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미국 예외주의는 미국은 역사적, 이념적, 종교적 이유 등으로 다른 국가와 구별되는 ‘특별한 국가’라는 환상이다. 다른 국가와 달리 미국은 막대한 재정 적자와 부채에도 시장의 신뢰를 유지하며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경제적 특권이 있다는 분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미국은 지난 4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폭탄 후폭풍으로 증시 부진, 국채 금리 상승, 달러 약세 등 삼중고를 겪었다. 다행히 지난 5월 중순부터 빠르게 회복하면서 연초 수준을 회복했지만, 여전히 미국의 경기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5년물 신용부도스와프(CDS) 스프레드(가산 금리)가 대표적이다. CDS는 채권 부도를 대비해 지불하는 보험 성격의 이자율이다. 채권 발행자의 신용도가낮아져 위험 부담이 클수록 스프레드는 올라간다. 미국의 5년물 CDS 스프레드가 오르는 건 미국 채권에 대한 위험 부담이 커지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인베스팅닷컴에 따르면, 미국의 5년물 CDS 스프레드는 6월 18일(이하 현지시각) 41.85bp(1bp=0.01%포인트)를 기록했다. 올해 초 트럼프 대통령 취임 직후(1월 23일 29.68bp)와 비교해 41% 급등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 세계에 상호 관세를 부과한 4월 2일 미국 5년물 CDS 스프레드는 63.38bp까지 뛰었다. 2009년 금융 위기 때 기록한 87.00bp(2009년 1월 2일) 이후 16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였다. 이후 미국 5년물 CDS 스프레드는 하락했지만 여전히 중국(47.79bp), 그리스(52.39bp)와 비슷한 수준이다. 전 세계 투자자가 미국 경기 상황을 중국이나 그리스와 비슷하게 보고 있다는 의미다. 참고로 같은 기간 한국의 5년물 CDS 스프레드 27.17bp다. 필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근거 없는 관세정책이 미국에 대한 대외 신뢰도를 낮추고 있다고 해석한다. 상대국이 미국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있는 경제 파트너로 보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미국 경기를 지탱하는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에 대한 의문까지 불러오고 있다고 평가한다. 필자는 트럼프 대통령 스스로가 글로벌 리더십을 지탱해 온 제도를 약화시키면서 오히려 다른 국가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특히 생산성 둔화, 고령화, 디지털 전환(DX)에서 뒤처진 유럽이 미국 예외주의 붕괴의 최대 수혜자가 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
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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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지금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그 이유는 향후 역사가들이 논쟁하게 될 것이며, 많은 사람에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결정처럼 보일 것이다. 미국은 지금 자국의 강점이었던 개방성, 제도, 글로벌 관여 정책을 스스로 훼손하고 있다. 이런 흐름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정책에서 시작됐다. 명확한 목표 없이 혼란스럽고 일관성 없는 방식으로 도입된 관세는 수입 물가를 상승시키고 세계 무역을 교란했다. 특히 미국을 신뢰할 수 있는 경제 파트너로 보지 않게 하며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에 대한 의문까지 불러일으켰다. 문제는 미국 대학으로 향했다. 미국의 과학기술 리더십을 오랫동안 떠받쳐온 연구 기관들이 연구 자금 삭감, 기금 과세, 비자 제한 등의 영향으로 세계 인재를 유치하고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학계만의 손실이 아니라 미국의 혁신력과 그에 기반한 경제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미국에서 가장 역동적인 분야인 기술 산업도 정치적·규제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애플, 구글, 메타 등 주요 기업이 자국 내에서 강한 규제를 받는 동안 해외 경쟁 기업은 자국 정부의 산업 정책 지원을 받고 있다. 세계 각국이 경쟁에 대비하는 동안 미국은 오히려 과거를 되살리려는 듯 제조업 부활이나 아동 노동 규제 완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련의 정책 변화에는 미국이 그동안 창출해 온 긍정적인 외부 효과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가 있다. 과학, 안보, 혁신에서 미국의 리더십은 전 세계에 혜택을 줬지만, 트럼프 정부는 이를 미국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는 후퇴였고 이는 오히려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을 지탱해 온 제도를 스스로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피넬로피 코우지아노 골드버그 예일대 경제학부 교수 - 미국 스탠퍼드대 경제학 박사, 전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전 ‘아메리칸 이코노믹 리뷰’ 편집장
피넬로피 코우지아노 골드버그 예일대 경제학부 교수 - 미국 스탠퍼드대 경제학 박사, 전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전 ‘아메리칸 이코노믹 리뷰’ 편집장

유럽, 개방성 수용하고 규제개혁 나서야

미국이 후퇴한다고 해서 다른 국가의 부상이 막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유럽에서 이 흐름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유럽은 오랜 기간 생산성 둔화, 고령화, 디지털 전환에서 뒤처지는 등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그런데 미국이 주춤한 사이 유럽이 다시 따라잡을 기회가 생겼다. 최근 두 가지 변화는 유럽에 희망을 주고 있다. 먼저 독일이 부채 조달 규모를 제한한 헌법상 ① 채무 제동(debt brake) 규정을 완화하면서 시급했던 공공투자 여력이 생겼다. 또 지정학·경제적 분열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유럽은 더 통합적이고 목적 있는 공동 대응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낙관주의만으로는 부족하다. 유럽이 미국의 빈자리를 제대로 메우기 위해서는 네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유럽연합(EU)은 트럼프 정부의 분열 전략에 말려들지 말고, 회원국이 개별적으로 미국과 협상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유럽은 공동 입장을 유지해야만 시장 규모를 지렛대로 활용해 자국의 이익을 지킬 수 있다. 

둘째, 유럽은 개방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미국이 국제 학생과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 점점 배타적인 태도를 취할 경우 유럽은 인재 유입을 통해 ‘두뇌 유출’의 수혜국이 될 수 있다. 또한 첨단 기술 개발에 필수적인 희귀 광물이나 자원은 유럽 내에 부족한 만큼 중국을 포함한 다른 국가와 생산적 무역 관계 유지는 필수다. 

셋째, 유럽은 규제 개혁에 나서야 한다. 식품 안전, 환경보호, 노동권 등에 있어 유럽의 높은 기준은 전 세계의 모범이다. 하지만 일부 산업에선 과도하거나 비효율적인 규제가 투자와 혁신을 막고 생산성을 저해하고 있다. 이는 기존 이해관계자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 집중된 규제가 사회 전체의 발전을 가로막는 경우에 해당한다. 가령 자격 있는 난민이 단순한 행정 절차 때문에 일할 수 없는 경우가 그렇다. 물론 이런 변화는 특히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는 유럽 국가에는 정치적으로 어려운 과제일 수 있다. 유럽 노동자가 기꺼이 근로시간을 늘리거나 직업 안정성과 긴 휴가를 포기하는 등 힘든 일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의 성취를 지키기 위해 미래의 역동성을 희생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더 큰 손실이다.

마지막으로, 유럽은 숙련직뿐 아니라 비숙련직까지 포괄하는 이민정책을 통해 ②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인구 감소와 생활수준 향상으로 돌봄, 건설, 서비스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손이 부족한 상황이다. 기본적인 사회 및 가사 노동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에서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이나 혁신은 불가능하다. 최근 유럽 내 반이민 정서와 극우 정당의 부상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가장 어려운 과제일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해결해야 할 핵심 과제인 건 분명한 사실이다.

미국이 국제 무대에서 물러나는 지금은 유럽이 수십 년 만에 맞이한 중요한 기회다. 이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는 유럽이 얼마나 단결된 대응과 개방성을 유지하느냐에 달렸다. 또 규제 환경을 현대화하고 실용적인 이민정책을 펼치느냐도 중요하다. 수십 년 만에 찾아온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유럽을 대신해 미래를 준비하는 데 한시도 쉬지 않는 아시아가 주도권을 가져갈 것이다. 

Tipㅣ

국가의 적정 부채 한도를 정하고, 이를 초과하는부채 발행을 제한하는 재정정책. 1990년대 중반 재정 위기를 겪은 독일은 채무를 통한 확장 재정에 제동 장치를 만들었다. 독일은 금융 위기 여파가 가시지 않은 2009년 한 해 재정 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3%를 넘지 않도록 하고, 국가부채 한도도 GDP의 0.35%로 제한하도록 헌법에 명문화했다. 하지만 이런 채무 제동은 국채 발행을 엄격히 제한하면서 투자 여력을 낮추는 등 독일 경제를 악화하는 원인이 됐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6월 4일 독일은 2029년까지 기업에 70조원대 규모의 세금 부담을 줄여주는 등 채무 제동 규정을 완화하는 조치를 내렸다.

노동력 부족은 독일 경기 침체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독일경제연구소가 최근 “공휴일을 하루 줄이면 GDP가 최대 0.2% 늘어난다”고 주장한 보고서를 내놓은 배경이다. 보고서는 “이제 더 적은 노동 대신 더 많은 노동을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넬로피 코우지아노 골드버그 예일대 경제학부 교수

정리=윤진우 기자

정리=박서우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