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설명│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월 취임 직후 행정명령을 통해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개발을 공식 중단하고, 민간 중심의 암호화폐 생태계를 지지하는 입장을 표했다. 이에 더해 미 상원은 5월 25일(이하 현지시각) ‘스테이블 코인을 위한 국가 혁신 유도·확립법(Guiding and Establishing National Innovation for U.S. Stable coins Act·지니어스액트)’의 절차 통과(입법 전진)로, 법안의 연내 본회의 통과 가능성을 키웠다. 다만 미 민주당은 해당 법안이 자금세탁방지(AML)와 이해 충돌 방지 조항이 미비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반대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2024년 말부터 ‘암호자산시장규제법(MiCA·Markets in Crypto-Assets Regulation)’을 시행, 암호화폐 규제의 시장 제도화를 도모하고 있다. MiCA는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할 때, 준비자산의 최소 30%를 EU 역내 은행에 예치하도록 하는 규정을 담고 있는데, 이런 규정은 가장 오래되고 많이 거래되는 스테이블 코인인 테더(Tether)와 미국 달러를 기반으로 한 코인 서클(Circle) 등 글로벌 스테이블 코인 발행사 전략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를 두고 필자는 “미국이 디지털 자산 규제를 명확히 하지 못한 사이, 유럽은 먼저 미래 금융의 지형을 그려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 미 의회가 규제 명확성을 확보하고, 국제적 벤치마킹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필자는 미국이 지금 민간 기술과 금융 안정을 조화시키기 위한 전략적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고 보며, EU MiCA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조언하고 있다.
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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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미국 비영리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은 암호화폐에 대한 세계 각국의 태도에 다양성을 조명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조사 대상인 45개국(미국·영국·일본 등)에서는 암호화폐가 일반적으로 합법이었고, 20개국(러시아·인도·베트남 등)에서는 부분적으로 금지됐으며, 10개국(중국·네팔 등)에서는 전면 금지돼 있었다. 이런 의견의 다양성은 오늘날 미 증권거래위원회(SEC) 내부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2024년 12월 SEC 위원장으로 취임한 폴 앳킨스(Paul Atkins)는 과거 암호화폐 산업 단체를 이끌던 열성 지지자고, 반면 미 민주당계 SEC 위원인 카롤린 크렌쇼(Caroline Crenshaw)는 SEC의 친(親)암호화폐 기조를 맹렬히 비판하고 있다. 크렌쇼는 SEC가 업계 내 기업에 대해 타당한 집행 조치를 포기했다고 지적하며, 앳킨스 위원장의 느슨한 접근 방식은 결국 파국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SEC 내 뚜렷한 입장 차이와 더불어 SEC와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간 관할권 분쟁도 미국 내 암호화폐 산업에 대한 안정적 규제 체계를 마련하는 일을 지연시키고 있다. SEC는 암호화폐를 증권에 가깝다고 보는 반면, CFTC는 상품으로 간주하고 있어 각 기관이 자신이 암호화폐 주관 규제 기관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이다. 

이런 규제 교착상태는 곧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하 트럼프)이 암호화폐에 대한 입장을 완전히 바꿨기 때문이다. 4년 전만 해도 트럼프는 비트코인을 ‘사기’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과 부인의 자체 밈 코인(meme coin・온라인 유행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암호화폐)인 ‘$MELANIA’ ‘$TRUMP’를 출시했다. $MELANIA의 가치는 출시 후 빠르게 하락했지만, 트럼프는 $TRUMP로 수십억달러의 수익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주요 투자자를 위한 만찬 행사도 열었다. 

트럼프는 이 같은 ① 암호화폐 홍보를 통해 실리콘밸리와 화해에 나섰고, 연준이 CBDC를 개발하지 못하도록 하는 행정명령도 발동했다. 이는 공공 부문이 민간 디지털 자산의 경쟁자가 되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또 미국 의회에서 관련 법제화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예를 들어 ‘지니어스액트’는 최근 상원에서 ‘절차상의 전진 단계(procedural advance·상원 본회의 투표를 앞둔 상태)’에 있으며,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등 야당인 민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과반 지지를 확보했다. 

하원은 조금 더 설득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스테이블 코인에 대한 법적 틀은 마련될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는 투명성과 자산 담보에 대한 실행 가능한 규칙이 포함될 것으로 예상된다. 글로벌 은행 스탠더드차타드는 지니어스액트가 최종 통과될 경우 미국 내 스테이블 코인 시장이 현재 약 2400억달러(약 326조8100억원)에서 2028년 약 2조달러(약 2723조원)로 성장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며, 이 중 대부분은 미국 국채에 투자돼 정부 재정 적자 보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워드 데이비스 나트웨스트그룹 회장 - 스탠퍼드대 경영학 석사, 전 영란은행 부총재, 전 영국 금융감독청(FSA)  청장
하워드 데이비스 나트웨스트그룹 회장 - 스탠퍼드대 경영학 석사, 전 영란은행 부총재, 전 영국 금융감독청(FSA) 청장
물론 지니어스액트가 제정되더라도 더욱 변동성 큰 기타 디지털 자산에 대한 규제 불확실성은 여전하다. 그러나 이런 자산에 대해서도 최근 변화한 입법 분위기가 감지된다. 비트코인 가격이 다시 상승세를 보이는 것도 의회가 암호화폐를 보다 완화된 규제를 적용하는 CFTC 관할로 이전할 것이라는 기대(혹은 희망)에 따른 것이다. 2024년 관련 법안은 비록 무산됐으나, 정치적 지형은 바뀌었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도 이 문제에 대해 씨름하고 있다. 이 가운데 미국이 참고할 수 있는 명확한 규제 모델이 있을까. 요즘 워싱턴 정치권에서는 유럽을 본보기로 삼기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 ② 트럼프가 EU를 ‘미국을 이용해 먹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EU는 이미 MiCA를 마련해 시행에 들어갔고, 이는 미국 입법자에게 참고가 될 만한 실용적 모델로 보인다. 

MiCA는 2023년 처음 재택됐고, 2024년 말 시행돼 아직 그 영향을 완전히 평가하기는 이르다. 그럼에도 스테이블 코인 자산 담보 기준에 대한 규정이 시장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치금은 안정적이고, 견실한 자산에 보관돼야 한다’는 MiCA의 규정은 큰 논란이 없다. 그러나 ③ 발행 코인의 가치에 대해 100% 자산으로 담보하고, 자산 30% 이상을 EU 역내 은행에 예치해야 한다는 요건은 테더와 서클 같은 암호화폐 회사의 전략 수정을 야기하고 있다. 테더는 이 규제에 만족하지 못해 유럽 시장 대응 전략을 고민 중이고, 서클은 규제를 수용할 준비를 하고 있다. MiCA의 인가를 받고자 하는 기업은 처음에는 자국 규제 기관에 신청해야 하며, 자산 규모가 시스템적으로 중요해질 경우 EU 차원의 규제를 받는다. 

그렇다면 MiCA는 미국 입법자에게 어떤 교훈을 줄 수 있을까. 미국 재무 장관인 스콧 베선트는 미국 은행가에게 “규제를 국제기구(바젤은행감독위원회)에 위탁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 발언은 ④ 바젤은행감독위원회(BCBS)를 당황케 했으며, 바젤 체제의 미래가 불투명해졌다는 평가를 받게 했다. 그러나 해외 아이디어를 차용하는 건 외주화와는 다르다. 미국의 스테이블 코인에 대한 세부 사항이 마무리돼 가는 지금도 여전히 무담보 순수 암호화폐 규제라는 다음 과제가 남아있다. MiCA의 장점은 이런 부분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 의회에서 암호화폐 규제 문제에 대해 내고 있는 신호는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 있다. 다만 비트코인을 준비금으로 삼자는 법안이나 트럼프의 재정적 이해관계를 겨냥한 듯한 부패 대응 법안은 의회 통과 가능성이 작아 보인다. 

미 하원의 금융서비스위원회(HFSC)와 상원 은행위원회(SBC)가 머리를 맞대고 브뤼셀(벨기에)의 EU 사무국을 방문해 현장 조사하는 것을 검토해 볼 만하다. 이 출장은 적어도 맛있는 식사가 보장될 것이고, 어쩌면 배울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Tipㅣ

① 트럼프는 2020년대 초까지 비트코인을 사기라고 비판하며 암호화폐 산업에 부정적 입장이었다. 이 때문에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2024년 재선을 위한 대선 운동부터 친암호화폐 노선을 분명히 했다. 실리콘밸리의 기술 및 핀테크(fintech·금융과 기술의 합성어) 업계의 후원을 받기 위해 암호화폐 산업 지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것으로 해석됐다. 

② 트럼프는 1기(2017~2020년)부터 미국과 EU 간 무역 불균형,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내 미국 방위비의 높은 비중 등에 불만을 내비쳤다. 또 EU의 미국 빅테크 규제에도 비판의 목소리를 키웠다. 이런 무역, 안보, 기술 규제 측면에서 트럼프는 EU를 가리켜 미국의 희생을 기반으로 자국 이익을 챙겨온 조직이라고 인식하고 있으며, 국제 규범이나 다자주의보다 미국 우선주의에 입각한 양자 협상과 자국 중심 정책을 선호하는 입장을 유지 중이다. 

③ MiCA는 스테이블 코인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발행 기업은 해당 코인에 대한 가치를 100% 자산으로 담보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여기서 자산은 유동성 높고, 안정적이며,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자산 가운데 최소 30% 이상은 EU 역내 은행에 예치해야 한다. 이 같은 규정은 사용자가 보유한 스테이블 코인의 환급 요청에 대비해 발행사가 언제든 자산을 현금화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시스템 리스크를 줄이고, EU 내 금융 안정성을 강화하기 위함이다. 

④ 바젤은행감독위원회(BCBS)는 1974년 주요 10개국 중앙은행 총재가 설립한 은행 감독 기관 위원회다. 현재 45개 중앙은행과 금융 당국이 회원으로 속해있다. 1971년 리처드 닉스 미국 대통령의 달러 금태환 정지 선언으로 브레턴우즈협정이 붕괴되고 자본 흐름의 자유화 등 국제금융 환경이 변했다. 이에 따라 자국 소재 금융기관의 건전성 규제에 초점을 기울인 기존 감독 체계로는 국제적으로 영업하는 은행 규제에 한계가 있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특히 1974년 독일 헤르슈타트은행 도산이 이 은행과 거래하던 은행 및 국제 외환시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면서 국제 영업을 영위하는 은행에 대한 감독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국제 공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고, 위원회가 설립됐다. 위원회는 국제금융 규제 기준인 바젤 협약을 만든다. 현재 바젤 3.1을 시행 중이다. 

하워드 데이비스 나트웨스트그룹 회장

정리=박진우 기자

정리=박서우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