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12월, 중국의 인기 화가 류예(劉野)의 작품 ‘헬로 몬드리안(Hello Mondrian· 2002)’이 홍콩 경매에서 약 121만8000달러(약 16억5600만원)에 낙찰됐다. 세로 60㎝ 정도의 작은 그림인 ‘헬로 몬드리안’은 한 소녀가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의 추상화를 연상시키는 패널을 품에 안고 조용히 선 모습을 담고 있다. 소녀의 표정은 무표정하며, 침착하고 내면에 집중한 듯한 인상을 준다. 들고 있는 것은 몬드리안의 작품을 모사한 것으로, 수직과 수평의 검은 선 그리고 노랑, 빨강, 파랑의 원색 블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단순한 형식은 몬드리안이 추구한 질서와 균형, 보편적 조화를 상징한다. 작품 배경은 흰색과 노란색의 따뜻한 빛으로 묘사되어 있어 사뭇 몬드리안의 차가운 이성적 추상화와는 다른 감성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런데 류예는 왜 자신의 작품에 몬드리안의 그림을 도입한 것일까.
소녀가 들고 있는 몬드리안의 그림은 단순히 모사한 오브제가 아니다. 그에게 몬드리안 작품은 그림 제목처럼 그의 예술과 정신에 대한 경배를 나타내고 있다. 류예는 단순한 무채색 선과 삼원색을 그린 몬드리안의 작품을 왜 경배의 대상으로 삼았을까.
처음부터 '추상화 화가'는 아니었다
우리는 몬드리안의 단순한 추상화에 익숙하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단순한 선과 색의 추상화가는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하기 전만 해도 그는 풍경화와 정물화를 그리며 고흐와 세잔, 입체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 작품은 후기 인상주의와 입체파 작품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만의 개성 있는 작품을 시도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그린 ‘붉은 나무(The Red Tree· 1908~10)’는 자연주의에서 추상으로 이동하던 전환기 그림의 대표작이다. 실제로 있었던 사과나무를 그렸지만, 화면 속 나무는 현실과는 사뭇 다르다. 그림에는 굽이치는 붉은 나무 한 그루가 어둡고 푸른 배경 위에 솟아 있다. 가지는 리듬감 있게 휘어지고, 강렬한 색채 대비는 나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여기엔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동시에 복잡함을 단순화하려는 첫 시도가 숨어 있다. 잎이 없는 나무는 선의 구조를 뚜렷하게 드러내고 줄기와 가지는 점차 수직과 수평으로 환원된다. 색 역시 사실을 재현하지 않고 단순하게 빨강과 파랑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조형 실험은 이후 몬드리안이 정립하는 신조형주의(Neo-Plasticism)의 출발점이 됐다.

전쟁으로 무너진 시기, 새로운 가능성을 열다
1914년, 파리에서 작업 활동을 하던 몬드리안은 병든 아버지를 보러 잠시 고국 네덜란드를 찾았다. 하지만 그 잠깐의 방문은 무려 5년간의 의도치 않은 귀향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그는 파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네덜란드에 발이 묶인다. 그러나 바로 그 고립 속에서 그는 예술 인생의 가장 결정적인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파리에서 입체주의의 영향을 흡수하고 있던 그는 네덜란드에서 더 이상 자연을 닮게 그릴 필요는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하여 그는 곡선을 지우고 깊이를 버리며 선과 색만 남긴 작품 활동을 한다. 자연의 모사보다는 자연의 본질을 그리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1917년, 그는 동료들과 예술 잡지 ‘데 스테일(De Stijl)’을 창간한다. 이 이름은 곧 하나의 예술 운동이 되며 회화와 건축, 디자인, 가구 등 시각예술 전반에 새로운 질서를 제안하는 선언문이 된다. 데 스테일은 네덜란드어로 ‘양식’을 뜻하지만 그들은 단순한 양식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시대를 다시 디자인하려 했다. 기존의 전통은 과감히 버리고 복잡한 감정도 이야기의 흔적도 걷어냈다. 회화는 더 이상 사물의 표면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표현하는 추상 언어가 됐다.
그래서 몬드리안은 회화의 기본이 되는 색과 선에 대한 본질적 시도를 한다. 기본이 되는 빨강, 노랑, 파랑 원색으로만 색을 제한하고 선은 오직 수직과 수평으로만 표현했다. 여기에 흰색, 검정, 회색만을 보조 색으로 허용하면서 그는 이 제한된 요소를 통해 최대한의 조화와 균형, 절제와 질서를 만들어냈다. 이 철저한 절제의 엄격하고 단순한 회화를 새로운 기본 조형의 세계를 뜻하는 신조형주의라고 불렸다. 몬드리안에게 조형(plastic)은 단지 회화적 형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본질적 구조, 세계의 보편성을 시각화하는 행위였다. 다시 말해, 화면 위의 선 하나, 색·면 하나는 단순한 도형이 아니라 일상과 존재 같은 본질에 대한 철학적 믿음의 표현이었다.
전쟁은 많은 것을 무너뜨렸지만, 몬드리안은 그 속에서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세웠다. 캔버스 위 직선과 원색의 조합은 결국 현대미술과 디자인 전반에 영향을 미친 기초 조형 언어가 되었다. 그는 그 시기 예술의 중심 파리에서 벗어나서, 오히려 그보다 더 넓은 세계를 열어 보였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본질적이다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뉴욕에 정착한 몬드리안은 도시의 격자 구조와 재즈 음악 특히 ‘부기우기’ 리듬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가 숨지기 전까지 그리다 완성하지 못한 마지막 유작 ‘빅토리 부기우기’에서, 마름모 형태의 캔버스는 기존의 검은 수직·수평선을 과감히 탈피한다. 노란색 띠와 빨강·파랑·회색의 작은 사각 블록을 화면에 박동처럼 채워 넣었다. 도시 거리와 네온 불빛 그리고 부기우기의 음악적 리듬을 시각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이처럼 몬드리안의 추상은 이성적 본질적인 면을 추구하면서도 말년에는 우리 일상에서 생동감 있는 조형 언어를 찾으려고 했다.
그런데 몬드리안은 왜 강박에 가까운 절제된 단순한 추상화를 그렸을까. 20세기 초 유럽은 전쟁과 이념 갈등, 산업화의 격변 속에 있었다. 예술가는 이 격변의 시대에 표출되는 다양한 욕구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다. 다다이즘은 혼란을 그대로 예술로 표현했고, 초현실주의는 무의식을 파고들었으며, 표현주의는 감정의 폭발을 택했다. 그러나 몬드리안은 반대로 격변의 시대일수록 예술은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는 신념을 나타냈다. 그것이 ‘데 스테일’이고, 그것이 신조형주의였다. 몬드리안은 “기본으로 돌아가자”고 말한 것이다.
몬드리안의 단순한 추상화가 던지는 화두는 지금도 유효하다. 복잡하고 과잉된 환경 속에서 예술과 일상은 어떤 방향을 택해야 할까. 파괴를 통한 해체인가, 현실로부터의 도피인가, 아니면 기본적인 본질로 돌아가는 것인가. 그의 단순한 본질적 선과 색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한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본질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