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해에 다녀왔다. 2000년 전 ‘철의 왕국’ 가야가 번성한 곳. 허황옥이 묻힌 수로왕비릉 그리고 대성동 고분군을 걸었다. 분성 산성에도 올랐다. 수로왕릉의 울창한 소나무 숲을 걸으며, 웅장한 옛 산성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며 아득한 가야의 역사를 가늠하고 상상했다.
많은 이가 김해를 이웃한 부산의 위성도시쯤으로 알고 있지만, 그건 분명 오해다. 김해는 인구 50만 명이 넘는 대도시이자, 도시 곳곳에 옛 가야 왕국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고도다. 김해는 2000년 전 금관가야의 중심이 된 지역. 신화에 따르면, 황금 알에서 깨어난 김수로가 가야를 건국했다.
가야 왕국의 시조가 묻힌 곳
그래서 가야를 더듬는 김해 여행의 시작점은 마땅히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을 모신 수로왕릉이어야 한다. 옛이야기는 이렇게 전한다. “거북아(龜何龜何) 머리를 내어라(首其現也) 내놓지 않으면(若不現也) 구워서 먹으리(燔烵而喫也).” 구지봉에 오른 사람들이 끝없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고, 마침내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가 내려왔는데 열어보니 그 속에 6개의 황금 알이 있었다. 이 알이 6명의 왕이 돼 여섯 가야를 건국했다. 가장 먼저 태어난 이가 바로 수로왕이었고 그는 가락국 왕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가 됐다. 다른 이들은 각각 5가야의 왕이 됐다. 수로는 나중에 인도에서 온 왕비 허황옥과 결혼한다.
수로왕릉은 김해 구산동 아파트 단지 앞에 있다. 김해 사람은 아침저녁으로 수로왕릉을 거닐며 산책을 즐긴다. 수로왕릉은 높이 5m의 원형 봉토 무덤으로, 주변에 능비, 상석, 문인과 무인 석상, 말과 양과 호랑이 석상 등을 거느리고 있다. 김해 사람은 수로왕릉을 납릉이라고 부른다. 수로왕릉에서 빼놓지 않고 봐야 할 것 가운데서 으뜸은 쌍어문(雙魚紋)이다. 두 마리 물고기가 마주 보고 있는 문양(신어상 또는 쌍어문)으로, 수로왕릉 정문 상단 좌우에 하나씩 있다. 이는 인도 아유 타국과 교류를 나타내는 상징물이라고 하는데, 멀리 외국에서도 이 쌍어문을 보기 위해 온다고 한다.
왕릉 주변으로 굵은 소나무가 울창하다. 심호흡하며 걷기 좋다. 걷다 보면 커다란 고인돌과도 만난다. 기원전 4~5세기쯤 청동기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수로왕 재위 연도가 기원후 42년이니, 당시에도 아득한 옛날 어느 족장의 무덤이었을 것이다. 왕릉 안에 또 다른 왕릉이 있는 셈이다.

가야의 찬란한 철기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
다음 코스는 국립김해박물관이다. 김해를 한글로 풀면 ‘쇠바다’다. 철이 많이 생산돼 이렇게 불렸다. 김해에서 생산된 철은 삼한과 낙랑군, 대방군 그리고 바다 건너 왜까지 수출됐다. 가야 사람은 철기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는데, 탄소를 집어넣는 제련법은 가야의 특별한 기술이었다. 역사학자는 허황옥이 가야로 오기 전, 이미 철기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추측한다.
국립김해박물관은 가야의 뛰어난 철기 문화를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곳이다. 낙동강 하류에 형성된 선사 문화부터 가야가 태동하고 발전하는 과정을 다양한 유물과 함께 보여주는데, 당시 금궤만큼이나 귀하게 취급된 덩이쇠, 녹이 슬었지만 그 형상이 고스란히 남은 칼과 창, 지금 봐도 감탄이 나오는 무사와 말의 갑옷과 투구 등이 가야의 찬란한 철기 문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삼한 시대 장신구 문화를 유추할 수 있는 수정 목걸이도 귀한 전시품이다.

신어산 중턱 고즈넉한 절
은하사는 신어산 중턱에 있는 아주 오래된 절이다. 영화 ‘달마야 놀자’를 찍으며 알려졌다. 장유화상 허보옥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온 건 김해를 통해서다.허황옥이 오빠인 허보옥과 함께 불탑인 파사석탑 등을 가지고 온 것이라는 설이 근래에 들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가야라는 국명도 부처가 도를 깨달은 인도 부다 가야(GAYA)에서 따온 불교 범어로 추측한다. 은하사는 수로왕이 창건하라고 해서 만들어진 절이다. 허보옥은 이 절의 주지였다.
절 아래 공터에 차를 대고 은하사 가는 돌계단에 오른다. 계단 너머로 대웅전 현판이 살짝 보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도다. 나는 그 구도 앞에 서 있는 잠깐의 이 순간이 매우 좋다. 강진 무위사와 영주 부석사도 이 구도 앞에 설 수 있다. 대웅전 현판이 살짝 보이는 그 순간, 나는 잠깐 걸음을 멈춘다. 그때면 내 속으로 뭔가가 찌르르하고 날아 들어오는데, 내 마음속 달린 풍경이 댕강, 하고 울린다. 혼자일 때라면 크게 심호흡하고 합장을 하지만, 동행이 있을 때는 눈치를 보며 아주 짧은 시간 멈춰 서서 후다닥 합장을 한다. 그렇다고 특별히 기도하는 내용 같은 건 없다. 이젠 이루고 싶은 것도 그다지 없고, 갖고 싶은 것도 딱히 없는 나이다. 그런데 이렇게 잠깐 합장하고 나면 내가 약간은 착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렇게 글로 쓰고 보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지만, 실제로 은하사나 무위사에 가 보면 지금 이 문장이 이해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직접 가보지 않고서는 이해하지 못할 뭔가가 있는데, 우린 이를 이해하기 위해 그곳으로 가는 것이다. 그걸 여행이라고 부른다.
허황옥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걸었던 곳
김해가야테마파크 인근에는 분산성이 있다. 시간이 난다면 꼭 가보길 추천한다. 김해 시가지인 어방동과 동상동을 양분하는 분산(분성산·327m) 정상에 있는데, 소셜미디어(SNS)에서 ‘노을 맛집’이라고 뜬다. 허황옥이 고향 아유타국을 그리워하며 거닐며 노을을 바라보면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남으로는 김해평야가 내려다보이고 서쪽으로는 김해 시가지와 양동산성, 그 뒤로는 창원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한다.
분산성은 정확한 축조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허황옥의 전설이 깃든 해은사가 인근에 있어서 가야 시대부터 축조를 시작했다고 추정하지만, 삼국시대는 물론 청동기시대 흔적도 발견된다. 해은사는 허황옥과 허보옥이 무사히 항해할 수 있도록 풍랑을 막아준 용왕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창건한 절이다.
여행수첩

시내에 있는 중국집 만리향은 곡충의씨가 운영한다. 오향장육과 만두만 판다. 만두는 피가 얇고 쫄깃함이 살아 있다. 대동할매국수의 멸치국수는 강력한 감칠맛과 통멸치로 우려낸 특유의 쌉싸래한 맛이 어우러진,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육수 맛을 낸다. 수로왕릉에서 가까운 카츠타다이는 일본 레트로 감성이 가득한 다양한 소품과 캐릭터용품이 가득한 공간이다. 도쿄의 동네 문방구에 들어선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김해 대동면의 한적한 마을에 있는 파우제앤숨은 자연 속에서 커피와 베이커리를 즐길 수 있는 대형 정원 카페다.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고 싶은 이에게 딱 맞는 공간이다.