논문 일부만 구두 발표 기회가 주어졌다. ‘AAAI-25’의 경우 단 601편만이 구두 발표 대상이었다.

이 601편 중 중국인 학자가 저자로 참여한논문은 442편이다. 한국인 학자 논문은 17편이다. 미국과 중국을 제외하면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논문 수가 상위권이긴 하지만, 중국과는 압도적인 차가 있다는 표현 말고는 할 말이 없다. 승자독식이 일반적인 기술 분야의 경쟁 원리임을 생각한다면, 필연적으로 다가올 AI 기반 산업 전환기에 우리 미래는 그리 밝지 않음을 의미한다.

새롭게 들어선 이재명 정부에서는 AI를 국가 성장의 최우선 도구로 활용하겠다는 걸명확히 밝혔다. 여러모로 중차대한 시기, 현명한 정책을 통해 우리나라의 밝은 미래를 설계하기를 희망한다. 

김우창 한국과학기술원 산업 및 시스템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