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방문한 카스텔로 디 볼파이아의 오너 페데리카 마스케로니가 프렐리우스 베르멘티노를 홍보하고 있다. /사진 김상미
한국을 방문한 카스텔로 디 볼파이아의 오너 페데리카 마스케로니가 프렐리우스 베르멘티노를 홍보하고 있다. /사진 김상미

무더위에 지친 어느 날, 시원한 파도 소리와 상쾌한 바람이 절실할 때가 있다. 바로 베르멘티노(Vermentino) 한 잔이 필요한 순간이다. 싱그러운 과일 향이 매력적인 베르멘티노는 우리를 순식간에 파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지중해의 테라스로 데려다준다. 요즘 들어 인기가 급부상 중인 베르멘티노. 유독 여름에 이 와인이 더 맛있는 이유는 뭘까.

베르멘티노는 한때 가볍고 단순한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 품종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기후변화에 강하고 다양한 양조 스타일을 소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잠재력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연한 레몬 빛에서 피어나는 풍부한 과일 향, 섬세한 허브 향, 경쾌한 산미, 바닷바람을 머금은 듯한 짭짤한 뒷맛은 베르멘티노를 어떤 요리와도 잘 어울리는 현대적인 와인으로 각광받게 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남부 등 지중해 연안에서 폭넓게 재배되지만, 그중에서도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마렘마(Maremma) 지역은 베르멘티노의 새로운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 마렘마는 과거 말라리아가 창궐하던 습지였다. 이곳이 이탈리아에서도 가장 역동적인 와인 산지로 탈바꿈한 것은 20세기 중반 대규모 개간과 투자가 진행된 뒤부터였다. 최근 들어 인지도가 상승하고 있으나 마렘마는 애초 우수한 와인 산지가 될 가능성이 충분한 곳이었다. 토스카나의 강렬한 햇볕이 포도의 당도를 끌어올리고 티레니아해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해풍은 포도의 풍미를 신선하게 유지한다. 여기에 더해 산, 구릉, 계곡 등 복합적인 지형과 토질은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포도의 생산을 가능하게 한다.

현재 마렘마에서는 여러 품종이 재배되고 있지만 베르멘티노는 단연 마렘마를 대표하는 청포도로 자리매김했다. 무엇보다 마렘마의 테루아(terroir·포도 재배 환경)가 베르멘티노와 기막히게 잘 맞아서다. 시원한 바닷바람은 베르멘티노가 천천히 익으면서 당도와 산도의 완벽한 균형을 이루도록 돕는다. 다양한 토질도 한몫한다. 모래 토양에서는 산뜻한 스타일이, 석회질과 점토질 토양에서는 구조감이 탄탄한 타입이, 화산 토양에서는 복합미가 뛰어난 와인이 생산된다. 따라서 같은 베르멘티노여도 와이너리마다 미묘하게 다른 맛을 선사해 골라 마시는 재미가 있다. 국내에서 만나볼 수 있는 마렘마 베르멘티노 중 놓쳐서는 안 될 5종을 소개한다.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카스텔로 디 볼파이아, 프렐리우스

볼파이아는 토스카나의 명품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으로 유명한 와이너리다. 프렐리우스는 과거 로마인이 소금을 채취하고 물고기를 양식하던 마렘마의 고대 호수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 와인은 레몬, 복숭아, 파인애플 등 과일 향이 싱그럽고 은은한 허브 향이 청량감을 더한다. 여운까지 길게 이어지는 달콤한 풍미가 상당히 매력적이다.

발 델레 로제, 리토라레

발 델레 로제는 토스카나의 와인 명가 체키가 1996년 마렘마에 설립한 와이너리다. 이탈리아어로 ‘연안’이라는 뜻의 리토라레를 이름으로 붙여 바다와 가까운 곳에서 생산된 와인임을 강조했다. 사과, 배, 멜론 등 풍부한 과일 향과 경쾌한 산미가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질감이 부드러워 편하게 즐기기 좋은 스타일이다.

마쩨이, 벨구아르도

마쩨이는 600년의 와인 역사를 자랑하는 토스카나의 유서 깊은 가문이다. 벨구아르도 베르멘티노는 청사과, 자몽, 수밀도 등 싱싱하고 달콤한 과일 향이 풍성한 아로마를 구성한다. 지중해 허브의 향긋함이 신선함을 더하고 감칠맛이 감도는 여운은 이 와인의 탁월한 음식 친화력을 말해준다.

니타르디, 벤

미켈란젤로가 소유했던 집과 포도밭에 와이너리를 설립한 니타르디는 지금도 예술적인 레이블과 우수한 와인으로 우리의 눈과 입을 즐겁게 해주는 생산자다. 이들이 만든 벤 베르멘티노는 복숭아와 열대 과일의 감미로운 향이 풍부하고 부드러운 질감이 상큼한 신맛과 어울려 와인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모리스팜, 베르멘티노

1662년에 설립된 모리스팜은 7대째 이어오는 가족 경영 와이너리로 마렘마의 터줏대감이다. 이들이 만든 베르멘티노에는 비오니에(Viognier) 품종이 약간 섞여 있어 와인이 한층 화사하다. 레몬, 살구, 복숭아 등 풍성한 과일 향이 미네랄의 감칠맛과 조화를 이루고 아카시아와 재스민 같은 꽃 향이 우아함을 더한다.

베르멘티노는 장점이 많은 와인이지만, 그중에서도 음식 친화력은 단연 최고다. 상큼한 산미는 기름진 음식의 느끼함을 말끔히 씻어주고, 짭조름한 뒷맛은 해산물이나 치즈처럼 짠맛이 도는 음식과 훌륭한 궁합을 이룬다. 특히 향긋한 허브 향은 우리 음식에 자주 들어가는 파, 마늘, 깻잎처럼 향이 강한 재료와 놀랍도록 잘 어울린다.

베르멘티노와 즐기기 좋은 음식을 알아보자. 생선회, 조개, 성게 같은 해산물에 곁들이면 음식의 바다 내음이 와인의 감칠맛과 근사하게 어우러진다. 명란을 넣은 파스타나 비빔국수는 와인의 짭짤한 맛과 멋진 하모니를 완성한다. 해물파전과 즐기면 와인의 상큼함이 기름진 맛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고 와인의 허브 향이 파의 향긋함과 맛있는 조화를 이룬다. 오징어볶음이나 떡볶이처럼 매콤한 음식과 함께 마시면 와인의 달콤한 과일 향이 음식의 매운맛을 완화해 준다. 배달음식도 예외는 아니다. 피자는 물론 중국요리나 분식 등 어떤 음식에도 베르멘티노는 잘 맞는 친구가 되어 준다. 마렘마 베르멘티노는 그저 시원한 화이트 와인이 아니다. 지중해의 따사로운 햇살과 시원한 파도 소리를 담은 여름의 한 조각이다. 지금 바로 냉장고에 베르멘티노 한 병을 넣어두자. 여름은 이제 막 시작됐다.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