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드라마 ‘협상의 기술’이 인기를 끌었다. 주인공이 복잡한 기업 협상에서 보여준 전략은 협상에 관한 깊은 재미와 인상을 남겼다. 한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은 부품 물량 확보를 위해 일본의 한 회사와 협상하는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예상치 못한 변수, 상대 기업의 상황과 문화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주인공은 철저한 사전 준비와 집중력으로 성공적인 협상을 이끈다.
복잡한 이슈와 감정선이 얽힌 드라마 속 비즈니스에서 추구하는 원칙과 기준을 고민해 주인공이 협상을 풀어내는 모습이 여러 번 등장했는데, 협상가의 시각에서 흥미로웠다. 많은 이가 갖고 싶어 하는 ‘밀당(밀고 당기는)’ 대화의 기술만 다룬 게 아니었다. 필자도 과거 한 방송사와 협상 드라마를 제작한 기억이 있어 더 관심이 갔다.

협상력의 가치가 다시 주목받는 시대
세제경제포럼(WEF)과 글로벌 컨설팅 회사 등은 인공지능(AI) 시대에 인간이 갖춰야할 능력으로 공감력, 사고력, 문제 해결력, 협업 능력, 협상력 등을 꼽는다. WEF의 2025년 미래 일자리 보고서(The Future of Jobs Re-port 2025)에 따르면, 미래 가장 주목받을 능력 15개 중 절반 이상이 소통 또는 인간관계와 관련이 있다. 협상력은 더 이상 영업과 구매 부서 등 특정 직무에만 국한된 능력이 아니라는 의미다. 다양한 기업과 협상 컨설팅을 진행하다 보면, 협상력이 강한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 간에 큰 차이를 느끼게 된다. 기술과 경험의 차이도 있지만, ‘협상의 원칙(Negotiation Principles & Way)’을 중요하게 다루는지 여부가 핵심이다. 협상력이 강한 기업은 협상의 전략과 원칙을 조직과 기업이 추구하는 비즈니스 가치와 지향점에 반영한다. 협상은 상충하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양측이 공통의 답을 찾아야 하는 현실적이고 어려운 소통 과정이다. 그래서 기술과 기교가 난무하고, 상황과 상대에 따라 결과가 매우 다르며, 무엇보다 불확실하다.
아마존은 비즈니스 전반에 ‘고객 집착(cs-tomer obsession)’이라는 원칙을 견지한다. 협상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내부 협업, 외부 계약 모두 고객 이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의사 결정을 내리는 것이 요지다. 이렇듯 일관된 기준은 협상 관련 다양한 상황과 이슈를 해결하기 위한 판단 기준이자 원칙인 동시에 아마존의 협상력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프레임으로 작용한다.
협상 원칙 뚜렷하면 협상 성공률도 높아져
하버드대 로스쿨 협상 프로그램(PON· Program on Negotiation)의 2021년 보고서에 따르면, 기업 협상에서 ‘명확한 원칙’이 있는 기업은 원칙이 없는 기업보다 최종 합의율이 28%포인트 더 높았다. 또 원칙 기반 협상을 펼친 기업의 협상 후 재분쟁(계약 조건 재협상 혹은 이행 갈등) 발생 비율은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평균 36%포인트 낮았다.
기업에 ‘협상의 원칙’이 있으면 어떤 점이 더 좋을까. 다양한 협상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발견한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로, 협상에서 발생하는 이슈와 어젠다에 대한 일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문제와 논리 속에서 협상 전략은 늘 흔들리게 마련이다. 협상력이 강한 상대를 만날 경우 어려운 선택과 결정에 직면하게 되면서 협상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전술의 문제가 아니라 전략 일관성이 부족해 발생하는 전략 이슈다. 협상의 확고한 원칙과 그 원칙에 기반한 전략은 협상을 강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의사 결정에 힘을 실어준다. 원칙과 기준이 명확할 때 협상 과정에서 유연한 대응도 가능하다. 이 같은 특징은 협상력이 강한 조직과 협상 과정에서 경험할 수 있는 공통점이다.
둘째로, 원칙은 협상을 어렵게 하는 심리적 불균형을 개선해 준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전략적 소통이 가능해진다는 얘기다. 노련한 협상가는 상대를 감정의 틀 안에 가두기도 하는데, 이를 피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아무리 냉철한 사람이라도 결국 사람이고,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흔들리면 협상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를 막아줄 수 있는 게 바로 협상의 원칙이다. 확고한 협상의 원칙과 기준이 있는 기업 리더와 실무진을 만나면 느낄 수 있는 건 자신감이다. 물론 전략·전술적으로 많은 준비가 필요하나, 그들에게 이미 형성된 안정감은 협상 준비와 진행 과정 내내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이렇듯 확고한 가치와 원칙을 중심으로 한 협상 전략에는 힘이 실린다. 사전 정보 수집과 분석 단계부터 명확한 협상의 표준을 정하고, 중장기적 관점으로 시나리오를 준비하며, 그에 맞는 컨센서스를 내야 한다. 이렇게 준비한 협상에는 감정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협상은 사람과 하는 것이지, 감정과 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원칙에 기반한 협상은 브랜드와 비즈니스 가치를 더 강하게 한다. 협상은 단기 이익 교환을 넘어 거래 이후의 관계, 장기 협력 가능성, 상호 존중을 통해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낸다. 힘든 협상일수록 ‘원칙’이 바로 서야 이 같은 가치 창출이 가능해진다. 원칙은 신뢰의 기초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판단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철학이나 가치를 중요하게 본다. 기업과 비즈니스의 경우에도 비슷하다. 기업마다 핵심 가치를 세우고 지키고자 노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관계와 이익의 딜레마에서 고민하는 협상 과정에서 이런 원칙이 무너지거나 원칙에서 벗어난 판단을 하는 걸 자주 본다. 그럴 경우 파트너십과 제안 내용에 관한 신뢰를 주려 해도 상대방에게는 와닿지 않는다.
이렇듯 협상의 원칙과 기준은 매우 중요하다. 상대 기업이 추구하는 가치와 원칙을 잘 이해하고 있을 때 그리고 그 원칙에 기반해 협상을 진행할 때, 이 모든 과정의 걸림돌을 상당 부분 제거할 수 있게 된다.
‘딜레마’는 협상 전문가를 위한 코칭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다. 협상가는 끊임없이 딜레마를 겪는데, 노련한 협상가도 수월하게 해결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하나의 기업이 업종을 달리하는 다양한 고객을 상대하는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내부 협업이 필요한 부서 간, 함께 성장해야 하는 협력사, 비즈니스를 어렵게 하는 경쟁자, 이익과 가치를 만들어 주는 소비자 등 모든 상황에서 딜레마에 직면하는데, 기업은 상황마다 나름의 소통과 결정을 한다. 사안마다 다르게 말이다.
협상의 원칙이 중요해진 건 기업 환경의 변화 때문이기도 하다. 미래에는 한정된 자원에 대한 경쟁이 치열하고, 다양한 가치와 가치관의 충돌이 빈번해질 것이다. 그러면 소통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표출되는 요구와 견해차이에 해법이 없는 경우도 많다. 경직된 태도보다 전략적 유연함이 중요한 이유다.
협상 딜레마 해결하는 협상 원칙 가져야
‘뷰카(VUCA)’라는 단어가 있다. 변동성(volatility),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성(ambiguity)을 합친 신조어로,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과 돌발 변수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을 표현한 말이다. 뷰카를 해결하려면 중심을 잡는 기준과 원칙이 필요하고, 다양한 상황 속 협상의 대화에서도 우리 기업과 비즈니스만의 협상의 원칙이 중요하다. 원칙이 없는 협상은 흔들린다. 이를 이해한 기업은 조직이 추구하는 협상 전략과 원칙에 초점을 두고, 역량을 키우고 있다. 나아가 다양한 경험을 학습 데이터로 축적하고, 이를 활용해 기업의 협상 노하우를 고유 자산으로 만들고 있다. 이 같은 과정에서 AI와 시너지를 창출하면서, 절대로 가볍게 볼 수 없는 미래 협상 경쟁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된다. 대개 비즈니스 경쟁력이 강한 기업은 세 가지를 보유하고 있다는 걸 명심하자. 지켜야 할 ‘핵심 가치’, 추구해야 할 ‘비즈니스 원칙’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협상의 원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